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라에 다시 돌아와서 기쁩니다. 나는 천생 호텔리어입니다”
지난 5월 부임한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의 에릭 스완슨(Eric M. Swanson) 총지배인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을 백분 활용한 덕분에 서비스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 시간 인터뷰로 한국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만큼인지 다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동질감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10년 전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 신현아씨와 함께한 첫 부부 인터뷰.
한국은 내게 고향과 같은 나라
훤칠한 키의 에릭 스완슨(48)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 총지배인이 아내 신현아씨(37)와 함께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된 미모의 아내 신씨는 미국 「GQ」 「Ego」, 중국 「하퍼스 바자」, 한국 「에비뉴엘」 등의 매거진과 작업하는 패션 사진작가. 본거지가 미국 뉴욕인 관계로 부부는 1년이면 3분의 2 이상 떨어져 지낸다. 아내와는 지난 1996년부터 3년간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근무할 당시 만났다.
“제가 다니던 회사가 리츠칼튼호텔과 거래가 많아서 호텔 측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에릭이 있었죠. 첫인상은, 글쎄요. 식사하는 동안 저를 계속 쳐다보기에 ‘내가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하고 오해했었어요(웃음).”
스완슨씨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였단다. 며칠 후 그는 용감하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 신청을 했다. 거절을 하려면 구구절절 이유를 대야했기 때문에 (그것도 영어로!) ‘예스’라고 답했다는 신현아씨는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처럼 발전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스완슨씨의 어머니 조창수 여사(81)는 1965년부터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 아시아 담당 학예관으로 재직 중이다.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민속품 및 미술품 등 총 3천 3백여 점 중 대한제국 초기에 수집된 1백 56점의 수집품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미술사적 가치를 담은 해설서인 「근대 한국민속 예술품 도록」을 출판한 저명한 민속학자다. 평양 출신인 그녀는 경기여고, 일본 여자대학 인류학과를 거쳐 워싱턴 주립대에서 민속학 석사과정을 밟던 중 미국인 교수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한국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우리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현아와 결혼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도 무척 기뻐하셨어요. 제 얘기를 듣기 무섭게 아내를 만나고 싶어하셨거든요. 원래 고부 간의 관계는 어려운 법인데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는 그런 껄끄러움이 없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니까 제가 덕을 톡톡히 보고 있죠.”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도저히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외모라고 하자, 아내 신현아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했다. 아내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을 싫어한다거나, 저녁이면 반드시 식사를 차려주기를 바라는 걸 보면 영락없는 한국 남자, 그것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경상도 사나이와 다름없단다(스완슨씨는 ‘경상도’라는 말이 나오자, 수긍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모는 청혼할 때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로맨틱한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면 당장 기대를 버리는 게 좋겠다.
엄한 어머니 밑에서 회초리 맞으면서 자라
“결혼 전에 아버님을 뵙기 위해 워싱턴에 갔는데, 저는 그때 에릭이 청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다가 갑자기 따지는 자세로 ‘Will you marry me?’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이었으면 좀 튕길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긴 미국이었잖아요. 순간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5일이나 남았는데, 여기서 ‘노’라고 하면 남은 5일은 어디서 지내나‘하고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스’라고 답했어요(웃음).”
“순진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심성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에 있어서는 굉장히 성실하고 공과 사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점이 미더웠어요. 10년 전만 해도 제 또래 한국 남자 중에 꽉 막혀 있는 이들이 많았는데, 에릭은 생각도 열려 있었고요.”
첫눈에 반한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어떻더냐고 묻자, 스완슨씨는 다음 말을 고심하는 듯 보였다. 영어가 서툰 한국 여자와 무늬만 한국계인 미국 남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사랑 그 이상의 이해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오해는 쌓일지언정, 신기하게도 싸움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자주 오해가 생겨났어요. 둘 다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어서 한창 싸울 때는 복싱 경기를 방불케 하곤 했죠(웃음). 지금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한결 편안해졌어요. 물론 아내는 아직까지 제게 못마땅한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는 건 결혼 생활 10년이 가져다준 변화입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신씨는 한동안 전업주부로 지내다 뒤늦게 사진 일에 뛰어들었다. 스완슨씨가 인도와 베이징 등지로 근무지를 옮기며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늘어난 탓도 크다. 외국에서 일하는 남편을 대신해 신씨가 워싱턴에 사는 시어머니의 생신을 챙기고 명절을 함께 해오고 있다.
“사진을 시작하려고 할 때, 남편보다 어머님께 먼저 상의드렸어요. 어머니께서는 적극적으로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어요. 보통 시어머니라면 남편 뒷바라지는 뒷전으로 하고 공부하겠다고 하는 며느리를 탐탁치 않아하실 텐데, 저희 어머님은 오히려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제 걱정을 하세요. 지금도 ‘어머님을 뵙지 않았더라면 에릭과 결혼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를 자주할 정도로 제겐 든든한 지원군이세요.”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자상할 것 같은 시어머니인 반면 조창수 여사는 아들에게는 철저했다. 굉장히 엄격했던 아버지도 아들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건만, 불같은 성격의 그녀는 극도로 화가 날 때는 한국 말로 혼을 내며 매를 들기도 했다.
“어머님께서 굉장히 학구열이 높은 분이세요. 한국 어머니 특유의 뜨거운 교육열 덕분에 시누이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못하는 외국어가 없을 정도예요. 반면 남편은 어머님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아서 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어요(웃음).”
의사를 원했던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성공한 호텔리어
스완슨씨가 호텔 업계에 발을 디딘 것은 리츠칼튼호텔 예약부서에 근무하던 누나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깨끗한 근무 환경, 매일매일 색다른 이벤트와 프로모션에 흥미를 느낀 그가 호텔리어의 길에 들어서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를 하는 것도 모자라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당신의 아들이 의사나 건축가를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저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어머니 세대 때와 달리 현재 호텔 산업은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으니까요. 총지배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호텔리어의 매력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 융화하면서 훌륭한 행사를 치르고 그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조직 내에서 제 자신과 경쟁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1986년 미국 워싱턴 DC 리츠칼튼호텔의 시설관리 이사로 호텔계에 입문한 그는 1999년 총지배인으로 승진해 이집트 샴엘세이크(sharm el sheikh),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코코넛 글로브 리츠칼튼, 인도 리라 팰리스 켐핀스키, 베이징 마르코폴로 파크사이드 호텔 등에 근무했다.
호텔리어로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하자 지난 5월 한국으로 부임한 것과 전임지였던 인도 리라팰리스켐핀스키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이끌어낸 성과를 꼽았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지 두 달 만에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은 매출 면에서나 고객만족도 면에서 괄목할 만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전세계적인 경기 후퇴로 인해 관광 분야가 어렵지만, 밀레니엄 힐튼서울은 세계적인 호텔 그룹 힐튼과 세계 35위의 호텔 그룹인 밀레니엄의 조합으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 특급 호텔 중 가장 수익성이 뛰어난 호텔을 만들기 위해 제 소임을 다할 생각입니다.”
스완슨씨는 호텔마다 그 시즌에 걸맞는 다양한 프로모션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고 있으니 그 기회를 활용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또한 호텔은 고객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곳이니 예약할 때 특별히 요구할 사항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레이디경향 독자를 위해 호텔 활용 팁까지 꼼꼼하게 전하는 모습이 천생 호텔리어인 스완슨씨. 그는 호텔 4층에 위치한 숙소에서 지내며 말 그대로 24시간 고객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설거지는 도맡아한다는 스완슨씨는 양식은 코스별로 사용한 접시를 치우고 새 접시를 내놓는데 반해 한식은 한번 상을 차리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빈 그릇을 치우지 않아서 그걸 지켜보는 것이 꽤나 난감했다고 한다. 음식을 만들 때도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쓰레기를 버리고, 개수대를 정리하는 게 스완슨식 요리법의 기본. 처음에는 그런 남편의 행동이 영 불편했다는 아내도 어느새 그를 닮아 정리정돈과 청소의 고수가 됐다. 뿐만 아니다. 스완슨씨의 세심함은 가족들을 챙기고 배려하는 면에서도 빛을 발한다.
“한번은 찬장에 참기름이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장모님께서 참기름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정말 좋은 참기름을 구해왔다’고 하더군요. 그런 소소한 것까지 마음을 써주니 감동할 때가 많아요.”
미국에 있는 아내를 대신해 맏사위 노릇을 해내는 것은 물론 자기 관리에도 철저한 스완슨 총지배인. 이 또한 혼자 지내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나 운동을 하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입맛에도 잘 맞지만 한국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저에게 바람이 있다면, 우리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겠죠. 하지만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은 호텔리어에게는 운명과도 같으니, 이젠 익숙합니다. 은퇴를 예상하는 60세까지는 호텔리어로 부지런히 뛸 겁니다. 한국에는 오래 있을수록 좋겠고요.”
스완슨씨가 총지배인으로 부임한 후 알려진 소식이 있다. 지난 1994년 43년만에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국군 포로 조창호 중위가 그의 외삼촌이라는 것.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한국 전쟁 중 남동생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는 그는 1996년 리츠칼튼 서울 근무 당시 외삼촌과 처음 만난 뒤 자주 만남을 가져왔다.
귀환 국군 포로 1호로 기록된 조 중위는 안타깝게도 지난 11월 19일 향년 76세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스완슨씨는 “어머니와 이모, 외삼촌들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퍼했다”고 장례식 분위기를 전했다. 이름과 외모만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한국인이라는 끈은 그가 외삼촌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순간 절절하게 와 닿았다. 소주와 삼겹살을 좋아한다는 애정 그 이상으로 말이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형주·에릭 스완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