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단에 ‘무의미의 시’를 남긴 김춘수 시인 잠들다

한국 시단에 ‘무의미의 시’를 남긴 김춘수 시인 잠들다

“시는 내 모든 것이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다”

국민의 애송시로 꼽히는 ‘꽃’의 시인이 잠들었다. 4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저세상으로 떠난 고 김춘수 시인. 한국 시단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기에,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흐른다.

유학 시절 우연히 산 릴케 시집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

지난 11월 29일, 한국 시단의 큰 별이 떨어져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꽃의 시인’ ‘무의미의 시인’ 등으로 불리던 대여(大餘) 김춘수 시인(1922 ~ 2004)이 지난 8월 4일 저녁식사 중 호흡 곤란 증상과 함께 뇌가 손상돼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넉 달째 투병 생활을 하다 끝내 타계했다. 고인의 타계 소식이 들리자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에는 많은 시인과 문인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에서 만석꾼 집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 경기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일본인 교사와의 불화 때문에 5학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퇴를 한다.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는 농구와 육상 단거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170cm의 키에 꽂꽂한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으로 다져온데서 나왔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대학 예과에 입학할 준비를 할 때 평생의 업이 된 ‘시’를 만난다. 고인은 원래 법학을 전공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대학촌인 간다(神田)의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산다. 그 시집에서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느냐’는 구절을 읽고 충격을 받아 시의 세계에 온몸을 던지기로 했다.

김춘수 시인은 릴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릴케의 초기 작품들이 존재론적이라는 점에서 좋아했고, 나의 ‘꽃’ 등 꽃을 주제로 한 10여 편의 시 역시 존재론적 세계를 다룬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가 일왕을 험담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3학년 때 퇴학을 당한다. 귀국해 4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당시 시인은 남의 시를 모방하면서 어떻게 쓰면 시가 되는지 습득해갔다.

1945년에는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박재성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고, 1946년 ‘애가’를 발표하면 문단에 나왔다.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펴낸다. 고인은 ‘나의 문학 실험’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50년대로 접어들자 나에게 비로소 길이 열리는 듯했다. 나는 남의 시의 압력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내가 시도한 시는 관념적인 색채를 띠고 몹시도 과작이 되어갔다. 1년에 한 편 정도가 고작이었다. 꽃 연작시에 있어서 꽃은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꽃에 빗대어 관념을 드러내려고 했다. 나는 그때 실존주의 철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학생 때 읽은 릴케의 관념시가 새삼 새로운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꽃’은 50년대 초에 쓴 시라고 알려졌다. 당시는 일제와 해방 공간,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격변기. 학교 교무실 책상 한쪽에 놓인 꽃이 그 빛깔을 곧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시상이 떠올랐다고 회고한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시인은 통영중과 마산중고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인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 ‘무의미의 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는 관념으로 굳어지기 전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 인식에서 시작했다. 시에서 관념과 의미를 빼면서 그의 시에는 이미지만이 남는다는 생각으로 이미지 그 자체를 위한 이미지로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장시 ‘처용단장’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시인은 자신의 시도를 ‘순수시’ 혹은 ‘무의미의 시’라고 이름 붙였다.

김춘수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대표적인 참여시인 고 김수영이다. 평자들은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이야기한다. 고인은 외부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에 답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순수시를 외곬로 끌고 간 것은 김수영 때문이었다. 김수영이 추구하는 그 세계로 접어들었다간 그만 못할 것 같은 강한 경쟁심이 있었다.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그 양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굉장히 허전해지더라”고 털어놓았다.

61년부터 81년까지 20여 년간 경북대와 영남대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시인은 열강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강의실은 항상 만원이었고, 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다음 강의를 맡은 교수가 복도에서 기다리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항상 존경받던 시인은 자신의 인생 중에 ‘실패’라고 말하는 정치에 4년간 몸을 담는다.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4년간 활동한 것. 수많은 학생들과 문인들이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드높였다. 4년 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학생들의 반발이 커서 정년퇴직 한학기를 남기고 사퇴서를 내야 할 정도였다.

시인은 문예지 「시와 시학」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정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곳으로 간 이상 적어도 문화나 교육 분야에서만은 일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보니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당시 5공화국 정부가 단순히 당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인은 정치와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시작에 몰두했다. 91년 25년 만에 완성된 연작시집 「처용단장」은 60년대부터 고민해온 ‘무의미의 시’의 결정체다. 그후 2~3년마다 한 권씩 시집을 펴내며 후배들에게 자극을 줬다. 78세인 2000년에는 청마 유치환 시인을 기리기 위한 청마문학회가 제정한 ‘청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9년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망부가’ 「거울 속의 천사」를 펴내기도 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쉼없는 열정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 시인은 쓰러지기 직전에도 「현대시학」 7월호에 ‘시인의 어깨’라는 시를 기고 했다. 60여 년간 1천여 편의 시와 16권의 시집을 남겼다. 시인이 쓰러지기 전에 손수 편집해 출판사에 건넨 작품들을 모은 시집 「달개비꽃」이 유고시집이 됐다. 노년에도 시에 대한 창작욕을 불태웠던 시인. 그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추구해가는 과정 자체가 시라고 본다. 아직도 나는 시가 이것이라고 감히 정의를 못 내린다. 단지 내게는 시 쓰는 자체가 괴로움이었고, 즐거움이었고 해서 내 모든 것이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한국 시단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의 애송시인 ‘꽃’을 외우면서 시인의 기억을 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시인이 묻힌 곳은 반백년 함께 해로했던 부인 명숙경 여사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꽃’ 전문)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故 김춘수 시인은…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일본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64~1978년 경북대 교수

1979~1981년 영남대 교수

1981년 제 11대 국회의원

1986~19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시집 「구름과 장미」 「기」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꽃의 소묘」 「거울 속의 천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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