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재계의 혼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략적’인 혼사를 맺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결혼 당사자의 목소리가 커졌고 사돈가의 면면도 정재계의 범위를 벗어나, ‘평범한’ 집안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가친척의 축하 받으며 결혼식은 조용하게 치러
지난 5월 21일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58)의 장남 조원태 부장(30)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부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미연씨(27). 김씨의 아버지는 충북대 정보통계학과 김태호 교수이며, 조부는 3대 중앙정보부장과 8,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재춘 5.16 민족상 재단 이사장이다. 원태씨는 2004년 10월 대한항공 경영기획팀에 입사해 현재 자재부 총괄팀장을 맡고 있으며, 미국 USC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에는 경기여고 선후배 사이이자 불교 신자로 친분을 쌓아온 양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알려졌다. 조양호 회장은 전 한진그룹 회장의 아들이며 아내 이명희 여사는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딸이다.

이어 27일에는 SKC 최신원 회장이 딸을 시집보냈다. 1남 2녀 중 장녀인 유진씨(28)의 배필은 미국에서 금융 회사에 다니고 있는 구본철씨(32). 이름만으로는 언뜻 LG 가의 인맥이 아닌가 싶은데 LG 가와는 10촌이 넘는 먼 친척뻘이며, 본철씨의 고모가 GS그룹 허씨 가로 출가했다고 알려졌다. 부친 구자동씨는 중견 기업 부사장 직을 맡고 있다.
2세들 대부분이 연애결혼을 할 정도로 결혼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자란 자녀들도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유진씨는 미국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지난해 귀국해 신부수업을 받아왔다.
SK 그룹 계열의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은 평소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진 최신원 회장답게 외부 인사를 초청하지 않고, 동생 최창원 SK케미컬 부사장, 사촌지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재원 SK엔론 부회장 등 일가친척들만 자리한 가운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최신원 회장은 고 최종건 SK 창업주의 차남이다.
미국 유학 중 교제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 많아
길일로 알려진 5월 29일에는 두 쌍의 결혼식이 있었다. LG 구본무 회장의 장녀 연경씨(28)가 촉망받는 벤처 경영인 윤관씨(31)와 웨딩마치를 울렸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 시절 만나 사귀다 지난해 12월 약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은 양가 어른과 가까운 친척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LG그룹 계열이자 평소 구회장이 자주 찾는 경기도 곤지암 컨트리클럽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사흘 뒤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지인들을 초청해 피로연을 열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와 미국 워싱턴대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연경씨는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의 딸인 어머니 김영식 여사(5위)에 이어 2005년 포브스코리아가 발표한 국내 여성 주식 부호 10위를 차지한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싱글 여성이었다. 2005년 말 현재 그녀의 재산 규모는 7백88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구 회장의 맏사위가 된 윤관씨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과 심리학을 복수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경영공학 석사를 마친 뒤 현재 노키아가 최대 주주인 다국적 벤처캐피털 블루런벤처스의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다. 윤씨의 아버지 윤태수(60) 전 대영 회장은 한때 알프스리조트의 소유주였다가 경영난으로 손을 뗀 상태다.
같은 날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전 주미대사)의 장남 정도씨(29)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의 주례로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2004년 친지의 소개로 만나 2년간 교제했다. 신부는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제학과 동양학을 전공했고 작년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윤선영씨(27)로 서울대 공대 재료공학부 윤재륜 교수의 장녀다. 신랑 정도씨는 연세대를 거쳐 미국 웨슬리안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컨설팅회사인 엑센츄어 코리아에서 2년간 일하다 작년 5월부터 중앙일보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성그룹 1군 김영대 회장의 3남 김신한 이사(31)는 6월 23일 미국 유학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나 1년여 연애를 해온 중앙 에너비스 한상열 사장(51)의 장녀 조희씨와 화촉을 밝혔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두 사람은 양재동 온누리 교회에서 친인척과 친구들만 초대해 간소하게 예식을 치렀다.
김 이사는 대일외고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학부와 엠허스트대 석사과정을 마친 뒤 올 초 귀국해 대성산업가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신부 조희씨는 올 3월 대성그룹 창업주인 고 김수근 명예회장의 미망인 여귀옥 여사 상중일 때부터 이미 대성가 며느리 역할을 해왔다.
재벌가의 결혼식은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가족들만의 조촐한 잔치로 치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축의금과 화환도 사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벌 3세대의 결혼 풍속도
재벌 3세간 최초의 결혼으로는 1995년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장남 의선씨(37)와 정도원 삼표 회장의 장녀 지선씨(33) 커플을 꼽는다. 연애결혼으로 알려져 있으나, 바깥사돈끼리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각별해 부모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삼성가는 1995년 정용진 신세계 경영기획실 부사장이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고현정과 결혼을 올리며 혼맥에 연연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1998년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가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와 결혼하며 재벌 3세간 정략결혼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최근 웨딩마치를 울리는 재벌 3세대들은 ‘선배’들에 비해 자유롭게 결혼 상대를 결정한다. 도드라진 특성은 어려서부터 비슷한 수준의 집안 자제들과 어울리며 같은 서클에서 만나 결혼으로 맺어지는 사례가 많다는 것. 그중 주목받는 모임은 3대 사립초등학교로 분류되는 경기초등학교 21회 졸업생 모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재벌가의 자제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이 모임의 멤버 중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의 딸 유희씨(34)와 김석원 쌍용 회장의 아들 지용씨(34)가 3년 열애 끝에 지난 1999년 결혼식을 올렸다.
혼기를 앞둔 재벌 3, 4세의 모임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은 미국 뉴욕. 재벌가 자제들이 필수 코스로 거치는 동부 아이비리그 재학생들과 뉴욕 소재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이 사교모임을 가지며 친분을 쌓고 있다. 유학 중에 만나 결혼에 이르는 커플이 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셈이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LG그룹·대한항공·SK텔레시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