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 ‘소통령’된 서울시장 당선자 오세훈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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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시대가 열렸다. 서울시장은 공무원 4만7천여 명, 투자·출연기관 2만 명을 포함해 7만 명 가까운 사람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 관련 사업 종사자까지 합하면 10만 명이 넘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쥔 가히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울공화국’ 수장이 펼칠 4년의 서울시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과연 성공적인 시장을 거쳐 더 큰 뜻을 펼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오세훈 백과’ 공개.

판사나 검사 같은 재조 경험도 없는 변호사 출신에 초선 국회의원이 사실상 경력의 전부인 오세훈 시장. 그는 달동네의 가난한 집 장남으로, 대학 편입생으로 10~20대 시절을 보냈고 사법고시 ‘한 방’을 통해 훌륭한 가문과 결합하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그는 행운아이기도 하지만 여자에게 꼼짝 못하는‘ 쩨쩨한’ 남자라는 평가도 따른다. 부드럽다는 평가와 유약하다는 평가는 사실 같은 말이다. 정치권 진출도 시장 출마도, 주변의 권유로 결정할 정도로 유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좀더 내밀하게 오세훈 시장을 파고들면 의외의 강인함도 발견된다. 주변 관리도 철저히 하고 내면의 실력도 갖췄다. 특히 서울시장 오세훈, 인간 오세훈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살아온 삶과, 특히 그의 인맥을 완전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장’ 그 걱정과 기대 사이
“세상은 결과만 알고 싶어한다. 남에게 산고(産苦)를 말하지 말고 거기서 얻은 아기만 보여줘라.” 젊고 잘생기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고 재미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솜씨를 가진 ‘새내기 서울시장’. 민선시장 중 최연소인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45)는 7월 1일 ‘당선자’라는 꼬리를 떼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구 1천 만 명의 수도 서울을 이끌 오세훈 당선자는 대통령에 버금가는 실질적 ‘소통령’으로서 수도 서울의 행정 수장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뛰어난 서울시장이 되기 위해선 ‘감성과 이미지’를 탈색하고 진정한 실력으로 ‘행정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오 당선자는 “4만5천 명의 서울시 공무원을 뒤에서 서서히 몰아가겠다”며 ‘마차형 리더십’이란 해법을 내놓았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서울시장 오세훈’을 ‘시대의 선택’으로 본다. 낡은 시대를 새로운 정신으로 바꾼다는 의미에서‘혁명가’라는 뜻을 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서울시장 오세훈’을 ‘시대가 낳은 행운아’로 여긴다. 오 당선자는 과연 서울시장 자리를 행운으로 얻은 것일까, 아니면 서울시장이란 의자를 행운에게 내주고 맞아들인 것일까.

사람들은 그에게 주어진 ‘행운’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서울시장 출마를 강권하다시피 했던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은 “강금실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부상이 오 당선자에겐 천우신조였다”면서 “행운으로만 치부한다면 그의 당선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마더 라이크 리더십(어머니형 리더십)’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리더십’”이라면서 “이는 환경이나 여성, 경제적 약자 등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커지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올 수 있는 리더십의 유형”이라고 말했다.

사실 오 당선자의 능력, 특히 행정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사회 기여에 대한 그의 철학과 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정치개혁을 위한 ‘오세훈법’ 개정과 총선 불출마 선언, 당 혁신을 위한 5·6공 이너서클의 퇴진 요구, 그리고 환경운동 등 역시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 없이는 해낼 수 없었던 일이다.

그는 선거가 끝난 뒤인 6월 1일 유세 취재를 했던 기자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오 당선자는 “더치페이를 하자”고 제안했고 초대받은 기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 당선자는 “어렵게 당선됐는데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취소되면 되겠느냐”는 농담으로 상황을 넘겼다. 도덕적 기준만 놓고 보면 자기 소신이 매우 뚜렷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기자들은 그를 ‘삼종’이라고 부른다. 그가 철인 3종경기를 완주한 것을 빗댄 서울시장 후보 홍보물 ‘카피’를 원용한 것이다. 카피 내용은 ‘순종’ ‘독종’ ‘별종’이다. 국민과 국민의 뜻에 ‘순종’하고 자기관리와 정책 일관성에는 ‘독종’처럼 굴면서 국민에게 새로운 서비스와 깨끗한 이미지를 주는 ‘별종’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오 당선자의 브랜드가 ‘정치개혁가’와 ‘환경운동가(변호사)’로 압축될 정도로 그의 경력과 경험은 ‘단순’하다. 그의 의사결정 과정이 매우 ‘의존형’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시 행정의 핵심은 개발과 환경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고 균형과 조화가 요구되는 정책이다. 오 당선자는 ‘환경’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 입문 당시 “나의 고향은 환경이다. 환경에서 나의 정치적 정체성을 찾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오 당선자는 특히 녹색 사인펜을 이용하길 좋아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뼛속까지 ‘녹색’이 파묻혀 있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한다. 환경주의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정은 환경과 자주 충돌한다. 열악한 서울시민의 주거 환경을 바꾸는 것, 낙후된 도심을 재개발하고 편의시설을 개선하는 것은 곧 개발로 나타나고 이것은 보존이나 환경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 그의 환경 우위 정책이 행정과 얼마나 조화를 이룰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시장으로서의 그의 능력과 역량은 곧 드러나고 평가받게 돼 있다. 행정 행위는 분명한 실적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 평가는 그가 과연 시대의 운을 잘 타고 넘은 행운아였는지, 아니면 진정한 노력과 실력에 바탕을 둔 것인지도 함께 입증할 것이다.

오세훈 처갓집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오세훈 당선자의 부인 송현옥씨(45·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는 오 당선자를 고2 때 처음 만났다. 현옥씨는 조각가 송영수 전 서울대 교수의 딸이다. 현옥씨의 오빠인 상호씨(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몸이 아파 학교를 1년 쉰 뒤 오 후보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세 사람은 함께 과외를 하게 됐다. 난생 처음 과외를 하게 된 오 후보는 10분이라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과외가 새삼스럽지 않던 현옥씨는 ‘농땡이’였다. 과외는 깨졌다.

두 사람은 고3 때 입시학원에서 다시 만났다. 오 후보가 길에서 자판기 땅콩을 사주며 “너 고등학생의 몇 %가 담배 피우는 줄 아니?”라며 실없이 묻는 모습에 1년 전 ‘꽁생원’과는 다른 면모를 봤다고 현옥씨는 회상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고려대 문과대에 응시했지만 오 후보만 낙방했다. 후기인 한국외대에 입학했던 오 후보는 2학년 때 고려대 법대에 편입, 영문과에 다니던 현옥씨와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 됐다.

당시 고려대 도서관은 늘 자리가 부족했다. 아침 7시에 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오 당선자가 송씨의 집으로 전화해 그녀를 깨우곤 했다. 송씨의 어머니 사공정숙씨(71)는 반듯하고 성실한 송씨의 남자친구에게 늘 감탄했다. “결혼을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런 것 같지 않다. 모친 사공정숙씨는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친구처럼 지내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오 후보가 사법시험에 붙은 직후인 1985년 결혼했다.

“친구처럼 지내라”는 조언을 했지만 송씨의 모친은 일찍부터 오 당선자를 사윗감으로 염두에 뒀다. 송씨의 오빠 송상호씨의 친구였던 오 당선자는 상호씨가 수술 때문에 오래 결석했을 때 매일 수업 내용을 전해주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갔다. 고교 시절부터 유달리 성실하고 심성이 고왔던 오 당선자를 그는 깊은 관심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오 당선자가 대학 때 다른 여학생과 미팅도 안 했다”고 ‘증언’한다. 결국 24세 때 동기생 중 가장 빨리 결혼했다. 오 후보 부부는 ‘행복한 가정재단’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친구들은 “공처가 분위기가 좀 있다”고 하지만 부인은 “그의 내면이 얼마나 강철 같은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일축한다.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포기할 때도 그는 부인과 가족에게 별다른 상의 없이 결단을 내렸다.

송현옥씨 일가는 모두 고대 출신이다. 어머니 사공정숙씨는 1968년부터 고려대 수학과 교수를 지냈다. 1975년 고려대 사범대에 수학교육과가 생길 때 그 산파 역할을 맡았다. 1991년 사범대학장, 2000년에 교육대학원장을 지내고 2003년 정년 퇴임했다.

송 교수의 부친 송영수씨(작고)는 한국 철조 추상 조각의 제1세대로 알려진 조각가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서울대 미대 조형과에 입학, 한국 현대 조각의 선구 김종영에게 조각을 배웠다. 송씨는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 철조를 개척한 조각가로 평가되는데, 테라코타와 목조, 석조에도 관심이 깊었다. 추상 조각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던 시절, 그는 이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196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국토 건설 드라이브로 수많은 동상과 조형물들이 제작됐다.

이 시기 조각가 송영수는 국가가 발주한 추상 조형물의 거의 전부를 독차지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낸 송씨는 1968년 서울대 전임교수가 됐으나 2년 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경부고속도로 기념 조형물 구상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그는 죽음을 맞았다. 대표 조형물로는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 ‘이준 열사 동상’ ‘육군사관학교 화랑천 쌍사자’ 등이 있다.

부인 사공씨는 남편을 ‘정열의 인간’으로 기억한다. 짧았던 40평생을 조각을 위해 송두리째 바친 그를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고 그 소재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몸과 혼을 바친 사람”으로 평가한다. 집안에 두 개의 커다란 산소통을 설치하고 동판의 용접을 손수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추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상의 기초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각관이었다.

1백10권에 달하는 스케치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미술계에서는 그가 남긴 스케치 자체가 ‘위대한 미술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심장마비로 숨진 당일 새벽에도 송씨는 부인 사공씨를 깨웠다. “새롭고도 놀라운 구상이 떠올랐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송씨는 “그렇게 무리해서 일하다가는 큰일을 내겠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공씨에게는 그 새벽의 일이 큰 한으로 남아 있다.

송현옥씨의 오빠 송상호씨(47)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경영학계의 큰 별 김인수 교수의 직계 제자로 유학을 하지 않은 ‘토종 경영학자’다. 김인수 교수는 개강 전에 과제를 주고 첫날부터 학생들에게 혹독한 연구와 학습을 강요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김 교수 밑에서 기업 조직론을 공부했다. 최근 송 교수는 벤처기업의 조직과 인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벤처 창업자의 리더십, 구성원의 역량, 조직의 혁신이 벤처 성공의 관건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뒷바라지할 자신이 없어’ 경영학 공부를 권했다는 것이 모친의 말이다.

송현옥씨의 남동생 송상기씨(40) 역시 고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다. 여동생 송현영씨(43) 역시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해 어머니와 4명의 자녀, 사위 오세훈 당선자까지 모두 고대 출신으로 이뤄진 독특한 가족 구성원이다. 송현영씨의 남편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다. 오 당선자의 장모 사공씨는 사위의 더 큰 장래에 대해 “성실하고 착한 사위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시장만으로도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오세훈을 키운 대일고 고대법대 학맥의 힘!
“사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를 영입한 것도 대일고 선배인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 아닙니까. 대일고에서 드러내놓고 선거운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선거기간에 각종 행사장에서 오 당선자에게 가장 열성적으로 호응한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대부분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들이더라구요.”(대일고 총동창회 관계자)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학맥은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 당선자에게 음으로 양으로 든든한 배경이 됐다. 오 당선자는 서울 미동초등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쳐 대일고와 고대 법대를 졸업했다. 먼저 대일고 출신 인맥들의 적극적 지원에 주목할 만하다. 1973년 처음으로 신입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일고는 당시 신흥 명문고 가운데 한 곳으로 꼽혔다. 오 당선자는 대일고 4기 졸업생이다. 한 해 선배가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이고 두 해 선배가 같은 당의 한선교 의원이다. 박 의원은 오 당선자에게는 고려대 한 해 선배이기도 하다.

박 의원은 오 당선자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 당선자의 동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대일고 동문들 20~30명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장 등 선거기간 내내 주요 행사장을 찾아다니면서 조직이 없던 오 당선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오 당선자의 동기인 황오성 일등산업 대표(4기 동창회장)는 “오 당선자가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동문이 큰 선거에 나선 마당이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밝혔다. 대일고 동기들이 기억하는 고교 시절의 오 당선자는 앞장서서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얌전하고 조용한 모범생에 가까웠다. 성적도 우수한 편이어서 문과생 1백80여 명 가운데 10~20등 사이를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대다수가 그렇듯 오 당선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학업 수준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당시 대일고는 모두 12개 반이 문과 3반과 이과 9반으로 나뉘었는데 수업을 할 때면 우열반으로 반편성을 하는 바람에 교제의 범위가 제한적이기도 했다.

오 당선자의 대일고 출신 친구들은 지금 학계와 언론계, 법조계에 분포돼 있다. 법조계에 진출한 친구들 중 이건웅 변호사(법무법인 바른)와 오규섭 변호사(법무법인 청풍)가 가까웠다. 이 변호사는 선거 기간 오 당선자의 홈페이지에 ‘내가 본 오세훈 후보’라는 글을 써서 응원하기도 했다.

오 당선자의 친구들은 언론계에도 많이 진출해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월간 ‘포브스코리아’의 이용택 편집위원과 가까웠다. 이거산 ‘주간조선’ 차장과 현재 ‘스포츠서울’ 경영기획실에 근무하고 있는 이성춘 실장도 오 당선자의 ‘친구’들로 지목된다.

학계에 진출한 동기들로는 송상호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정우봉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가 있다. 동기들은 오 당선자가 고교 시절부터 가장 가깝게 지낸 단짝으로 송상호 교수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 당선자의 동기인 송우영 화인텍정보시스템 대표는 “우리가 고3이 되던 1978년 1학기가 시작되며 오 당선자가 새로운 짝을 맞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송상호였다”면서 “상호의 한 살 여동생은 지금 오 당선자의 부인 송현옥씨다”라고 말했다. 원래 송 교수는 오 당선자보다는 한 학년 위였지만 몸이 좋지 않아 학교를 한 해 쉰 뒤 3학년으로 복학했다. 오 당선자는 수술 후유증으로 학교를 자주 결석하던 송 교수의 숙제를 위해 그 집을 자주 찾았다. 여기서 그는 송 교수의 여동생이자 자신과 동갑내기였던 현재의 부인 송현옥씨와 인연을 맺었다. 오 당선자는 송상호 교수와 친구로 만나 처남매부지간이 된 셈인데 공교로운 것은 이 인연이 ‘고려대 학맥’으로도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송상호 교수의 집을 자주 왕래하며 함께 공부했던 세 사람은 1979년 졸업과 동시에 잠시 떨어지게 됐다. 송상호 교수는 고려대 경영학과, 송현옥씨는 고려대 영문과로 진학했지만 고려대 영문과에 낙방한 오 당선자는 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오 당선자는 이듬해 기어이 고려대 법대로 편입하는 ‘집념’을 보였다.

오 당선자의 친구인 오규섭 변호사는 “당시 재수를 했던 내가 1980년 고려대 법대 80학번으로 입학하고 보니 오 당선자가 2학년으로 편입한 상태였다”면서 “송상호 교수의 모친이자 오 당선자의 장모인 사공정숙 교수가 당시 고려대 수학과에 재직 중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완전히 ‘고대 가족’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1980년 ‘편입생’ 오세훈 당선자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는 같은 법대 79학번이자 과대표였던 홍승기 변호사(법무법인 세진종합)였다. 고려대 법대 친구 사이에서 오 당선자와 홍 변호사는 심심찮게 ‘친구이자 라이벌’로 거론된다. 두 사람 모두 고려대 재학 시절 일명 ‘CC(캠퍼스 커플)’로 지내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변호사 재직 시절부터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스타’로 떠오른 점도 자주 비교 대상이 된다.

홍 변호사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캠퍼스 커플이어서 놀러 다닐 때 자주 어울렸고 최근까지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면서 “대학 시절 친하기는 했지만 오 당선자는 주로 도서관에서 지냈고 나는 밖으로 많이 놀러 다녔던 것 같다”며 웃었다. 한 법대 동기는 오 당선자가 국회의원 시절 홍 변호사에게 강남구청장 공천을 주겠다며 정치권 입문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홍 변호사처럼 오 당선자의 고대 법대 학맥은 대부분 법조계에 퍼져 있다. 특히 고대 법대 79학번의 경우 절반 이상이 사시에 합격하면서 진로가 어느 정도 결정된 측면도 작용했다. 법대 학맥 가운데 오 당선자와 직접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박철민 변호사(법무법인 휴먼)와 이호철 충주지청장, 윤관 전 대법원장의 아들인 윤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이다. 법조계 이외의 분야에 진출한 동기로는 한희원 국가인권위원회 국장과 구희천 삼성 SDS 상무,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박상신씨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특히 오 당선자는 고려대 재학 시절 스승인 정동윤 법대 교수의 직계 제자였는데 지금도 정 교수를 중심으로 친구들과 이따금 모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 / 김경은 기자(뉴스메이커)·최성진 기자(뉴스메이커)·한기홍(뉴스메이커 객원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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