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이어가는 종갓집 며느리 5인이 밝힌 명문가 이야기

전통을 이어가는 종갓집 며느리 5인이 밝힌 명문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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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종부라는 자부심 있어 힘들지만 보람 느낍니다”

오랫동안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명문가 며느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선시대 학자, 벼슬가, 재력가 집안 등. 명문가 며느리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전통을 이어왔다. 이들의 삶을 엿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문화재고 전통 자체이다. 조상 대대로 명문가로 손꼽히며 전통을 받들고 있는 집안의 종부들이 가슴속에 묻어놓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기제사만 해도 일 년에 십여 차례. 여기다 봄, 가을로 집안에 행사가 있으면 백여 명이 넘는 손님들이 모여든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명문가 종부들에겐 세월이 빗겨간 듯하다. 요즘 세상에도 칠거지악을 운운하는 종친회 어르신들의 등살에 아들을 낳지 못하면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옆집 아낙과 수다를 떨기는커녕 언제 어디서든 말과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작은 실수에도 종친회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명문가의 대를 잇는 종갓집이라는 이름 뒤에는 며느리들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서려 있다. 정승, 판서, 유명 학자를 대대로 배출했다는 과거의 영광과 함께 늙어가는 종택(宗宅)을 보살피며 가풍을 잇는 종가집 며느리들. 정부의 지원 없이 그저 문화재로만 지정된 수백 년 된 종가를 보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종갓집 맏며느리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40여 개 명문 종갓집 맏며느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기에 며느리들은 벅찬 심정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며느리들은 정갈한 한복과 정장 차림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상기된 모습이었다. 예부터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지만 종갓집 며느리들이 모인 자리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세상 모든 것이 변했지만 아직도 가문의 명성과 품위를 따지는 명문가의 며느리들. 그들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이며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인터뷰했다.

율곡 이이 종가의 며느리 서경옥
“아들 못 낳는 바람에 종친 어르신들의 미움 많이 받았어요”

“율곡 이이 선생께서는 어디서든 세 사람 이상이 모이면 절대 귓속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벼슬 자리에 계셨을 때도 편전에 나가시면 눈을 내리깔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말을 아끼셨다고 해요.”

서경옥씨는 처음 시집와서 한동안은 새벽까지 무릎을 꿇고 시아버지께 교육을 받았다고.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집안일로 피곤한데 새벽 2시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교육을 받으려면 아주 고역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가문과 조상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게 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평생 명문가의 며느리로 힘든 삶을 살았지만 고통보다는 보람이 남습니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명문가의 며느리로 있게한 율곡 이이 선생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이율곡 선생께서는 현재의 ‘인사동’에서 생을 마감하셨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녀는 인사동을 걸을 때면 남들과 다른 감회에 빠지곤 한다고. 이런 느낌은 직접 조상을 모시는 종부들이 아니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율곡 이이 선생의 실제 종가가 있는 곳은 황해도 해주지만 6.25 때 가족들은 위패와 교지만 들고 도망치듯 피난을 왔다고 한다. 현재는 일산에 자리한 아파트 방 한켠에 사당을 만들어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 피난을 내려와 일산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이유는 황해도 종가와 1시간 거리로 가깝고 율곡의 묘지가 있는 경기도 파주와도 지척이기 때문이다.

“황해도에 가면 당시 인재를 양성하던 소현서원도 있고 율곡 선생께서 집필하신 서적 몇 백 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율곡 선생님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서원과 서적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잘 보존되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서경옥씨는 율곡 선생과 얽힌 재밌는 일화도 들려주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5천원권에 그려진 율곡의 초상화 모델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이재능씨를 모델로 그렸다는 것. 현존하는 율곡의 영정이나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직계 종손이 가장 비슷한 얼굴일 거라는 다수의 의견 때문이 반영되어 이재능씨가 모델로 나섰다는 것이다.

서경옥씨는 명문가의 맏며느리로 항상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만 종친회로부터 큰 서러움을 받은 일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슬하에 4녀를 두었다.

“제 나이가 62세인데 아직까지도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답니다.(웃음) 종친회 어르신들은 모두 저를 미워하셨어요. 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죠. 젊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고생을 했죠. 하지만 요즘 시대에 아들이든 딸이든 잘 기르면 되지 않겠어요.”

그녀는 네 딸을 모두 아들 못지않게 번듯이 키워 출가시켰다. 이 중 둘째 딸은 이율곡 할아버지를 닮은 듯 학문에 대한 열정이 커 현재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예안 이씨 종가의 며느리 최황규
“연엽주 계승자로 인정받아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보람 느꼈어요”

최황규씨는 예안 이씨 문정공파 참판댁 종부다. 그녀의 시할아버지는 조선시대 고종 때 이조 참판(현재 내무부 차관에 해당)을 지낸 명문가이다. 그녀의 가문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명절이면 3대가 모여 5대째 집안에 내려오는 전통 술을 빚는 것이다.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께 연엽주 빚는 법을 배웠어요. 연엽주란 저희 집안에서 5대째 내려오는 전통 술입니다. 감초 등 일곱 가지 한약재와 연꽃잎이 주재료죠.”

연엽주는 고종 때 전국에서 올라온 1백여 가지 술 중에 뽑혀 진상되었다. 고종이 즐겨 마신 뒤 약주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이들의 선조가 쓴 「치농(治農)」이라는 책자에 자세한 제조 방법이 수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왔다. 이 술을 만드는 비법은 ‘둘째 며느리도 못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조 과정 공개를 엄격히 규제해왔다.

“연엽주는 그저 즐기는 술이 아니라 제상에 올리는 제주(祭酒)예요. 그래서 제사 때마다 술을 담그죠. 저희 집은 제사가 일년에 12번이니 한 달에 한 번을 제대로 쉬는 날이 없어요.”

그녀는 일 년 내내 허리 한번 제대로 펴는 날이 없다고 한다. 특히 술을 만드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한다. 특히 술을 익히는 방은 항상 온도를 일정히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아궁이 앞에서 한눈을 팔아선 안 된다. 갓 시집왔을 때 그녀는 아궁이 앞에서 밤새 불을 지피며 많이 울었다.

“어른들과 상의해 술 담그는 날을 택일한 뒤 목욕재계를 해요. 그리고 행여 침이라도 튈세라 입에 창호지를 물고 술을 만들죠.”

최황규씨는 죽어도 종갓집으로 시집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가 등 떠밀어 결국 종갓집 며느리가 됐다고.

“종갓집 며느리가 되면 할 일이 많아 고생한다고 어머니도 말리셨고 저도 종갓집 며느리가 될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오빠들이 ‘어차피 고생하는 거 양반집으로 시집가면 보람 있다’며 억지로 보내셨죠.”

그렇게 시집온 직후 남편은 서울로 공부를 하러 갔고 독숙공방하는 새색시에겐 시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3년 동안의 시묘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다리 한번 제대로 뻗지 못한 채 잠을 잤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그녀에게도 보람이 찾아왔다. 지난 1990년 연엽주 계승자로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

“조상에게 올리는 술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제겐 의미 있는 일이에요. 시집와서 40년간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칭찬’ 정도로 생각해요. 사람들은 아예 공장을 지어 대량 생산을 하라고 하는데 그럴 계획은 없어요.”

최황규씨는 간간히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게 연엽주를 한 두병 팔 뿐 조상이 물려주신 전통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죄송스러운 일이라며 앞으로도 전통을 존중하는 종부의 삶을 살 것이라고 한다.

서애 류성룡 종가의 며느리 이혜영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 있어 힘들지 않아요”

마른 체형의 서구적인 이미지의 이혜영씨는 다른 종부들과 조금은 차별화된 듯 보인다. 그녀는 서애 류성룡 종가의 15대 차종부(맏며느리 다음 서열)이다. 겉보기에는 여린 듯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녀에게선 명문가 며느리의 기품이 느껴진다.

“제가 건강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집안의 모든 기제사를 도맡아 하고 서애 할아버지의 기일에는 경북 안동에서 손님상을 치르죠. 결혼 전에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누구보다 외우기에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 족보를 외우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어른들께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시댁 식구들과 자주 어울리고 큰 제사를 여러 번 치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워졌어요.”

현재 풍산 류씨는 숫자는 적으나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인물이 많다. 풍산금속의 류찬우 회장과 유성기업 유홍우 회장, 한류 스타인 류시원까지(류시원은 서애파의 종손으로 알려졌으나 일가일 뿐이라고 한다). 하회 마을에 자리한 종가 충효당은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정해졌을 만큼 류성룡 집안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문가다. 그렇다면 가풍과 위계질서도 엄격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아요. 어른들께서는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매우 자유로운 편이세요. 대부분 서울에서 대학까지 마치셨는데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 많아 힘든 점은 별로 없어요.”

현재 그녀는 대구 시내에 살면서 기제사만 모시지만 세월이 흘러 종부가 되면 안동 하회마을에서 가풍을 이을 것이라고 한다. 이혜영씨는 지금도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백여 명이 넘는 손님을 치루고 10여 가지 종류의 떡을 빚는다.

“집안 행사를 할 때는 그 풍경이 장관이죠.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른들이 오세요.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죠. 외국에서 보면 ‘한국식 페스티벌’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다지 힘든 점은 없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종부에 대한 부담감은 갖고 있다. 종가를 지키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어딜 가도 행동을 조심하는 건 확실히 불편한 일이에요. 하지만 즐긴다고 생각하면 재밌는 일도 많아요. 특히 사회 각층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분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시니까 그분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는 ‘종교 생활을 하고 봉사활동도 즐겁게 다니면서 조상을 모시는 제사는 왜 다들 부담스러워할까?’라고 생각한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힘든 것이 종부의 일이지만 보람과 자부심을 갖는다면 전통을 지키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만은 않다고 한다.

경주 최부잣집 며느리 이숙경
“선대에서 베푼 선행 따라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어요”

경주 최부잣집 하면, 우리나라의 ‘노블리스 오브리제’를 실천한 명부(名富) 중의 명부 가문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만석을 유지한 집안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자자했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할 때 3백60년 동안 부를 지키고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얼마나 벌었나’보다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썼나’로 더욱 유명해진 가문이다.

“저희 가문에는 옛부터 내려오는 삶의 원칙이 있었대요.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이것은 높은 벼슬에 오르면 정치에 휘말려 집안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그 이유는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니 만석 이상은 꼭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이었다고 해요.”

또 뜨내기 손님이라도 집에 온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 역시 철칙이었다. 흉년에는 절대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않았으며 최부잣집 사방 백 리 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때때로 양식을 풀었다.

“집안에 과객이 많이 머물 때는 백 명이 넘었대요. 집 주변의 초가집을 사서 분산해 머물게 할 정도였다고 해요. 1년 농사가 3천 석이었는데 천 석은 사회에 환원하고 천 석은 집안에서 쓰고 나머지 천 석은 과객을 접대하는 데 쓰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경주 교동에 자리했던 아흔아홉 칸짜리 종가는 ‘민간 궁궐’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화재로 인해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는 상태.

“지금의 경주 종가는 관리인만 있고 직계 종손들은 서울에 사세요. 종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은 사회에 희사했죠.”

1950년대 최부잣집은 전 재산을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했다. 조상의 얼을 그대로 이어받은 후손들의 선행이었다. 그녀는 물질적인 재산보다 조상이 베푼 은공이 몇 배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도 ‘경주 최부잣집’이라면 보는 눈이 달라져요. 모두 선대에서 덕을 쌓으신 덕택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해요.”

고봉 기대승 종가의 고부간 김길자&최정화
“전통도 중요하지만 가족간 화합이 으뜸이죠”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힌다. 그와 퇴계 선생이 사단칠정에 대하여 칠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논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김길자 종부는 고봉 선생의 16대손으로 그의 청빈하고 곧은 성격을 가풍으로 삼으며 종가를 지키고 있다.

“제가 갓 시집왔을 때는 기제사에만 50여 명이 참석했어요. 차츰 어린 며느리들을 맞이하면서 가정의례 준칙에 맞춰 많이 간소화했죠.”

그녀는 신세대 며느리를 위해 종부의 삶을 급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며느리를 맞이했지만 본인이 기력이 있는 한 집안 대소사를 진행할 것이며 그동안 며느리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풍을 익히게 할 작정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영리해서 엄하게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나이들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지요. 젊은 사람들이 전통을 배우는 동안에 나이 든 사람들도 시대 흐름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듯 열린 사고방식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 최정화씨. 그녀는 결혼을 결심한 후에도 종가나 종부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연애결혼을 했어요. 교제 중에는 전혀 모르다가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오갈 때쯤 종가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 생각에는 종가라는 것보다 남편될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결혼을 하고 광주 광산구에 있는 기대승의 서원과 묘지를 둘러본 뒤에야 자신의 위치를 실감했다. 고봉 기대승이라면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만 보던 인물이 아닌가.

“시부모께서 저희를 위해서인지 점점 형식을 간소화하세요. ‘마음으로만 정성을 드리면 된다’고 말씀하셔서 종부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은 없어요.”

최정화씨는 현재 딸이 하나 있다. 주위에서는 벌써부터 둘째는 아들이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런 것이 조금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라며 여유를 찾는다. 종부라는 공통점을 가진 김길자, 최정화 고부를 보며 종갓집 며느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간의 화합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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