‘발해뗏목탐사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0년 1월 자금 부족으로 탐사대 출발이 좌절됐지만,
지금은 중국의 동북공정 움직임과 맞물려 탐사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탐사대는 2005년 새해 첫날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출발해 일본 니가타 항까지 27박 28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벌써 6년이 훌쩍 지났다. 온 국민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도와줄 것만 같은 프로젝트였다. 돈을 벌자고 한 일도 아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줄 알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은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이 ‘허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나중 참담’할 정도였다. 그렇게 ‘발해뗏목탐사’ 프로젝트는 사람들의 뇌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발해뗏목탐사는 첨단과학 시대에 너무나 고전적인 ‘뗏목’을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일본 니가타 항까지 가는 무모한(?) 항해다. 지난 1998년 ‘발해 1300호’가 먼저 이 항해에 도전했다. 하지만 도착 예정지인 도고 섬 몇십m 앞에서 암초 때문에 실패했다. 당시 장철수 대장을 포함해 4명의 사나이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산에서 구조 활동을 하던 방의천씨(44)가 이 소식을 들었다. 25년간 산만 타온 ‘산 사나이’에게 이들의 비보는 자연스럽게 ‘발해’와 ‘뗏목’으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했다. 당시 발해와 바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98년 5월부터 운영하던 카페를 처분하고 본격적으로 발해뗏목탐사를 준비했다. 목표는 2000년 1월 출발이었다.
“저는 언론에 발표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줄 알았어요. 2000년 1월 1일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출발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갔어요. 모든 일간지에 2000년 1월 1일 출발한다고 발표가 났을 정도니 가능할 줄 알았죠. 하지만 제 환상이었어요. 자금이 부족해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죠.”
한번의 좌절을 겪고 그때부터 ‘지구전’이라는 생각을 했다. 10년이든 20년이든 발해뗏목은 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착실히 준비를 해나갔다. 뗏목탐사대에 전부를 걸지 않으면 영영 실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부러 직장도 알아보지 않고 생업을 포기했다. 띄엄띄엄 시민 언론 운동만 하면서. 이 일을 하면서 고향에는 한 번도 내려가지 못했다.
뗏목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곳은 모두 찾아갔다. 중국에서 진도까지 뗏목을 타고 항해를 했던 동국대 윤명철 교수나, 제주도에서 일본까지 항해를 했던 최소리씨를 찾아갔다. 자료 조사를 위해 통영과 부산에 50여 번, 제주도 9번, 울릉도에 7번 다녀왔다. 1차 탐험대에 대한 자료는 모두 수집했다. 유가족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틈틈이 발해에 관한 자료도 모두 찾아다녔다.
“뗏목에 관한 꿈만 5백 번 정도 꿨나 봐요. 뗏목의 바람이 빠져서 물에 빠지는 황당한 꿈도 꾼다니까요.(웃음) 왜 뗏목이냐구요? 배보다 안전하니까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수단입니다.”
발해인이 일본과 사신 왕래한다는 기록이 34번이라고 「일본사기」에 남아 있다. 2백여 명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발해인은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을 높여갔다. 당시 발해와 일본을 왕래할 때는 뗏목이 아니라 범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범선을 지금 제작하려면 약 30억원이라는 돈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뗏목을 이용하면 통신 장비와 개인 장비를 합해 약 3억원이 필요하다.

한 대에 8백80만원 하는 위성전화 ‘인말세트’와 휴대폰, 노트북, 햄 장비 등 통신 장비가 선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물에 빠져도 3일 동안 살 수 있는 ‘드라이 슈트’와 ‘서바이벌 슈트’ ‘침낭’ 등 개인 장비만 1억8천만원 정도가 소요될 정도다.
“돈이 없어서 배를 만들지 못해요. 그리고 발해인이 2백여명이 죽으면서 공식적으로 일본을 34번 왔다 갔다 한 정신을 본받고 싶어요. 일본인은 따라오지 못하는 탐험 정신과 청년 정신을 이어받고 싶었어요. 배보다는 뗏목이 어울리잖아요. 돈도 부족했고, 탐험 정신도 시험해보고 싶었고요.”
1천3백년이 지난 오늘 그는 ‘발해 정신’을 재연해보고 싶다. 98년 당시에는 생존율을 20% 정도로 생각했지만, 뗏목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10월 말 경에 대원들과 함께 화진포로 떠날 예정이다. 그곳에서 합숙 훈련도 하고 뗏목도 만들 것이다. 12월 30일, 해군함정의 도움을 받아 뗏목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간다. 2005년 1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해 27박 28일의 일정으로 목적지인 일본 니가타항으로 떠난다. 예정대로라면 1천3백년 만에 찬란한 발해의 역사가 재연되는 것이다. 방의천 대장과 함께 하는 대원은 황기수(39·산악인), 오한택(36·대구과학대 방송연예학과 교수), 연정남(29·인명구조 교육 강사)씨다.
2005년 1월 1일, 두번째 시도 가능할 듯
6년간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뗏목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관광부와 아름다운 녹색가게, 신한조선, 전국언론노동조합, 독립유공자유족회 등에서 그에게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몇 대기업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의 참여를 위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모금 운동도 펼칠 예정이다. 지난 2000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중국의 ‘동북공정’ 움직임 때문에 발해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다.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데, 실질적인 목적은 고구려와 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 통일시 일어날 수 있는 영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데 있다. 방의천 대장이 자료 수집을 통해 확인한 발해의 규모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서기 698년에 건국되어 서기 926년에 국호가 사라졌어요. 228년 동안 한반도 북방과 중국의 만주 일원을 지배한 나라죠. 문헌에 보면 발해의 땅이 사방 6천 리라고 했으니 얼마나 광대한 나라였겠어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나 그 기층 민중은 고구려족이니까, 중국의 동북공정 이야기만 나오면 화가 나는 거죠.”
발해사를 연구한 학자가 얼마나 귀한지, 발해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현재 7명밖에 되지 않는다. 1993년에 처음으로 박사가 나왔으니, 발해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다. 어느새 방의천 대장은 발해와 고구려 역사에 대한 학위 없는 박사 수준이 됐다. 역사학자들에게 그들의 직무유기(?)를 따질 정도다.
“내년에 뗏목을 꼭 띄워야 해요. 예전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었는데, 동북공정 움직임을 보면서 빨리 띄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중국이 먼저 시도하면 어떡해요? 시간이 가는 게 두렵습니다.”
25년간 산을 타던 산 사나이. 국내에 있는 암벽은 모두 탔을 정도고,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는 방의천 대장. 이제는 죽어 있던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숨쉬게 하려는 바다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뜻과 의미를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1일, 새해의 강렬한 햇살을 받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떠나는 발해뗏목탐사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발해뗏목탐사대는 아직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의 332-8534
글 / 최영진 사진 / 강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