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정무위에서 ‘삼성 국감’ 이끌어낸 김현미의원

국정감사 스타

②정무위에서 ‘삼성 국감’ 이끌어낸 김현미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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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삼성을 보는 눈길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녀가 날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촌철살인’의 통쾌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다. 욕 얻어먹기 좋은 대변인 자리에서 7년을 버틴 원동력이다.

김현미 의원은 17대 초선의원이지만, 여당과 야당을 거친 당직 생활의 경험은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데 큰 밑바탕이 됐다.

애플사의 아이팟 나노, 김현미 의원 폭로로 조사받을 듯
당과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오래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을 판단한 뒤에는 ‘거리낌’이 없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는 것이다. 김현미 의원(42)의 입에서 나온 직설적인 표현은 시원함을 넘어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통렬하다. 24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대변인 직을 무려 7년 동안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진출한 김 의원. 국회의원은 처음이지만 1987년 평민당을 시작으로 2005년까지 정치의 한복판에서 꿋꿋이 버텨온 베테랑이다. 올해 정무위 국정감사장에서 김현미 의원이 유난히 돋보였다. 재경위의 심상정·박영선 의원의 삼성 국감을 정무위에서도 이어나간 주인공이다.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한 삼성 국감의 ‘다크호스’였다.

“정무위는 국회에 소속되어 국정 전반에 관한 정책을 다루는 위원회예요.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등이 정무위에서 국정감사를 하는 기관이죠. 재경위의 박영선 의원과 정보를 공유했어요. ‘이거, 이거는 꼭 물어보고, 답을 얻어내라’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죠. 시너지 효과가 있었어요.”

김현미 의원은 정무위 국정감사장에서 ‘삼성캐피탈의 불법 대환대출 문제’ ‘금감위가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금산법 위반을 적발하고도 추가 조처를 취하지 않은 이유’ ‘삼성전자가 MP3 플레이어 아이팟 나노에 반도체를 반값에 넘긴 이유’ 등을 추궁해서 삼성 관계자와 정부 기관장들을 진땀 빼게 했다. 특히 아이팟 나노의 저가 공세로 위기를 맞았던 국내 MP3플레이어 업체는 김 의원의 존재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아이팟 나노 이야기에 박수를 많이 쳐줬어요. 반도체 값이 거의 반값으로 애플사에 제공돼서 아이팟 나노가 국산 제품보다 아주 싸게 수입됐거든요. 저의 문제 제기로 아이팟 나노는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조사를 받을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지 1년 5개월. 그동안 초선의원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활약상을 보여왔다. 1년에 3천억원이나 하는 휴면예금을 ‘사회공헌기금’으로 기부하자는 법안은 당론으로 채택됐다. 이 기금은 신용불량자나 저소득층의 신용회복을 위한 기금으로 쓰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업법을 대폭 손질하기도 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김현미 의원은 현재 경기도 당 위원장을 맡아 지역구를 다지고 있다. 당헌당규상 비례대표는 한 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 총선에서는 일산 서구에서 출마할 예정이다. 상대는 3선의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결이 펼쳐지면 가장 불꽃 튀는 경쟁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이 지역구 의원보다 활동하기는 더 좋아요. 지역구 의원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지역에 내려가야 하는데, 비례대표 의원은 그러지 않아도 되거든요. 무엇보다도 민원이 적다는 것이 좋아요.(웃음) 그래도 국회의원이 되면서 욕 많이 먹었어요.”

“열린우리당이 이번 재·보선에서는 너무 조용한데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가장 아픈 데를 찌르네요!(웃음)”라고 답변한다. 그만큼 열우당의 지지율 하락이 재·보선 준비에도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김 의원은 노무현 정부가 훗날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농촌 소녀 상경기
전북 정읍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는 깡촌(?) 신태인에서 1남 7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김현미 의원. 전기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들어왔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연세대 정외과에 입학했으니 고향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는지 상상이 간다. 분명 대학에 들어갔다는 플래카드가 마을 초입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의원은 고향 사람들이나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공부가 아닌 운동(?)에 전력 투구한다. 고향에서 김 의원은 동네의 자랑이었지만, 막상 부모님은 운동을 하는 딸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1987년 운동을 그만두고 집에 내려갔다. 하지만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았고, 하루빨리 독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홍보 담당’이었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할 때 홍보 담당자로 들어갔어요. 당시 평화민주당이 만들어졌고, 저는 거기에서 평화민주당보 기자로 일했죠. 87년 대선 때 김 대통령 유세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을 순회하면서 취재 활동을 했어요. 그때 김 대통령을 통해서 정치를 배운 거죠.”

김 의원은 정치인 DJ를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국회의원이 아닌 당직자로 일하면서 정치의 생리를 하나 둘씩 익혀나갔다. 김 의원은 노동운동, 야당, 청와대까지 ‘정통 코스’를 밟았다. 당 부대변인 5년, 청와대에서 국내 언론비서관 1년, 청와대 대변인 1년 등 총 7년간 대변인 직을 맡으면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는 기회도 잡았다. 특히 대변인 일을 하면서 남긴 ‘어록’ 중에서 ‘수첩공주’라고 일갈한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김현미 의원은 대변인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아직도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하다며 웃을 정도다. 기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여론을 알 수도 있고, 대변인 역할을 통해 정치의 흐름도 먼저 알았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대변인보다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국회의원은 정책을 바꾸고 법을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잖아요. 야당 생활이나 당직자 생활을 할 때는 제가 밖에서 아무리 떠들고 외쳐도 국회의원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책의 가부를 결정하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권한이 있거든요.”

국회의원으로서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가정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중3 승우, 초등학교 6학년 승일 두 아들은 엄마가 없어도 ‘스스로’ 하는 아이들이 됐다. 예전에는 아이들과 함께 책도 읽어주던 엄마지만, 지금은 꿈도 못 꾼다. 회사를 다니는 남편 백장현씨의 도움과 아이들의 이해가 없으면 집에서 욕 얻어먹기 딱 좋았다고.

김현미 의원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풀어주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 ‘정치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뛰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이번 삼성 국감을 준비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등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다만 아이들이 컸을 때 지금 세대가 겪은 갈등과 오해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김현미 의원은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김 의원이 한반도의 평화를 앞당기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박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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