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에 나선 스타 PD & 스타 성우 김영진·권희덕

재기에 나선 스타 PD & 스타 성우 김영진·권희덕

“할 일이 있고 의지가 있는데다 든든한 동반자까지 있으니 나는 행복한 장애인입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한 걸음 뒤에서 제 깜냥을 발휘하던 성우와 PD 두 사람이 수줍게 인터뷰에 나선 이유가 있다.
14년 우정을 토대로 국내 최초로 제작되는 장애인을 위한 뮤지컬 ‘위드 러브(With Love)’의 기획자와 연출가로 두 손을 맞잡은 권희덕과 김영진. 이들의 마음은 어느새 꽃피고 뮤지컬 막 오르는 내년 4월에 가 있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세상
뮤지컬 ‘위드 러브’의 제작 소식이 전해진 것은 지난 6월 20일, 제작비 모금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를 통해서다. 떠들썩하게 알린 자리도 아닌데 탤런트 채시라, 연극배우 박정자, 가수 심수봉, 김종환, 클론 등 7백여 명이 참석해 뜻 깊은 시간을 함께했다. ‘위드 러브’를 향한 관심이 이토록 뜨거운 이유는 아주 특별한 기획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위드 러브’의 시작은 김영진의 안타까운 사연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 7월 KBS 주말드라마 ‘사랑하세요’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 김영진은 미시간 주의 한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무려 4개월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동안 회사에서는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무도 그가 돌아오리라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 수술과 혹독한 재활 훈련 끝에 2002년 9월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영진은 이미 예전의 스타 PD가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그의 몸 상태를 염려한다며 연출을 맡기지 않았다. 하반신 마비의 몸에 갇힌 그의 열정은 그렇게 숨죽여 울고 있었다.

권 KBS 드라마국의 한 PD로부터 듣자하니, 미국에서 사고가 나서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 했었어요.

김 미국에 있는 동안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 누구와 연락하기 힘들었어요. 4개월 만에 깨어났으니까, 회사에서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요. 온몸을 짜깁기한거나 다름없어요.

권 이 친구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KBS로 달려갔어요. 옆에 있어서 얘기지만 그때는 휠체어에 앉아서 말도 또릿하게 못했어요.

김 아직도 발음은 어눌한걸요.

권 그래도 지금은 양반이죠. 이 친구랑 헤어지고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자꾸 ‘일을 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김 저는 직장이라도 있으니 월급이 나오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직장 구하기가 힘들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기쁨이 중요한 것 같아요.

권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뮤지컬 연출을 맡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중학교 때 꿈이 음악가일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기에 뮤지컬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예전에 MBC 황인뢰 PD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라는 뮤지컬 드라마를 즐겁게 봤는데, 선생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기회가 왔다 싶었어요. 이제 내 세상을 만나는구나.

예쁜 말 한마디로 시작된 좋은 인연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김영진은 권희덕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첫 만남 당시의 호칭이 지금껏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하드라마의 조연출을 맡고 있던 김영진은 연출자로부터 예고편의 목소리로 성우 권희덕을 썼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들었다. 그는 햇병아리 PD였지만 권희덕은 이미 중견 성우였기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다. 권희덕은 워낙 중후한 외모 덕분에 30대 중반부터 선생님으로 불렸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연출자가 저를 시험하려고 그랬던 거 같아요. 당시 선생님은 드라마 예고편을 할 위치가 아니었어요. 1분 남짓한 예고는 막말로 아무 성우나 시켜도 되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왠지 연출자에게 지기 싫어서 선생님께 제의를 했어요. 미쳤던 거죠(웃음).

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을 예쁘게 해야 하잖아요(웃음)? 몇 번 해주다가 잘하는 후배한테 넘길 심산으로 하겠다고 했는데, 후배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지나가는 길이라며 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스튜디오로 찾아왔더라고요.

김 그게 어디 지나는 길이었겠어요. 작정하고 간 거죠(웃음). 그 녹음실 찾기도 어려웠어요. 지금은 GPS라도 있지.

권 그때 영진이가 자기는 언젠가 훌륭한 연출자가 될 것이고, 지금은 최고와 일하고 싶으니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뻤어요. 무엇보다 장미꽃 한 송이의 의미가 나를 최고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라는 말에 제가 넘어갔어요(웃음).

김 그 드라마가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였어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서로 좋은 감정으로 알고 지냈어요.
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데 영진이는 당시 말을 참 잘했기 때문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거죠. TV와 라디오로 활동 영역이 달라서 자주는 못 만났지만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정말 훌륭한 연출자가 됐더라고요. ‘야망의 전설’은 정말 열심히 봤어요.

너와 나의 이야기를 담은 ‘위드 러브’
김영진은 권희덕을 “일이 없으면 못 견딜 것처럼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는 여장부”라고 하고, 권희덕은 김영진을 “고집이 굉장히 세지만 그것을 대작을 이끌어나가는 데 활용할 줄 아는 수장”이라고 평가했다. 서로의 장단점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덕분에 공연 준비에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위드 러브’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시골뜨기가 우연히 선배의 대타로 무대에 올라 큰 성공을 거두고 스타가 되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되고, 피나는 재활 훈련을 통해 재기한다는 게 큰 줄거리다.

선배의 대타로 나섰다가 스타덤에 오르는 건 ‘명화극장’ 알디라 편의 여주인공 역으로 주목받게 된 권희덕의 경험이고,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다는 내용은 알다시피 김영진에게서 따왔다. 2년 전 태동이 시작된 ‘위드 러브’는 두 사람의 생생한 사례를 담아 한 편의 뮤지컬로 거듭났다. 권희덕은 주인공이 장애를 입는다는 설정을 과감히 내세운 만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다루지는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김 재활 병동 얘기를 담긴 하겠지만, 병원 자체가 많이 나오면 관객들이 그리 즐겁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권 그걸 위트로 잘 그려내야겠지.

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무대에서 노는 걸 지켜보는 게 관객들에게는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닐 거예요. 결국은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내는가가 관건이겠죠.

권 맞는 얘기인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김 진심으로 하면 통할 거예요. 연기자들을 보면 진심으로 하는 사람과 툭 던지는 사람이 있는데 진심으로 하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와 닿는 법이거든요. 내 강점 중 하나가 연기자 컨트롤을 잘한다는 거예요. 진심으로 칭찬을 하면 정말 잘해야겠다는 의지가 보여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권 맞는 얘기인 거 같아. 칭찬의 힘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거든요.

김 출근하다 보면 촬영을 떠나는 대형 버스들이 방송국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데 그걸 보면 그렇게 부럽고 가슴이 뛰어요. 아, 연출하고 싶어.

권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기다려.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공연 만들 것
김영진은 얼마 전 장애인 초청 공연에서 비보이들의 댄스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막 날아다니면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걸 보고 있자니 왜 이런 걸 보러 오라고 초청한 것인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날 무렵이 되자 그들의 에너지가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도 일어설 수 있다는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공연 기획사의 홈페이지에 장문의 감상문을 쓴 그는 티켓을 직접 구입해 한 번 더 공연장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처녀작이 될 뮤지컬 ‘위드 러브’ 역시 관객들에게 우리네 삶이 그다지 찌든 것만은 아니며 살아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의지를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권 20일 행사에서 채시라씨에게 김영진에 대해 물었더니 굉장히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사회를 보던 황인용씨가 자신을 뮤지컬에 출연시켜달라고 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사정하면요”. 채시라씨도 마찬가지래요.

김 그것도 출연시켜준다는 게 아니라 고려를 해보겠다는 거였어요(웃음).

권 영진이를 보면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그날도 영진이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웃었어요.

김 뮤지컬 역시 감동을 주겠다는 의도로 울고 짜도록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웃다가 어느 순간 “내가 감동을 받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해요.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재밌어야 하거든요.

권 장애인을 위한 뮤지컬이라고 해서 장애인이 많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을 열도록 하는 휴먼드라마가 되어야 할 거 같아. 단지 장애인이 연출할 뿐이라는 거지.

김 뮤지컬 연출은 일반 사람이 하기에도 쉬운 작업이 아닐 거예요. 그걸 장애인이 해냈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거 같아요. 사실 아직 아프고 괴로운 게 많거든요. 왼쪽이 마비되었는데, 이상하게 왼발이 아파요. 그걸 상상통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얼마 전부터 서서 소변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데요. 예전에는 아랫배를 때려야 겨우 일을 치를 수 있었거든요. 화장실 갈 때마다 감사 기도가 절로 나온다니까요.

권 나날이 좋아지는 걸 보니까 기쁘고 대견해요. 요즘은 자가용으로 출퇴근까지 할 정도니까요.

김 돌아보니 그런 거지 그 순간에는 몰라요. 내가 한 번 더 치료받는다고 해서 내 몸이 좋아지지 않고, 그렇다고 물리치료 한 번 쉬고 약 거른다고 해서 내 몸이 나빠지지는 않아요. 그저 나아질 거라 기대를 하는 거죠.

권 ‘야망의 전설’에서 최수종씨를 지옥 훈련시키더니 본인이 지옥 훈련하면서 나아지고 있는 거야(웃음). 아까 고집이라고 했는데,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거든요. 투철한 고집으로 영진이는 이겨내고 있는 거예요.

김 장애인과 일은 정말 밀접해요. 그저 밥 먹고 그냥 살라고 하는 건 사는 게 아닌 거예요. 사회적 욕구가 왜 중요한데요.

권 후배가 대작을 연출하는 거 보면서 왜 속상하지 않았겠어요. 장애로 인해서 뒤처졌다고 생각하면 더 슬플 텐데 잘 견뎌내줘서 고마워. 이제 ‘위드 러브’만 잘되면 삶의 활력소도 찾을 거고 아픈 것도 덜 할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하면 안 아파.

김 저 내년에 뮤지컬 신인감독상 받을 거예요(웃음). 그때는 당당히 걸어 나가서 상을 받아야 할 텐데.

권 그럼 그래야지. 만 2년 만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지팡이 잡았잖아. 이제 1년 안에 지팡이도 놓고, 신인감독상 받아야지.

김 생각만 해도 즐겁네요, 즐거워.


권희덕 (51)
1976년 KBS 14기 성우로 데뷔해 ‘동방불패’의 임청하를 비롯해 잉그리드 버그만, 맥 라이언, 카트린느 드뇌브 등의 목소리 연기를 담당했다. 그녀를 알린 히트작은 단연 ‘남편 사랑은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최진실의 목소리. 스튜디오 소리사냥을 운영하며 만화와 국악이 결합된 ‘애니 콘서트’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기획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파이스토리’의 코딜리아 역 목소리 연기와 전체 더빙 연출을 맡았다.
■ 뮤지컬 ‘위드 러브’ 후원 계좌 늘푸른세상 1002-030-298548(우리은행) 문의 02-3445-5500

김영진 (47)
1993년 단막극 ‘아빠는 조감독’을 시작으로 ‘원지동 블루스’ ‘열애’ 등을 연출했으며 최고의 히트작은 시청률 50.7%를 기록한 최수종, 채시라, 유동근 주연의 ‘야망의 전설’과 ‘사랑하세요’를 꼽는다. 2000년에는 KBS 연기대상에서 연기자가 뽑은 올해의 PD상을 수상했다. 2000년 7월 타이어가 이탈되는 차량 전복 사고로 뇌출혈과 폐 파열, 경추 골절 등의 중상을 입었지만 교통사고 후 귀국했던 가족들이 미국으로 돌아가 본업에 충실해도 될 만큼 놀라운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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