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7년간 나홀로 소송을 벌여 승소한 공무원이 있어 화제다. 그는 1백억원대 개발 부담금 소송에서 대법원까지 간 치열한 공방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승소를 이끌어냈다. 소송 후 그에게는 격려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그가 겪은 지루하고 힘겹던 7년간의 소송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1백억원대 개발부담금 소송, 누구도 승소 예상 못해
그는 ‘깐깐한’ 아산시청 지적과 공무원이다. 예전에는 쉽게 넘어갈 일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일을 맡기 시작한 뒤부터 그에게는 반갑지 않은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이 줄을 이었다. 예전 같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로 쉽게 해결을 볼 것도, 그는 원리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일처리로 대부분의 소송과 심판에서 승소했다. 그동안 거둬들이지 못하던 세금이 시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공무원의 노력으로 매년 60억~70억원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한 공무원의 힘은 이렇게 조직과 지역의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충남 아산시청 지적과 7급 공무원 고흥철(48)씨.
그는 얼마 전 공무원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대기업과 1백억원대 세금 문제로 지루하고 어려운 7년간의 소송에서 승소를 했기 때문이다.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변호사의 도움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낸 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지역 주민의 전화를 받는다. “잘했다” “수고했다” 등 격려 전화가 아산시청 지적과에 쏟아졌다. 어느 누구도 일반 공무원이 대기업과의 소송에서 이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뚝심’과 ‘상식’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알리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으니까요. 소송 하나가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예상도 못했고요. 불면증도 겪어봤고,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많이 느꼈어요. 과장님이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지 않았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1998년 10월 아산시는 현대자동차가 조성하고 있는 55만 평의 지방산업단지 가운데 25만3천 평에 대해 1백2억원의 개발 부담금을 부과했다. 담당 공무원이 바로 고흥철씨다. 1995년부터 지적과에서 이 일을 맡아온 실무자이던 고흥철씨는 개발부담금 부과 이전에 건교부에 의뢰부터 했다. 의뢰 결과 적법하다는 답변을 받아 개발부담금을 부과한던 것.
현대자동차에 세금신고를 하라고 요구하자, 바로 기업의 실무자가 ‘말도 안 된다’며 그를 찾았다. 실무자가 내세운 것은 1997년 개정된 세법이었다. 개발이익환수에관한법률 제7조 제3항에 의하면 ‘산업입지와 개발에관한법률에 의한 산업단지개발사업(수도권정비계획법 제2조 제1호의 규정에 의한 수도권에 소재하는 산업단지인 경우를 제외한다)에 대하여는 개발부담금을 면제한다’는 규정이었다. 그리고 1999년 2월 10일 고흥철씨에게 40쪽이 넘는 소장과 증거물이 도착했다. 길고 긴 소송의 시작이었다.
“거기에는 ‘14일 이내 답변서 제출’이라는 한 장의 안내문이 있었죠.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죠. 소송 내용이 엄청나서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당시에는 행정소송을 접해본 동료도 드물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죠. 대전고등검찰청 공익법무관에게 전화로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까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라요.(웃음)”
항소 위한 인지대 1천6백만원 마련도 힘들어

소송 1년 6개월 만인 2000년 7월 6차례의 변론 끝에 대전지방법원으로부터 개발부담금 1백2억원의 부과처분을 취소한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기업 측 주장이 거의 받아들여진 것. 공무원으로서는 ‘골리앗’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아산시의 논리를 날카롭게 전하질 못한 것 같아요. 변론 과정에서도 판결에 영향을 미칠 만한 주장을 한 것도 없었거든요. 답변도 시청의 논리를 디테일하게 펼쳤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요? 경험도 없고 두려우니까 답변도 두루뭉술하게 나오고. 마치 기업의 계획된 일정에 따라 움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판결도 대부분 기업의 주장대로 나오게 됐죠.”
아산시에서는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다시 항소할 것인가를 일주일 내에 결정해야만 했다. 당사자인 고흥철씨는 세금부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결재권자에게 항소해야만 하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허락을 받아냈다. 검찰에게도 항소 제기에 대한 정당성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2000년 8월 항소를 결정했지만, 1천6백만원의 인지 수수료가 필요했다. 당시 시청에는 이만한 예산이 없었다. 예비비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항소 마지막 날 다행히 서류를 넣을 수 있었다.
“1심에서 패소판결이 나오면서 제 부담이 더욱 커졌죠. 동료들을 의식하게 됐고, 거물급 변호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들고. 그동안 시에서 행정소송 패소율이 높다는 비판을 받아오던 시기였기에 더욱 힘들었어요.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진 거죠.”
그는 이 소송만으로도 벅찼지만, 또 하나의 벽이 나타났다. 1996년 확정된 개별공시지가를 직권으로 정정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 만일 공시지가를 정정하지 않고 확정된 것을 인정하면 개발부담금이 없어 이 소송을 진행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고흥철씨는 또 다른 소송을 준비하면서 법률 전문가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공시지가의 결정처분이 당연무효의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려면 복잡한 법률적 판단이 필요했다. 그는 혼자서 대법원에서 구입한 판례와 사법논집 등을 살펴보면서 ‘개별공시지가의 제문제’라는 논문을 찾게 된다. 이 논문을 통해 토지특성조사의 잘못은 당연무효의 사유에 해당되고, 새로운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 그는 공시지가를 정정하는 결단을 했다.

“개별공시지가 소송을 준비하면서 ‘감’이 생겼어요. 고문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뜸 ‘이렇게 중요한 사건을 왜 변호사 선임 없이 하느냐’면서 타박을 했죠. 그런데 제가 보낸 상고이유서를 보더니 놀라더라구요. 변론 형식이나 글을 너무 잘 썼다구요.(웃음)”
개별공시지가 정정처분을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본 소송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2004년 8월 20일 사실심변론이 종결됐지만, 재판부의 분위기는 예상한 것보다 좋지 못했다. 잘못하면 1심처럼 아산시의 패소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흥철씨는 다시 한번 마음을 잡고 변론 종결 후에도 재판부에 이번 소송의 중대성을 알리는 서면을 수차례 제출했다. 쟁점이 된 부분을 수치와 그래프로 꼼꼼하게 작성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10월 8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현대자동차는 즉시 상고를 했다. 하지만 이젠 누가 봐도 아산시의 승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날’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난 5월 12일 대법원에서도 아산시의 손을 들어줬다. 7년간의 나홀로 소송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왜 혼자 소송을 했냐고 많이 물어봐요. 시청의 고문변호사님도 계시지만, 행정소송은 오히려 공무원이 내용을 더 잘 아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변호사비 3천만원도 지역 주민의 세금이구요. 그래서 나홀로 소송을 했는데, 예상보다 힘든 점이 많더라구요.(웃음)”
승소 이후…1백80만원 포상금과 승진에 대한 기대감
고흥철씨는 7년의 소송 기간 동안 편한 보직을 받아서 자리를 옮기지도 못했다. 소송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승소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법률 서적과 씨름을 해야 했고, 준비서면을 작성하기 위해 법규집을 보기 위해 출근도 남들보다 2시간이나 먼저 해야 했다. 시청으로 찾아와 닦달하는 기업체 관계자들도 상대해야 했다. 패소할 경우 생기는 아산시의 손해액을 생각하면 잠도 잘 수 없었다. 승소했다는 기쁨보다는 ‘이제야 끝났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이 더 먼저 흘러나올 정도였다. 승소 이후 현대자동차는 개발부담금과 이자 30억원까지 모두 납부해야만 했다.

이번 승소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1백80만원의 포상금과 상장, 그리고 승진에 대한 기대감이다. 행정소송에서 승소했을 경우 담당 공무원에게는 30만원의 포상금이 주어지는데, 최대 6배까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최고 금액인 1백80만원을 지난 5일 월례조회 때 받았다. 포상금은 동료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가족들과 외식을 하는데 사용했다. 1백억원의 세금을 거둬들인 대가 치고는 약한 것 같지만, 그는 좋기만 하다. 무엇보다 승진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산시청의 7급 공무원 중 최고참인데다, 이번 승소가 승진에 큰 영향을 끼칠 것 같다는 예상을 하고 있다.
그는 늦깎이 공무원이다. 서른두 살에 아산시청 공무원이 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삼성종합건설에서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잘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스물여섯 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커가면서 전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공무원 시험 준비였다. 아내는 열렬히 환영했다. 출퇴근 일정하지 않고, 출장 많은 샐러리맨보다 공무원이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서른둘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첫 부임지가 충남 아산시청 지적과였다. 경남 출생으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산에 온 것은 기회이자 어려움이었다. 공무원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결제와 격식에 얽매이는 분위기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공무원 생활하기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까 청탁이나 부탁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냥 저는 원리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면 됐으니까요. 하지만 제 모습이 지역 사회에서는 어색했을 거예요. 1995년부터 제가 개발부담금 업무를 시작했는데, 이후에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이 줄을 이었거든요. 지역 기업들에게 저는 깐깐한 공무원으로 소문 났을 거예요.(웃음)”
하지만 어느새 그는 16년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위해서 뛸 수 있다는 것이 직장 샐러리맨으로서는 맛보기 힘든 즐거움이었다. 이제는 공무원이 평생의 업처럼 느껴진다. 7년간 대기업과의 소송으로 마음과 몸이 많이 지쳤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어 칭찬의 한마디를 남기는 주민들의 격려에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역 주민을 위한 ‘깐깐한’ 공무원으로 살아갈 예정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준기(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