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인재근 부부

손숙이 만난사람

①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인재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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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이지만 품을 수 있는 세상이 있어 살 만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에 ‘그 사람’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궁금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알고 싶고,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궁금합니다. 이달부터 연극배우이자 전 환경부 장관인 손숙씨가 매달 ‘그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레이디경향 독자들을 대신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첫 번째 ‘그 사람’은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부부입니다.

누군가 말했다. 사람(人) 사이를 ‘터’서 내면을 바라보는(view) 것이 ‘인터뷰’라고. 일견 말장난 같지만 일리가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엔 진솔한 웃음과 따뜻한 눈물꽃이 피어난다. 인터뷰하는 이와 인터뷰당하는 이의 진심이 만난 자리에는 ‘믿음’이라는 열매가 맺힌다. 연극배우 손숙씨가 아름다운 열매 맺기에 나섰다.

“내조, 외조가 따로 있나요? 부부라기보다는 동지입니다”

손숙이 만난 첫 번째 사람은 최근 화제가 된 ‘숟가락 연하장’의 주인공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부부다. 김근태 장관은 ‘정치계의 신사’라는 별명답게 ‘클린 지수’(청렴도) 수위를 달리는 공직자다. 그러나 고문의 어두운 그림자, ‘김 진지’로 대변되는 딱딱한 이미지가 자신에게나 대중에게나 적잖은 부담이 되어 왔다. 편견은 실효성 없는 의견이라고 했던가. 고생한 사람 같지 않게 말갛고 하얀 얼굴, 점잖은 말씨에 배인 따뜻함, 아내의 이름을 친구처럼 불러대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분명 그의 모습이다. 모 방송 출연 이후 미니홈피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며 흐뭇해 하는 부부. 방송을 통해 김장관 부부가 좋은 뜻을 위해 기증한 숟가락 연하장은 천만 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첫아들 낳고 결혼식 다시 올린 사연
손숙(이하 손) 와, 이게 얼마 만이에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김근태(이하 김) 오랜만에 손숙 선배를 만났는데 포옹이라도 한 번 해야지요.

손 하긴 요즘 연상의 여자가 인기라면서요. 사모님도 계신데 괜찮으신가 모르겠네.(웃음)

인재근(이하 인) (웃음) 신경 쓰지 마시고 하세요.

손 두 분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신 거예요?

인 지금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이신 최영희 선배가 저희 과 선배거든요. 그 선배 부부가 중매쟁이였죠. 학교 다닐 때부터 그 선배가 “너 연애하지 마라, 연애하지 마라” 그랬어요. 신랑감 있다고.

손 김장관님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어떻던가요?

인 도피 중이던 시절이었어요. 첫인상이 좀 우울해 보여서 퇴짜를 놓을까 말까 하다가 같이 (민주화)운동하는 입장에서 측은지심으로 살려준 거죠.(웃음) 술도 잘 못하는 이가 매운탕 한 그릇을 시키더니 소주를 벌컥 벌컥 몇 잔 마시고는 “나랑 결혼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 들고 쫓아가겠다”고 하더라구요.

손 결혼을 두 번이나 하셨다면서요.

김 1978년 당시 도피 중이었기 때문에 처가 식구들만 모여서 식사하는 정도로 결혼을 했지요. 10·26이 일어난 다음 1880년에 세상으로 나와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다들 결혼을 두 번씩 했어요.(웃음)

손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됐겠어요. 결혼을 하니 뭐가 좋던가요?

김 대화 상대가 있다는 게 용기를 갖게 만들더군요. 다른 한편으로는 ‘야, 이제는 먹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게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10·26 이후 취직 좀 해보려고 의료보험연합회에 면접하러 갔다가 싸움만 하고 돌아왔어요. 면접관이 유신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기에 꾹 참았는데, 또 긁더군요. 그래서 폭발했죠. 집에 돌아와 보니 몇 달 전 태어난 아들아이가 자고 있어요. 그 앨 보면서 자신이 참 한심하더군요.

손 ‘좀 참을 걸’했겠어요?

김 참을 걸은 아니고… 참을 수는 없었구요. ‘이제 어떡하나’ 하는 거였지요.

손 그래서 뭐 먹고 사셨어요? 인 여사님이 돈을 버셨나요?

김 제가 피신할 때는 인재근씨가 도시산업선교회에 나갔습니다. 옥살이를 마치고 80년대 후반기부터 그곳에 제가 나가면서 역할을 바꿨죠.

손 아내를 인재근씨라고 호칭하세요?

김 기분이 나면 ‘재근아’ 그러고, 보통은 ‘인재근’ 그러죠.

인 저는 김근태씨라고도 하고 누구 아빠 하기도 하고. 화나면 ‘김꼰대’ 그래요.(웃음) 애들도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어서인지 그냥 엄마라고 안하고 인재근 엄마 그래요. 맏이인 아들은 지금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고 딸애는 대학 졸업하고 얼마 전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남편이)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꼭 자기만 딸 있는 거 같아요. 시집도 안 보낼 거래요. 딸애도 아빠 앞에서는 듣기 좋으라고 시집 안 간다고 하는데 제가 슬쩍 “너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 치고 갈 거지?” 했더니 “물론이죠!” 하더라구요.

한 박자 느린 남편이 불러준 ‘사랑의 미로’
손 감옥에 계실 때 ‘사랑의 미로’를 생일 선물로 불러주셨다면서요?

인 1985년 남영동(전 안기부 대공분실)에서 혹독하게 고문당하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는데, 그해 겨울 제 생일을 맞았어요. 면회실에서 저한테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줬죠.

김 당시 이근안씨한테 고문을 받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윤동주가 이렇게 해서 옥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시인도 아니고 여기서 옥사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중심을 잡았지요. 아내에게 ‘나 지금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약간 트로트 비슷해서 나한테는 통 안 맞는데 그땐 그게 기분이 또 맞더라구요. 인재근은 깔깔대고 웃고….

인 그때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았어요. 노래도 못하면서 노래 선물을 한다고 그러냐면서….

손 아빠 없이 혼자서 아이들 키우면서 많이 힘드셨지요?

인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죠. 그래도 아이들이 그래요. 아빠 없었어도 그 역할을 엄마가 확실히 해줬기 때문에 행복했다고. 한 달에 한 번씩 기차 타고 아빠 만나러 갈 때면 꼭 소풍 가는 것 같았대요. 아이들 만날 때는 특별 면회가 됐거든요. 아빠도 아이들 만나는 날이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멋을 다 내고 나오는 거예요. 목욕도 하고 머리도 곱게 빗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랑 딸기우유, 초콜릿 같은 걸 사서 보따리에 담아서 나오죠. 아들은 노래를 워낙 잘해서 아빠한테 노래 불러드리고 우리 딸은 고무줄의 여왕이라 아빠 앞에서 고무줄 묶어놓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그랬어요.

손 완전히 영화네. 그림이 그려지네요.

인 애들이 착하게 잘 커주었어요. 사춘기도 잘 넘어가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인 것 같아요.

손 정치인으로서 김장관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요?

인 동전의 양면 같은 구석이 있어요. 김장관은 항상 한 박자 느려요. 그런데 그걸 뒤집어 보면 굉장히 신중하고 진지하고 겸손한 면을 볼 수 있거든요.

손 부부싸움 할 때도 한 박자 늦으세요?

인 부부싸움 할 때는 저한테 공격을 받으니까 일단 방어부터 하지요. 우리도 남들처럼 사소한 일로 잘 싸우곤 해요. 저번에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찍고 나서도 한판 싸웠어요. 그날 ‘어머나’하고 ‘찬찬찬’을 같이 불렀는데 잘 모르는 노래를 정했다고 나무라더군요. 저도 몇 번 들어보기만 했지 잘 모르는 노래였는데 비서관들이 정해주기에 그러마 한 거였어요. ‘인재근이는 매사에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다가 대형사고 칠 거’라고 공격하대요. 거기서 제가 화가 났어요. 내가 대형사고 친 게 뭐 있냐고, 그까짓 노래 좀 못 부르면 어떠냐고, 이날 이때까지 대형사고 친 사람이 누구냐 그랬죠. 마누라 눈에 눈물 빼고 그런 사람이 누구냐 그랬더니 그냥 거기서 깨갱 하더라구요.(웃음)

손 화해는 어떻게 하세요?

인 보통 화해는 남편이 먼저 해요. 만약 제가 골난 상태로 남편을 출근시키면 다시 뛰어들어와요. 인재근, 나를 이렇게 내보내도 되는 거냐고 막 항의해요. 그럼 저는 너무 우스워서 막 웃어버려요.

손 정치인들 부인 중에 큰손도 적잖은데, 인여사님 혹시 재테크 해본 적 있으세요?

인 제가 돈하고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나는 돈하고 인연이 없는데 괜히 돈 따라 다니다가 추한 꼴 보이지 말고 그냥 오는 돈이나 잘 붙잡고 잘 먹고 잘 살자.(웃음)

손 오는 돈은 좀 있으시구요?

인 (남편을 가리키며)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월급 타오잖아요.(웃음)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용서하기까지
손 이근안씨 잡힌 직후에 장관님을 제 방송에 모셔다가 인터뷰를 했었는데 기억나세요? 그때 용서가 되냐고 했더니 용서가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 처절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후에 직접 면회를 가셨잖아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잠시 한숨) 뭐… 복잡합니다. 여주교도소에 있던 동지 두 명을 작년 추석에 면회하러 가기로 돼 있었어요. 근데 그 전날 거기 이근안씨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거길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가십거리 되기 딱 좋은데 그렇다고 면회하고픈 마음은 안 들고, 괴롭더군요. 감옥에서 맞는 명절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가기 전에 이근안씨한테 면회할 용의가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더니 면회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장영달 의원이 저처럼 그곳에 면회를 갔다가 전날 제가 이근안씨 만나고 간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언론에 알려진 거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데 착잡하더군요. 그때는 내게 그렇게 군림했는데 신세가 역전되니 무척 작아 보여요. 그 전에는 항공모함처럼 커 보였는데… 용서를 구한다고 말은 하는데 제 상처가 커서 그랬는지 마음에 와닿질 않더군요. 진실한 마음이라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려야 하는 게 아닌가, 단순히 가석방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손 저라도 용서하기 참 어려울 것 같아요.

김 마음을 달랬지요. 사람의 마음이 진실하냐 아니냐 하는 걸 판단하는 건 내 권리는 아닌 것 같다, 그걸 따질 권리는 신한테만 있는 것 같다, 신의 권리에 개입하기보다는 용서를 구하는 그 말이라도 받아들이자 하고. 심정이 하도 복잡해서 그날 밤 잠을 잘 못 이뤘습니다.

손 현실 정치에서 ‘아, 정말 이건 아니다, 정치하기 싫다’ 싶은 적도 있으셨죠?

김 그럼요. 정치하는 데 떳떳하지 않은 돈을 쓰고 받고 거래하고 하는 게 전 좀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지난 민주당 경선에서 돈이 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서 돈과 조직, 지역연고 같은 것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걸 실감했죠. 그걸 막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양심선언이라는 방법으로 자해를 했던 겁니다.

손 그랬죠. 참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권 주자로 회자되는 입장에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현실정치에서 선거가 가능할까요?

김 쉽진 않지만요. 한국에서 정권교체는 불가능하다, 정권 재창출도 불가능하다 하는 걸 뒤집었잖아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두 번이나 이뤄졌으니 세 번째 기적도 가능하지 않나 하는 기대를 갖습니다.

손 언제쯤 당으로 돌아가실 계획이신가요?

김 장관으로서 국민연금법 개정 문제라든지 식품안전 문제라든지 현안이 많습니다. 김치 때문에 전국민이 불안해 하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식품안전체계를 확실히 좀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것까지는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손 1년 4개월의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스스로 잘했다 생각하시는 건 어떤 게 있으신지요?

김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올리고 의료수가를 얼마나 올릴 건지를 둘러싸고 협상이 늘 결렬돼 왔어요. 왜 결렬됐냐 하면 (협상 당사자가) 협상을 결렬시키고 선명하게 주장해야 자기 조직으로 돌아가서 뽐낼 수가 있거든요. 타협하자고 그랬어요. 결국 세 번의 타협에 성공했어요. 최저생계비도 두 번 합의했구요. 이걸 국민들이 기억해주시면 공무원들이 더 잘할 수 있는데… 격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손 국민들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잘하는 일에는 박수도 쳐주셔야죠.

김 손숙씨가 박수치라고 하시면 박수 좀 많이 쳐주실 것 같은데요.(웃음)

손 저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언제 만나도 항상 ‘내 자리’를 지켜가시는 두 분의 모습이 부럽습니다. 오늘 레이디경향 독자들에게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근태(58)
경기도 부천 출생. 중3 되던 해에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그만두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며 소위 ‘KS’(경기고 서울대) 마크를 달았다. 대학 시절 고(故) 조영래 변호사, 손학규 경기지사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꼽히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국가 내란 음모사건 혐의로 유신 정권이 끝날 때까지 7년 동안 수배자 생활. 이후 80년대 신군부 정권에 맞서 민청련을 결성, 고문과 투옥으로 점철된 혹독한 세월을 보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독일의 함부르크 재단이 선정한 세계의 양심수. 1992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지지활동을 시작으로 1995년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중앙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정직성, 언행일치, 품성, 지성 등을 기준으로 투표·선정하는 ‘백봉신사상’ 4회 수상. 현재 거론되는 대권주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클린 지수’를 자랑하지만 낮은 대중성이 최대 약점이다.

인재근(52)
이화여대 사회학과 재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부평의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이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상담 간사, 민가협 총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옥에 있는 남편을 ‘외조’했다. 남편의 고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 뉴욕타임즈 등 외신을 통해 진실을 폭로하고 세계인권단체의 관심과 지원을 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1987년, 남편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 특유의 포용력과 친근함으로 재야 인사들 사이에서 남편보다 더 인기가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단법인 사랑의친구들 운영위원, 밝은청소년지원센터 이사,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고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연합회 고문, 한반도재단 이웃사랑나누기자원봉사단장 등 왕성한 대외 활동중.

정리 / 박연정 기자 사진 / 손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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