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 어머니상’ 수상하는 김인희 단장의 어머니 이옥순 여사

‘장한 어머니상’ 수상하는 김인희 단장의 어머니 이옥순 여사

“우아한 지젤 뒤에는 노점상을 하며 뒷바라지해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노점에서 튀김을 팔았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발레리나 딸이 토슈즈를 신고 빙그르르 돌면 그것에 세상 근심이 날아갔다. 어느덧 딸은 프로 발레단을 이끄는 단장이 되었지만 어머니에겐 여전히 안쓰러운 막내딸이다.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의 최고 후원인이자 친구이며 조언자인 어머니, 이옥순 여사는 올해 문화관광부에서 시상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는다.

30년 전 생생한 기억,
“고무 대야를 이고 543번 버스에 오르던 어머니…”
김인희 단장(43)의 이력은 화려하다. 고등학교 때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후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갔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도 활약했다. 무용을 하는 이들이 꿈꾸는 ‘지젤’에서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등 유명 작품의 모든 주역을 도맡아 하며 프리마 발레리나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는 프로 무용단인 서울발레시어터(SBT)를 이끌고 있는 단장이다. 이렇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녀의 춤을 보며 ‘부잣집 공주님의 고급스런 취미생활’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뒤에는 노점상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온 어머니 이옥순(73) 여사가 있었다. 그녀의 꿈꾸는 듯한 우아한 동작들은 치열하게 살아온 어머니의 피와 땀의 결실이었다.

김 단장은 열한 살 때 부채춤을 추던 친구의 모습에 반해 학원에 따라간 것을 계기로 무용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춘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어머니는 반대했다. 노점상을 하며 5남매를 키우는 것도 벅찬데 무용이라니, 사치 중 사치였다.

“그때 무용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걸 누가 알려줬더라면 안 했지요.(웃음) 어린 마음에 춤이 얼마나 멋있던지. 기름때 묻은 앞치마를 두른 엄마를 그대로 끌고 무용학원에 갔어요. 어머니를 보신 선생님께서 저희 집 사정을 짐작하고 편의를 많이 봐주셨죠.”

어머니는 무용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딸을 보며 살림을 쪼개서라도 딸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김 단장은 춤이라는 날개를 달게 됐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힘들지 않았다. 훗날 그녀는 한국무용으로 선화예중에 입학했다.

“발레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늦깎이었죠.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온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 밤 12시까지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뼈에 무리가 생겨 무릎이나 발이 많이 아팠어요.”

“아프면 발레를 하지 말라고 말렸었지. 그랬더니 다른 말은 다 해도 좋으니까 제발 발레 그만두라는 얘기만 하지 말라고 하더라구. 지금까지도 무슨 일을 하면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 하는 애야. 그런 성격은 날 닮았나 봐.(웃음)”

그녀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 아버지는 외로움을 달래려 술에 의지했고 생업은 거의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억척같이 일했다. 먹는 장사를 시작한 것도 식구들 굶길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늘 새벽에 나갔다 자정이 돼서야 돌아왔던 어머니. 김인희의 기억 속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아현동에서 떡을 받아다 장사를 하셨어요. 한번은 어머니를 따라간 적이 있어요. 543번 버스. 번호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물건을 갖고 오는 길에 고무 대야에 인절미, 계피떡을 가득 싣고 차에 올랐어요. 그랬더니 기사 아저씨가 인상을 쓰시더군요. 어머니는 기사 아저씨 눈치를 보며 떡을 담은 대야가 넘어지지 않을까 앉지도 못하고 대야를 붙잡고 서서 가셨죠.”

이 사건은 김 단장에게 큰 자극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슬럼프는 그녀에게 배부른 소리였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열심히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공연을 위해 성남 아트센터를 방문했다. 이곳 역시 그녀와 어머니에게 의미 있는 장소다. 성남이 재개발로 공사가 한창일 때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혼자 떨어져 이곳에서 함바집을 했다.

“저희를 서울로 데러오기 위해 어머니 혼자 여기서 먹고 자며 일을 하셨어요. 가끔 가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다 봤죠. 수도시설도 없어서 물지게를 지고 오르락내리락하셨어요.”

지금 그곳은 너무나 쾌적한, 살기 좋은 동네로 변했다. 어머니가 고생했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제는 어머니의 성공한 딸이 그곳에 와서 공연을 한다. 그들에겐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부잣집 발레 친구들,
“그래도 전혀 부럽지 않았어요”
지금도 발레를 가르치려면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물며 김인희 단장이 무용을 하던 배고픈 70년대는 언급해 무엇하랴. 당시 그녀와 함께 발레를 배우던 친구들 중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도 그들이 부럽거나 자신의 집이 부끄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8명이 한반이었는데 아주 잘사는 친구들이 4명 정도 있었어요. 나머지 3명도 저희 집보다는 잘살았어요. 그러나 기죽은 적은 없어요. 오히려 친구들이 저희 집에 제일 많이 놀러왔어요. 분식점을 했거든요.”

이옥순 여사도 고개를 끄덕인다. 어릴 때 김 단장은 친구들이 유독 많이 따랐다고 한다. 그녀는 특유의 통솔력이 있어 학교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많이 했단다.

“무척 더운 여름 운동회 날이었어요. 어머니가 저 멀리서 노란 양동이 두개를 들고 낑낑거리며 오시는 거예요. 직접 수박화채를 만들어 학교에 갖고 오신 거죠. 제 친구들이 지금도 만나면 그날 먹었던 수박화채 얘기를 할 정도예요.”

“그때 돈이 넉넉했으면 돈으로 갖다 줬겠지만 그럴 여력은 없었어. 그래서 수박 두 통을 잘라서 얼음을 꽉꽉 채워 인희 학교로 갔지. 무거운 것도 몰랐어. 그렇게 신이 나더라구.”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딸에게 해줬다. 현재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발레단에서 파티나 행사가 있으면 부침개나 간식거리를 챙겨준다. 공연 후 의상 세탁 역시 11년째 어머니가 도맡아 하고 있다. 이제 좀 쉬어도 되련만 그럴 때마다 ‘일하던 사람은 계속 해야 돼. 안 하면 그게 죽는 거야’ 하고 고집을 부린다.

“발레를 하겠다고 할 때는 속으로 뿌듯하면서도 걱정이 됐어. 끝까지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중단하면 어쩌나 하구. 내가 해준 게 뭐 있나. 지금까지 자기 혼자 다 해온걸.”

어머니는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딸이 88년도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심청’ 주역을 맡았을 때라고 꼽았다.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받으며 무대에 선 딸을 보았던 그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힘도 안 들고 그렇게 좋았어. 다만 서운한 것은 좀더 무용을 했어야 하는데 발레단 창단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잖아. 우리 딸이 무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잘 알지.”

김인희 단장은 유니버설 소속 시절 재미교포 출신 제임스 전(47)을 만나 결혼한 뒤 안무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는 그를 도와 민간 발레단을 창단했다. 이후 그녀는 무대에서 내려와 마케팅을 도맡아 발레단을 꾸려왔다.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5천원짜리 발레 공연도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프로발레단은 유니버설, 국립, 광주시립무용단 그리고 그녀와 남편 제임스 전이 이끄는 서울발레시어터 네 곳뿐이다. 게다가 그녀가 이끄는 서울발레시어터는 국내 첫 민간 발레단이다. 민간단체인 만큼 공연 순수 이익으로 발레단을 꾸려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냉정히 말해 발레 공연이 대중화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겁없이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창단 10주년을 넘겼기에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지만 힘든 시간이 많았다.

“10년 넘게 묵묵히 일한 것이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관련 정부기관이나 후원단체에 기금을 신청하면 많이들 도움을 주세요. 문화 정책도 점점 긍정적으로 바뀔 거란 용기도 주시구요. 이제 2~3년만 더 고생하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거라 믿어요.”

특히 서울발레시어터는 발레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각종 무료 공연은 물론 정기적으로 일반인들의 발레 체험교실도 연다. 오는 5월 4일에도 강동구청 구민회관에서 체험공연 일정이 잡혀 있다.

“우리나라는 발레를 전공한 훌륭한 졸업생들이 많은데 수용할 발레단이 부족해요. 물론 클래식만을 고집하는 큰 혈관도 필요하지만 개성을 살린 작품을 할 수 있는 실핏줄 같은 발레단도 필요하죠. 서울발레시어터가 성공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재능이 있지만 뒷받침할 자금이 없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키워줘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어머니가 딸에게 바라는 점은 발레단이 안정적인 시스템이 되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더 늦기 전에 아기를 낳길 바라는 것이다.

“애기 하나만 낳아. 내가 잘 키워줄게.”
“엄마, 그 얘기는 더 이상 안 하기로 했잖아.”

그녀에게는 열세 살 먹은 자식이 있다. 바로 서울발레시어터이다. 김인희 단장은 발레단을 자식처럼 정성껏 키우고 있다. 진짜 아이를 낳는다면 발레단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키우던 아이를 버리는 일과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너무 잔인하고 비참한 일이라 개인 사정은 일단 접고 앞으로도 발레단을 열심히 키울 계획이라고 한다. 올해만 해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지역별로 여섯 곳에서 잡혀 있다.

가장 큰 프로젝트는 모차르트 탄생 1백주년 기념으로 한국 최초 ‘피가로의 결혼’을 발레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안무가인 남편의 작품이다. 이미 9월 7~8일에 충무 아트홀에서 공연이 잡혀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심은 아직 멀었다. ‘외국의 경우 창단한 지 10년이 넘은 단체들은 1년에 2백 일은 공연을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뛰던 솜씨를 발휘해 보다 많은 공연을 열기 위해 더욱 열심히 뛸 것이다. 백그라운드로 든든한 후원자인 어머니를 두고 말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박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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