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의 전격적인 합의 이후 4년여 만에 드디어 개성공단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이 만나 경제적 효과를 이끌어내는 한편, 남북 화합의 장으로서 통일 시대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개성공단은 더욱 의미 있는 공간이다. 남북 협력의 살아 있는 증거, 역사적인 개성공단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어디를 가도 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없다. 무사히 다녀오긴 했지만 여전히 북한은 두렵고 궁금한 것이 많은 미지의 나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나라. 말 한마디 잘못해 외교 문제로 번지거나 납치(?)라도 당할지 모른다는 `망상’ 수준의 걱정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2004년 12월 15일 오전 7시. 경복궁 주차장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밤처럼 어둑어둑했다. 하나 둘씩 모인 사람들이 15대의 버스에 올랐다. 이들은 북한의 개성 공업지구에서 생산한 첫 제품 기념식에 참가하는 이들. 385명의 명단을 보니 국회의원과 취재기자들을 비롯해 기업인, 학자, 문화인, 주부 등 정말 다채롭다. 문희상 의원을 비롯, 김문수·이재오·이계진·한명숙·김희선 의원 등 여·야당의 남녀 의원들이 거의 모여 국회가 이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리엔 보석공예가 등 독특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역사적 행사에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 참가한 이들의 선정 기준은 잘 모르지만 ‘각계 각층’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한 여성은 샤넬 등 최고 명품 옷과 화려한 액세서리로 온몸을 휘감아 무사히 북한에 입국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금강산에도 이런 차림으로 갔었다”고 말해 안심했다.
오전 8시. 인원 확인 후 버스가 출발했다. 안내를 위해 버스에 탄 현대아산 직원이 미니 여권과 출입국 신고서를 나눠주었다. 사진을 달라기에 생각 없이 주었는데 그것이 여권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개성은 서울에서 대전보다 가까워도 여전히 이국이다. 경복궁을 출발, 군사분계선(휴전선)과 북한 임시 출입국 사무소(CIQ)를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2시간. 거리로는 70km. 고속도로에서처럼 마구 속도를 내면 1시간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군사분계선으로 들어서니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에 등장한 송강호 같은 옷을 입은 북한 군인이 버스에 올라 인원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유없이 버스 안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누군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북한측이 화가 나서 골탕을 먹이는 것”이라고 전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해 출입국 사무소를 지나 개성공단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개성공단 준공식을 기념하는 애드벌룬이 하늘에 펄럭였다. 시범단지는 2만8천 평으로 신원, 삼덕통상, 에이제이테크 등 입주 예정 공장들이 멀리서 보였다. 리빙아트 외에는 아직 준공이 되지 않아 공장 건물만 보일 뿐이었다.
준공 기념식장에는 운동회 행사처럼 간이천막을 치고 귀빈접대실을 만들었는데, 정동영 장관을 비롯해 문희상·한명숙·배기선·김희선 의원 등 정치인들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 도올 김용옥 교수 등이 자리에 앉았다. 북한측에서는 주동창 북한중앙특구개발지도 총국장과 수행원 2명만 참석했다. 주 총국장은 앉자마자 불만을 털어놓았다.
“올해 안에 15개 공장을 준공하기로 해놓고는 리빙아트 공장 1개만 준공됐다. 남북경협 후 4년이 흘렀는데 시간도 너무 걸리고 기대한 것보다 못하다. 안팎 분열주의 세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 민족끼리 손을 잡아야 한다.”

그는 준공식이 시작되어 정 장관이 축사를 하자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화장실에 갔다”고 말했다지만 화가 난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듯 했다. 준공식장에 마련된 대형 화면에는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지난날 모습이 비쳐졌다. 현정은 회장을 보니 약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의연한 모습이었다. 남북경협이 체결되던 4년 전만 해도 평범한 주부였던 현씨가 이젠 대기업의 총수가 되고 또 갖가지 어려움을 그토록 꿋꿋하게 이겨낼 줄 누가 알았으랴. “개성공단이 남북 통일의 초석이 되길 바란다”는 현 회장의 인사말 등 식순이 끝나고 모두들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개성서 만든 냄비 서울 저녁상에 오른다
개성공단 공장 중 리빙아트는 스테인리스 주방용 냄비 2종 1천 세트를 첫 생산품으로 출하해 남북 교류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다. 공장은 1천1백평 규모의 2층 복합 건물. 1층에는 북한 근로자 1백여 명이 스테인리스 철판을 자르고 가공하고 특수 처리하는 공정을 담당하고, 2층에서는 70여 명이 최종 생산 라인에서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부분 12월 1일부터 이 공장에서 근무했다는 북한 근로자들은 19세 소녀 공원부터 50대 아저씨까지 다양하다. 냄비 공장이어서인지 단순한 공장풍경도 그렇고, 하나같이 연필로 그린 눈썹에 파란 아이섀도를 한 여성 근로자들도 그렇고, 우리나라 70년대를 연상시켰다. 명품 페라가모 스타일의 헤어밴드를 한 여성 근로자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니 “상점에 나와 있습네다”라고 답했다.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가 품질이 안 좋은지 피부와 밀착되지 않고 떠 보였다.
북한 근로자들은 장학사가 참관하는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처럼 다들 긴장한 모습. 갑자기 단체로 찾아온 남한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고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데다 북한측 지도원이 지켜보고 있으니 굳어질 수밖에. 그래도 명랑한 이들은 “아직 기계 조작에 서툴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좀더 노련한 이들은 질문을 하면 “지금 작업중입네다”라고 말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리빙아트 유영출 공장장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선 255명의 북한 근로자를 채용하고 있으며 이중 50명이 여성이란다. 이들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근무하며 월급은 57달러. 남한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북한에선 매우 높은 임금이다.
유 공장장은 “북한 근로자들이 대부분 초보라 생산성 면에서는 남한측 숙련공의 30% 수준이고 북한 담당자들 말만 듣는 것이 문제”라면서 “그러나 외국 근로자들에 비해 작업 이해가 빨라 근로자들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설비가 완전 가동되면 노동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환기나 집진시설 등 환경이 열악해 보이고 작업 자체가 직접 손을 써서 하는 일이라 선반에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산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특히 여성 근로자들의 경우 냄비 바닥에 윤을 내기 위해 시너를 헝겊에 묻혀 닦는 작업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시너가 냄새도 독하고 발화 위험도 있어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낮 12시 15분께 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첫 출하되었다. 리빙아트 냄비 1천 세트는 현대아산이 제공한 8톤 트럭에 실려 서울로 향했고, 정 장관이 서울에서 주부 대표로 참석한 주부들에게 냄비 세트를 증정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이 냄비는 곧바로 서울 롯데백화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매진됐다. 현대아산측은 “현대백화점에 판매를 의뢰했더니 고급품이 아니면 안된다기에 롯데백화점에서 판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전에 개성에서 만들어진 냄비를 산 이들은 서울의 저녁 식탁에서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며 통일을 기원했을 게다.

공장을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개성 지남산 여관에 마련된 오찬장으로 갔다. 호텔격인 이곳에서는 들쭉술, 장뢰삼술 등 각종 북한 술과 버섯, 담배, 참기름까지 판다. 달러와 유로만 받는데 들쭉술과 금강산 담배 한 보루는 10달러, 제일 비싼 것은 상황버섯으로 1kg에 25달러. 제일 싼 것은 3달러짜리 참기름.
2층 연회장에 식사가 차려졌다. 도올 선생은 건배 제의를 하며 이런 축사를 했다. “지난 개성공단 착공식 때는 정몽헌 회장과 같이 와서 선죽교도 갔다. 정몽주와 정몽헌은 이름도 비슷하고 꿈도 비슷한 사람들이다. 또 문명을 파헤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식기다. 새로운 문명을 알리는 원초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기가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남북 합작 최초의 상품이란 것은 의미가 있다”
식사는 나름대로 화려했다. 도라지 등 각종 나물, 편육과 돼지족찜, 갈치구이, 약식, 오징어와 더덕무침, 기름에 지진 떡 등이 나왔다. 미리 준비해두어서인지 다 식었고 간도 우리 입맛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잘 알기에 이렇게 잘 차린 음식을 먹어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자리를 함께 한 북한 기록소(우리나라 국립영화제작소 같은 곳) 직원은 “위대한 김정일 장군께서는 우리 고유의 민족 음식을 장려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주 먹어야 자식들도 그 음식을 배우고 안다며 만드는 방법 등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특히 개성 음식이 유명하지 않습니까”라며 식성 좋게 먹더니, 남한측이 경협에 비협조적이고 약속을 안 지킨다, 로동신문은 보느냐, 홈페이지는 전세계인이 보라고 한 건데 왜 그렇게 민감하냐 등 남한 성토를 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추웠는데 마침 따끈한 국이 나왔다. 육개장인 줄 알고 먹었다. 고기도 부드럽고 국물맛도 개운했다. 다른 재료도 별로 들어 있지 않아 무슨 국이냐고 물었더니 가녀린 용모의 접대원 소녀는 “단고깁네다”했다. 보신탕이었다. 남한서도 안먹은 보신탕의 첫경험을 개성에서 하다니· 하지만 솔직히 맛있었다. 마지막 디저트로는 군고구마가 나왔다.

사람들은 서서 가만히 보거나 간혹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도 꼬마들은 천진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굴렸다. 이 겨울에 장마철에 신는 장화를 신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작은 규모의 아파트도 보이는데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이들이 있는데 오후 3, 4시에 왜 남자들이 창가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천천히 걸어다니는 이들은 있지만 두런두런 수다를 떨지도 않고, 물건을 산 봉투를 들고 다니는 이들도 볼 수가 없다.
개성상인의 도시이며 칼칼하고 맛있는 개성 음식의 본고장이란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김정일 혹은 김일성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등의 구호도 적혀 있다.
지옥철로 불릴 만큼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하철, 걸어다니기만 해도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치는 복잡하며, 형형색색의 건물과 값비싼 명품, 화려한 옷차림의 서울에 익숙해 있다가 이토록 고요하고 썰렁한 개성을 마주하니 마치 시대와 배경을 구분할 수 없는 영화 속으로 빠져든 느낌이다.
서울에서 차로 겨우 2시간 거리인데 문화, 풍경, 생활상의 차이는 아득하기만 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아니 50년대의 어느 시골 거리에 온 듯한 느낌이다. 유난히 작은 키에 낡은 옷을 입은 소녀를 보면서 ‘저 아이에게 따스하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밝은 미소를 되찾아줘 개성, 아니 북한을 밝은 색으로 만들어주려면 우리가 정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개성공단의 성공을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 경복궁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 10시간 전에 서울을 떠났다가 북한을 거쳐 다시 돌아온 것이 믿기지 않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린 송년모임에 참석하고는 자꾸 가슴이 아려왔다. 마치 사고 쳐서 돈도 잃고 건강도 잃은 동생을 버려두고 혼자 잘 먹는 누이의 마음처럼…
글 / 유인경 기자(뉴스메이커 편집장)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