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출마 선언을 두고 “행정 경험이 없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아내 설난영씨는 “10년 넘게 정부기관과 국정감사에서 씨름을 했기 때문에 결코 경험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며 독려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아내 설난영씨와 사랑스러운 외동딸 동주씨, 세 사람이 20년 넘게 살아온 부천 자택에서 김문수 의원 가족을 만났다.
“경기도는 베이징과 도쿄와 맞설 수 있는 우리나라 경쟁력이죠”

소박해 보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에는 대형 벽결이 TV도 고풍스러운 가구도 없었다. 대신 소파와 테이블 밑에는 국내에서 간행되는 온갖 신문과 잡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정리되어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김 의원과 마주 앉은 뒤 경기도지사 출마 이유를 들어봤다.
“경기도지사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수도이전 문제지요. 정부는 수도이전 위헌 판결 이후에도 수도를 분할해서 지방으로 옮기려 하고 있어요. 경기 지역은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 일본의 도쿄와 맞설 수 있는 대한민국의 경쟁력인데, 정부가 관공서와 공장은 지방으로 옮기려고 하면서 정작 규제를 풀지 않아 성장이 더뎌지고 있어요. 대한민국 중심부인 경기도에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앞으로 제가 할 일이죠.”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90년대만 해도 많은 정치인이 자신의 집에서 식객을 맞았다. 지금 김문수 의원이 살고 있는 20평 남짓한 아파트에도 한때 스무 명이 넘는 식객들로 북적였다. 그때마다 집에 있는 솥으로 밥을 하는 게 모자라 옆집 솥까지 빌려 정신없이 밥을 하고 손님을 받던 부인 설난영씨는 남편의 경기도지사 출마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남편은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한계를 느낀 것 같아요. 물론 행정 경험이 없기는 하지만 도정은 단순히 사기업과 달리 공적인 역할이잖아요. 공직자로서 기본적인 국가관과 봉사관 그리고 청렴한 정신을 갖고 있어 잘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요. 또 국회의원으로서 10년 넘게 정부기관과 국정감사에서 씨름을 했기 때문에 결코 경험이 적다고 말할 수도 없구요.”
“아내는 사치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김문수 의원과 설난영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설난영씨는 구로공단 세진전자 노조분회장과 금속노조 남서울 지역지부 여성부장을 맡고 있었다. 노동운동 동지로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연애감정을 피했다. 그러다 제5공화국 초기에 김문수 의원이 계엄당국에 쫓기고 있을 때 그녀의 자취방에 피신을 하게 되면서 가까워졌다. “부인의 어떤 모습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체구가 작지만 꿋꿋한 모습이 앞으로 험한 길을 함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당시 저는 아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정식으로 청혼하기 전까지는 일부러 무관심한 척했었어요. 계엄당국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자취방으로 피신한 게 사실 딴 뜻도 조금은 있었어요.(웃음) ”
막상 김문수 의원이 프러포즈를 했을 때 설난영씨는 청혼을 거절했다. 당시 설난영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결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난영씨가 청혼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그때까지도 김문수 의원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정식으로 청혼을 하더라구요. 그전까지 ‘친절하고 성품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터라 거절했죠. 그리고 당시 전 ‘김문수’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고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이 워낙 강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결혼식은 두 사람의 이력만큼이나 독특했다. 하객들에게 전해지는 청첩장도 없었으며 화려한 신부의 드레스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결혼식장 앞에는 관광버스가 아닌 전경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문수 의원은 “전경들은 우리가 결혼식을 가장하고 시위를 벌이려는 줄 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결혼식에 온 하객들 대부분이 힘든 노동자들이었어요. 현실적으로 화려하게 결혼식을 치를 여유도 없었지만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검소하고 조용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화려한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입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저도 한복을 입으면 입겠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저는 양복을 입고 아내는 웨딩드레스 대신 원피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죠.”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여자에게 웨딩드레스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설난영씨에게 “드레스를 입지 못한 게 아쉽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전혀”라고 잘라 말했다.
“저는 드러나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마음이잖아요. 웨딩드레스를 못 입어서 남는 아쉬움은 없어요. 노동운동을 할 때 몸에 배서 그런지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안 좋아해요. 그렇다고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여성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물론 과거 노동운동을 할 때는 화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는 여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잖아요. 오히려 지금은 여성으로서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장점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가족들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너무나 합리적인 김문수 의원이지만 결혼 초기에는 다분히 유교적인 사고로 ‘집에서 아내는 남편보다 지위가 낮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신혼시절에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결혼 초기에 누구나 그렇듯 서로의 주장을 많이 내세운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제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게 많았어요. 하지만 시간은 지나면서 기다릴 줄도 알게 되고 상대방에게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기술도 생기더라구요.”
김문수 의원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운 것에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참아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설난영씨는 신혼 초 다툼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동주 덕에 험한 일 한번 안 당하고 노동신문 배포 했어요”
김문수 의원의 집, 식탁이나 냉장고 응접실 곳곳에는 외동딸 동주씨의 어린 시절 사진이 꽂혀 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주씨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스물다섯 살 대학생이다. 지금은 성인이 됐지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딸이 불편하지는 않았을까?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정치인의 딸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와 같은 주문이 없어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다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선배나 교수님들이 아버지가 이런 일(정책) 하시는 것 등을 물어보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무남독녀 동주씨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것은 노동운동가 부모를 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이하게도 동주씨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노동운동에 참여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설난영씨는 어린 동주를 데리고 한때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기도 했다고.
“동주가 한 다섯 살 때쯤 구로동 일대는 사복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어요. 갑자기 거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그 당시 제가 맡은 일 중에 하나가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는 건데, 너무 감시가 심해서 한 손에는 신문을 담은 어린이용 운동화 주머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어린 동주 손을 잡고 노동신문을 배포했어요. 동주 덕분에 험한 일 한번 안 당하고 무사히 신문을 배포할 수 있었어요.(웃음)”
동주씨는 열혈 노동운동가 부모님을 둔 덕에 노동신문 배포 외에도 많은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어린 시절 동주씨는 엄마와 함께 시위 현장에 자주 따라다녔는데, 그때 엄마가 부르던 민중가요를 곧잘 따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 어머니를 동주와 함께 만났는데, 그분이 동주를 알아보시고 ‘너 참 노래 잘했는데’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더라구요. 당시 마땅히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었고, 동주도 곧잘 민가를 잘 따라 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아서 시위할 때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시위 현장 곳곳에서 마스코트처럼 앙증맞게 민가를 부르던 동주씨는 어느 순간부터 노래만 하라고 하면 울어버렸다. 설난영씨는 농담처럼 “어렸을 때 어떤 충격을 받아서 노래를 안 부르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동주씨는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안 부르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워서 안 부르는 것”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설난영씨는 그런 딸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다른 아이들처럼 많이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넌지시 했다.
“동주는 어렸을 때 탁아소에 맡겨 길렀어요. 그 시절 탁아소는 지금 같은 놀이방 시설도 아니고 돌봐주는 사람 역시 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동주가 성격이 원만하고 사회성도 좋아서 다행이지만 어린 아이를 어미 품에서 키우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리네요.”

“아직 대학생이지만 성인이다 보니 집에 늦게 들어올 때가 있잖아요. 그럼 저는 걱정이 되서 남편에게 ‘들어오면 야단 좀 치라’고 하는데, 돌아오는 말은 ‘자기 알아서 하겠지’가 전부예요. 악역은 항상 제 담당이고 남편은 항상 좋은 역할만 맡고 있어서 그때만큼은 그렇게 얄미울 때가 없어요.”
동주씨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도 김문수 의원은 특별한 말이 없었다. 반면 설난영씨는 동주씨가 선진국의 사회복지를 잘 배워서 학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동주씨는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모녀가 의견을 나누는 동안 김문수 의원에게 “왜 동주씨 동생을 갖지 않았냐?”고 물었다.
“70, 80년대 노동운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어요. 대부분 결혼도 안 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정관수술을 하는 노동운동가 가정이 많았어요. 그에 비해 우리는 서점도 운영하고 아이까지 있다보니까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동주 동생은 포기했어요.”
누가 ‘대접’해주지 않아도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일꾼
김문수 의원의 아버지는 가족과 개인적인 영위보다는 문중 제사나 비석 세우기를 더 가치 있게 여기던 분이셨다. 문중의 대부이던 그의 아버지는 월급의 대부분을 집안 살림보다 손님 접대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친척의 빚 보증을 서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은 판잣집과 초가집을 전전해야 했다. 어지간해서 기가 죽거나 주눅이 들지 않던 어린 김문수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고.
“제가 살던 판잣집과 초가집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었어요. 어린 시절 판잣집에 대한 열등감은 성인이 되서도 한동안 계속 됐죠. 하지만 가난 때문에 스스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제가 느끼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할 수 있는 일은 데모와 위장취업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스무해 넘게 먹물만 먹고 살아와서 단순 육체노동은 어린 꼬마 여자아이보다 경쟁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돌파구를 찾은 게 자격증이었죠.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 대부분 그때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취득한 거예요.”
2년 동안 무려 7개의 자격증을 취득한 김문수 의원은 이후 한일공업주식회사에서 보일러 조수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노조에 가입하고 첫 감옥 생활을 경험했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기고 구속과 출감을 반복하던 김문수 의원은 일기 쓰기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에게 “여전히 사진 찍는 것이 어색하고 싫냐?”고 묻자 그는 “즐겁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은 “밝게 웃는 사진이 별로 없다”며 핀잔을 주고 딸은 웃는 모습을 직접 해 보이기도 했다.
3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국회의원 김문수 가족은 말 그대로 ‘옆집’ 아저씨, 아줌마, 동생으로 변해 있었다. 그와 함께 30년 가까이 목숨을 걸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열혈 우파 정치인의 한사람이 된. 그래서 기억 한편으로 밀어 둔 한 정치인도 다시 시대에 맞는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몸담던 ‘과거’나 지금 몸담고 있는 ‘현재’ 어느 곳에서도 ‘대접’해주지 않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김문수 의원.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경기도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이주석·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