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에 비해 사람들은 독도를 너무 몰라요. 나무도 크고, 사람도 살아야 실질적인 우리 섬!”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오랜 시간 묵묵히 ‘독도 사랑’을 실천해온 사람이 있다. 1988년부터 독도 촬영을 시작해 18년 가까이 독도 사진을 찍어온 독도 전문 사진작가 김정명씨. 섬 안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격랑 속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현대판 독도의용수비대, 김정명의 아주 특별한 독도 사랑.
18년간 한 우물 판 ‘평생 독도 지킴이’
이글이글 독도의 해가 진다. 해가 지자 서도 어민의 집에 등불이 켜진다.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도 바다를 밝힌다. 독도의 밤은 어둡지 않다. 달과 별, 집어등, 뱃길을 밝히는 등대 불빛이 섬 전체를 아스라이 비춘다. 찬란한 여명이 독도의 어둠을 밀어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바닷물에 맑게 씻긴 빛 고운 해가 힘차게 떠오른다. 독도의 푸르른 풀과 맑은 바다 위를 나는 괭이갈매기 떼의 모습은 아련히 흩날리는 꽃잎 같다. 험한 바위 절벽 아래로는 샘이 솟는 물골이 있다. 억겁을 두고 파도가 뚫어낸 해식굴. 자연이 만들어낸 모양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선명한 한반도 지도 모양을 하고 있는 산비탈의 풀밭. 하늘 위에서 보면 수석처럼 아름답고, 바다에서 보면 두둥실 떠가는 돛단배 같다. 한겨울, 눈 쌓인 독도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한여름 태풍의 한가운데 있는 독도도 있다. 1988년 4월의 독도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바위섬인데, 2003년 6월의 독도는 울창한 숲이 들어선 아름다운 섬으로 새 옷을 입고 있다.
사진작가 김정명(59)의 ‘우리독도사진전’을 통해 본 독도의 모습이다. 김정명씨는 자그마한 꽃 한송이, 풀 한 포기도 놓치지 않고 독도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우리독도사진전’에서는 세월 따라 변한 독도의 모습을 비롯, 계절의 변화 속에 던져진 독도까지 독도의 겉과 속, 어제와 오늘이 모두 담겼다. 날씨 좋을 때 몇차례 다녀온 게 전부인 방문객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오랜 독도 사랑’의 산물.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미처 알지 못한 독도의 아름다움에 크게 한 번, 작가 김정명씨의 꾸준하고도 깊은 독도 사랑, 나라 사랑에 또 한 번. 그 옛날 독도의용수비대가 총, 칼로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던 일본인에 맞서 독도를 지켜냈다면, 독도 전문 사진작가 김정명씨는 카메라를 무기 삼아 이렇듯 독도를 우리 땅으로 지켜내고 있다.
88년부터 무려 20차례, 총 107일간 독도에 머물며 독도의 면면을 속속들이 촬영해온 사진작가 김정명씨. 그는 1987년 한 방송사에서 사진 촬영 의뢰를 받고 독도와 처음 연을 맺었다.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 김정명씨는 독도를 처음 밟던 그 순간의 감동을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어요. 직접 가서 느껴보지 않으면 몰라요. 처음 만난 독도는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느 바위섬이었죠.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황량한 곳에서도 생명이 자라고 있더라니까요. 새가 지저귀고, 벌, 나비가 날고… 바다 내음과 꽃향이 어우러져 곤충을 유혹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가슴이 콩콩 뛰었을 거예요."”
수천 그루 나무 심어 우리 독도를 푸르게, 푸르게!
사진작가 김정명씨에게 독도는 피사체, 그 이상이다. 그는 독도의 풍광을 카메라로 옮기는 일 이외에 독도를 푸른 숲으로 가꿔나가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을 통한 나무 심기 활동이 그것. 사진작가인 그가 본업까지 망각해가며 나무 심기에 매달린 이유는 따로 있지 않다. 우리 땅 독도를 자연섬으로 가꿔 우리 손으로 지켜내자는 것.
“섬은 해양법상 암초와 인공섬 그리고 자연섬으로 구분되는데, 영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섬뿐이에요. 독도가 자연섬으로 일본과 우리 영토의 경계가 되기 위해서는 독도에 사람이 살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자라야 하죠. 그래서 시작한 일이에요.”
1989년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을 결성 같은 해 4월 20일 독도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김정명씨는 이후 3년 남짓 울릉도에서 해송나무와 동백나무 등 수천 그루를 독도로 가져가 심었다. 가수 한돌, 소설가 최성각씨 등이 당시 그와 뜻을 같이한 ‘나무 심기 동지’들이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피해가며 로프에 몸을 의존해 가파른 산비탈에다 나무를 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포기란 없었다.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곳이면 위험한 벼랑도 마다치 않았고, 자그마한 묘목들이 땅속 깊이 뿌리 내리길 빌고 또 빌며 정성껏 흙을 다졌다. 시키는 사람도,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일. 사서 한 고생이지만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컸다.
“독도가 보여주고 있잖아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독도는 시커먼 바위섬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1천5백여 그루 나무가 푸른 숲을 이루고 있죠. 그렇다고 뭐 제가 대단한 애국심을 가지고 한 일은 아니에요. 처음엔 막연히 우리 애들한테 아버지가 우리 땅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는 모습만을 보여줘도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이렇게 큰 기쁨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보람이 크죠. 푸른 독도만 보면 가슴이 벅차 올라요.”
독도와 처음 연을 맺은 이래 1년에 한두 차례는 꼭 독도를 찾았다는 김정명씨. 오래된, 하지만 질리지 않는 연인처럼 독도는 그렇게 김정명씨를 끈질기게 유혹해왔다. 하지만 사랑에는 기쁨 이상의 아픔과 시련도 따르는 법. 독도는 가고 싶다고 해서 밟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섬. 접안 시설이 갖춰진 동도는 그나마 낫다. 하지만 서도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 섬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다 돌아온 적도 여러 차례. 김정명씨는 “독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었으면 누구나 가서 찍었겠지 지금처럼 이렇게 독도 사진이 귀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반문한다.
1995년 입도 허가가 금지되면서부터는 오징어잡이배까지 이용해 위험을 무릅쓰고 독도를 찾았다. 어느 해인가는 태풍 때문에 평소 울릉도에서 배로 6∼7시간 거리인 독도까지 가기 위해 무려 78시간을 해상에서 표류하는 극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뱃사람도 풍랑을 만나면 멀미를 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배와는 거리가 먼 사진쟁이에겐 오죽했을까? 독도의 변모 과정을 담고 있는 우리 독도의 소중한 기록은 김정명씨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은 높다. 하지만 독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김정명씨는 독도를 우리 땅으로 지켜내기 위해선 독도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마네 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을 비롯한 최근 일본의 움직임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기 위한 일본의 전략입니다. 저는 이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1950년 독도에 공시지가를 매겨놨어요. 그런데 우리는 일본보다 50년이나 늦은 2000년에 만들었을걸요? 뿐만 아니라 3천 명 이상의 일본인이 독도로 거주지를 옮겨놓은 상태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래 전부터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고 나갈 증거물들을 만들어놓고 있어요. 그런데 독도를 실소유하고 있는 우리에겐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거죠. 일본이 우리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 절대 넘어가선 안 돼요. 대신 독도를 정확히 알고, 나무도 심고, 발을 디뎌 실질적인 우리 섬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죠.”
독도를 자연섬으로 계몽하자고 부르짖는 사진작가 김정명씨. 그는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이 좋아 꽃을 찾아 전국을 누비다 독도를 만났고, 또 사랑하게 됐다. 이제 그는 ‘야생화 시인’ 대신 ‘독도 전문 사진작가 김정명’으로 불린다. 카메라 장비 둘러메고 독도의 미(美)를 담아온 지도 어느덧 18년째. 그는 말한다. 독도를 알고 나니, 독도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당부한다. 독도를 우리 땅으로 지켜내려면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 첫걸음은 독도를 제대로 아는 일이라고 말이다.
글/ 최은영 기자 사진 / 김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