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스승과 제자로 만나 결혼한 문광부장관 김명곤·정선옥 부부

여고시절 스승과 제자로 만나 결혼한 문광부장관 김명곤·정선옥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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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보증금 4백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시작했지만 우리 만남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초여름 한낮의 경복궁은 생각보다 한가로웠다. 5백여 년 전 왕이 거닐었을 경회루 앞의 연못가와 정갈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양버들은 궁을 찾는 이들에게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난봄 1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다. 하지만 진짜 왕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궁을 지척에 두고도 우리의 발걸음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특별함으로 가득한 경복궁에서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과 부인 정선옥씨를 만났다.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 후 두달 동안 휴식 없어

“어제는 아내와 함께 대형 마트에서 장보며 데이트했죠”

손숙(이하 손) 비가 온 후라서인지 오늘은 하늘이 맑고 더 높게 보이네요. 이런 날 경복궁을 거닐다니 감회가 새롭네요.
김명곤(이하 김) 저도 마찬가집니다. 특히 아내와 함께 걸으니까 20여 년 전 연애 시절이 생각나네요.

손 장관님은 참 로맨티스트세요. 아무래도 연극, 영화를 하셔서 감성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사모님도 연애 시절이 생각나세요?

정선옥(이하 정) 예. 오랜만에 산책하니까 기분도 좋고 데이트하는 거 같아요.

손 평소에도 두 분이 함께 산책도 하고 여행도 다니시나요? 지금 두분께서 고궁을 거닐면서 손도 잡고 팔짱도 끼시는데 그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네요.

김 저희는 어딜 가든 지금과 같은 모습이에요. 평소 집 근처를 산책할 때도 손잡고, 팔짱 끼고 걷죠.

손 장관님 평소 모습은 어떠세요? 자상하세요?

정 예.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아이들과 이야기도 많이 하는 자상한 가장이에요.

손 국립극장장으로 계셨을 때와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신 후 달라진 점이 있으세요?

정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요. 근데 장관이 된 뒤 너무 바빠요. 집에도 매일 늦게 들어오고 지난 두 달 동안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어요. 주말에도 출근하셨거든요. 예전에는 일찍 퇴근한 날은 저녁 먹고 집 근처 산책도 했는데 장관이 된 뒤로는 함께 산책을 나간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장관 취임 후 두 달 만인 지난 주말을 처음 쉬었어요.

손 극장장이셨을 때도 바쁘셨겠지만 문화관광부 장관이라는 자리가 큰 살림을 맡아서 해야 하다 보니 바쁘실 거 같아요. 그럼 두 달 만의 첫 휴일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김 그동안 아이들과 아내한테 소홀했으니까 아이들과 대화도 하고 집안일도 도와주고, 일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봤죠.

손 장도 같이 보세요? 현직 장관 중에 아내와 함께 장보면서 쇼핑 카트를 미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시려나?

김 다른 분들도 다 하시겠죠. 저는 아내와 함께 장보는 일이 자연스러운데 다른 남편들도 그렇지 않나요?

손 글쎄요. 제 생각엔 두 분 금슬이 유난히 좋은 거 같은데요. 참, 두 분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김 그 얘기를 하면 좀 쑥스러운데…. 제가 아내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손 그러세요? 그럼 선생님과 제자가 결혼하신거예요?

정 예. 맞아요. 제가 배화여고에 다닐 때 저희 학교 독어 선생님이셨어요. 그때 남편은 말 그대로 여고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젊고 지적인 총각 선생님이셨어요.

손 그럼 당시에 사모님 말고도 장관님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았겠어요.

정 예.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저는 좋아한다는 내색도 못할 정도였어요.

손 그런데 어떻게 결혼까지 하셨어요?

10년 나이 차, 집안 반대 무릎쓰고 결혼
영화 ‘서편제’ 흥행 후 17평 아파트 전세 얻어
김 제가 배화여고에서 1년 동안 독어 선생님으로 재직했고 그 후 2~3년 동안은 강사로 활동했어요. 선생님이 된 후에도 연극을 계속하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겼죠. 그래서 강사로 활동했는데 아내는 제가 연극 무대에 설 때마다 찾아와서 “선생님, 저 왔어요”하는 제자 중 한 명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꽤 인기가 있었거든요. 근데 아내가 여고 1학년이던 1학기 때는 찾아오는 학생이 1백 명쯤이었다면 2학기 때는 50명, 2학년에 올라가서는 20명, 이렇게 급격하게 팬(?)이 줄더니 급기야는 아내를 포함해서 서너 명만이 꾸준히 찾아오더라구요.

손 사모님께서는 장관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친구들이 변심(?)을 하는데도 꾸준히 장관님을 찾으셨어요?

정 글쎄요.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다 좋았어요. 저는 지금도 남편을 보면 가끔 가슴이 떨리고 설레고 그래요. 다른 아내들도 다 그럴걸요.

손 두 분 결혼하신 지가 올해로 20년이라고 들었는데 아직도 가슴이 떨리세요?

정 저는 그런데 남편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김 저도 물론 그렇죠. 저는 아내에게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결혼할 당시 제가 건강도 좋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처갓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는데 아내가 사투에 가까운 투쟁을 벌여서 결혼할 수 있었거든요.

손 그렇게 눈물나는 얘기가 있으세요?

정 당시 남편 건강이 많이 안 좋았어요. 저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빨리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집에서 반대했어요.
김 사실 저는 결혼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함께 살 방 한 칸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손 20여 년 전에 연극하신 분들이 다 그렇죠. 오죽했으면 “연극하는 놈한테 딸 안 준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겠어요.

김 맞습니다. 귀하게 키운 딸이 돈 한 푼 없는 연극쟁이와 결혼한다는데 어느 부모가 찬성하겠습니까? 저 같아도 반대하죠. 아무튼 처갓집의 반대가 심했는데 아내가 고집을 피워서 결혼을 할 수 있었어요.

손 그럼 신혼살림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김 막상 결혼을 하게 되니까 장모께서 월세방을 얻을 돈을 빌려주셨어요. 보증금 4백만원짜리 지하 셋방이었는데 부엌이 없어서 고생했죠.

정 결혼 후에 참 오랫동안 셋방살이를 했어요. 그것도 전부 월세였죠. 처음으로 상계동에 있는 17평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했을 때는 참 행복했어요.

손 그때가 혹시 영화 ‘서편제’가 흥행에 성공했을 때 아닌가요?

김 사람들은 영화 ‘서편제’의 흥행으로 제가 큰돈을 번 줄 아는데 사실 그때도 돈은 못 벌었어요. 러닝 개런티가 아니었거든요. 대신 그 후에 영화 출연 섭외가 몇 편씩 연달아 들어오면서 좀 벌었죠.

손 말씀 들어보니까 사모님이 무척 알뜰하신 것 같아요. 연극인들 수입이라는 게 뻔한데 어려운 살림을 무리 없이 하셨으니 대단하세요.

정 살면서 돈 때문에 아쉬운 적 많았어요. 근데 그러면서도 제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제가 힘들어할 때면 주변에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곤 했는데 저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남편을 믿었어요. 남편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10년, 20년 동안 매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요.

손 우리 속담에도 ‘우물을 파려거든 한 우물을 파라’는 얘기가 있듯이 원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기죠. 얘기하다 보니 두 분은 생각이 참 비슷한 거 같은데 가까이서 뵈니 얼굴도 많이 닮은 거 같아요. 주변에서 그런 말씀 안 하세요?

김 그런가요? 가끔 들은 것도 같습니다. 처음부터 닮았었는지 살다 보니 닮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손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정 아들 하나, 딸 하나예요. 딸이 큰아인데 지금 대학에서 예술 경영을 전공해요.

손 아들이나 딸 중에서 연극을 하겠다는 아이는 없나요?

김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걱정을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아이들은 연기 쪽으로는 소질이 없는 거 같아요. 근데 큰딸이 “아빠, 나 내일 연극과 남학생들이랑 미팅해”라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구요. 혹시라도 저 같은 사위를 얻으면 어쩌나 싶어서. 하하하.

손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서 연극인들도 점차 대우가 좋아지고 있어요. 장관님께서 무대에 오를 때와는 다르죠.

김 저도 그런 걸 느낍니다. 특히 문화라는 것이 한 국가를 위해 얼마나 대단하고 큰 힘이 되는지 요즘 새삼스레 실감합니다. 아내가 얘기한 대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두 달 동안 개인 시간 하나 없이 업무만 파고들었습니다. 요즘은 여러 가지 업무를 하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죠.

창의적인 경영 마인드 ‘블루오션’으로 화제 모아
“이제는 한류가 세계 무대 진출할 때, ‘문화의 힘’ 보여줄 터”
손 장관님께서는 국립극장장으로 계실 때도 ‘발상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죠. 그 대표적인 것이 국립극장 마당에서 펼친 ‘열대야 페스티벌’이고. 권위적이고 웅장하고 대형 작품만 상연하는 국립극장 앞마당에서 축제를 연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아스러워했죠?

김 제가 처음 그 아이디어를 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죠. 근데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국립극장이라는 곳이 권위적이고 중압적인 무게를 느끼게 해서는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은 즐기는 거지 학문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때 ‘열대야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국립극장을 찾은 일반인이 5천 명이 넘었어요.

손 그때 장관님의 창의적인 경영이 화제가 됐고 ‘블루오션’이라는 새로운 단어도 탄생했죠?

김 ‘블루오션’은 창의, 변화, 개혁을 뜻하죠. 원래 형성되어 있는 시장이 ‘레드오션’이라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바로 ‘블루오션’이죠. 예를 들어 뮤지컬은 뮤지컬다워야 하고 연극은 연극다워야한다는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뮤지컬에 마술을 섞어 새로운 공연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고, 연극과 서커스가 만나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신선한 무대를 만들 수도 있겠죠. 제가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은 바로 이런 거예요.

손 요즘 문화관광부에서 한류와 연결해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블루오션’의 일종인가요?

김 그렇게 볼 수 있죠. 현재 문화관광부에서는 6H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6H란 한류와 연결해 한글, 한지, 한옥, 한복, 한식 그리고 한국화를 활성화하자는 거죠. 우리 문화가 이제는 세계 무대로 진출해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우리만의 특징으로 완벽하게 무장을 해야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해외에 나갈 때 한복을 입고 한국화를 한글이 씌어진 한지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들고 나간다면 그보다 값진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6H를 실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누구나 애국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손 장관님께서는 아이디어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열정적인 것도 좋지만 건강도 잘 챙기셔야 할 텐데 건강은 어떠세요?

정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은 없고 간간이 산책하고 등산을 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못해요. 대신 비타민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매일 아침 허리에 만보계를 차고 나가요.

김 만보계를 차면 아무래도 걷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되죠. 그래서 사무실에서도 일부러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서류를 볼 때도 왔다갔다 하면서 보게 돼요. 저녁에 집에 와서 보면 하루에 5천~6천 보 정도 걸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운동할 시간이 없죠.

손 김명곤 장관님을 ‘광대 장관’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연극 무대에 다시 설 계획도 있으세요?

김 장관 임기 마치고 나면 연극 무대에서 다시 연출자로 나서야죠. 저는 ‘광대 장관’이라는 표현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대를 보기 위해 관객이 모이는 것처럼 세계 무대에서 우리 문화가 주목을 끌었으면 좋겠습니다.

손 그러고 보니 오는 7월 4일이면 장관님께서 취임하신 지 1백 일이 되는 날이세요.

김 벌써 그렇게 되나요? 한 일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빠릅니다. 그때쯤에는 문화가 힘이라는 것을 정책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손 장관님께서 의욕이 대단하신데 그럴수록 사모님은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건강도 그렇고, 뭔가 열심히 하다 보면 집안일에 소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정 집안일은 괜찮은데 건강이 걱정이죠. 저는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실 수 있게 돼서 그게 참 기뻐요.

손 부창부수세요. 그런데 사모님께서는 평소 장관님께 어떤 호칭을 사용하세요?

정 보통은 여보라고 하고 또 기분 좋을 때는 자기라고 하죠.

김 싸울 때는 ‘당신’이라고 해요.

손 두 분이 싸우기도 하세요? 무슨 일로 싸우나요?

정 주로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싸우죠. 예를 들면 제가 뭔가를 부탁했는데 남편이 한다고 하고는 안 했을 때, 그럴 때 주로 싸워요.

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두 분 모습이 애틋해서 자녀들께 좋은 교육이 될 거 같은데, 그럼에도 교육적으로 아이들한테 강조하는 것이 있으세요?

김 ‘정직하자’가 저희 집 가훈입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는 늘 ‘꿈을 높게 가져라.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해라. 그게 가장 큰 행복이다’고 하죠.

손 아이들에게는 장관님만큼 좋은 본보기도 없을 것 같아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극을 향한 열정으로 한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문화의 힘이 미래를 바꾼다’는 소신을 갖고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니 이보다 더 큰 교육이 어딨겠습니까.
김 이거 듣고 보니 제 어깨가 무척 무거워집니다. 아무튼 열심히, 부지런히, 세계에 우리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에필로그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인터뷰 중 “아내는 마음이 따뜻하고 아직도 소녀 같은 순수함이 있다”며 부인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김 장관은 열 살 연하의 아내와 어렵게 결혼 후에도 연극 무대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남편 몰래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것도 깨달았다.

김 장관은 지난 2003년 국립극장장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 후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아내에게 가져다주었다. 결혼 후 20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아직도 서로를 보면 가슴에 설렌다는 부부는 가슴속에 어마어마하게 큰 사랑 단지를 품고 있는 듯하다. 평생 마르지 않을 것 같은 감성으로 연극을 사랑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김명곤 장관은 ‘생각하는 바가 꾸준하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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