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게, 거짓없이 사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에요”
지난 1월 6일, ‘국가 대표 문지기’ 강여형씨를 만났다. 강씨는 작년 12월 27일 퇴임식을 갖고 옥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여유가 묻어났다. 33년 10개월간의 공직생활을 마친 그의 심정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재직 기간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과 목격한 사건들에 대해 들어보았다.
정부중앙청사 문지기의 시선에 비친 ‘그때 그 사람들’
“은퇴를 며칠 앞두고 있을 때는 그저 시원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시말서 한 번 쓴 적이 없으니 ‘명예로운 퇴직’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퇴임식 날 아침은 달랐다. 매일 아침 출근길 버스를 타기 위해 걷던 언덕길을 오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휴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30여년을 걷고 또 걸었던 그 길. 강여형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강씨가 방호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것은 지난 1973년 3월. 쌀 한 가마와 연탄 100장, 그리고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보수를 받고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해결하면 모자람은 없었다. 은퇴 전 7년 5개월 동안은 방호실장으로 근무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도 그의 공직생활은 눈에 띄는 변화 없이 한결같았다.
방호원의 첫 번째 임무는 정부의 재산 보호다. 청사 내 질서 유지는 물론, 출입자 관리, 물품 반출입, 방문객 기록 등의 일을 담당한다. 입주 공무원과 민원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업무도 포함된다.
청사를 드나드는 사람은 하루에 1천3백여 명에 이른다. 정문으로 출입하는 입주 공무원과 주로 후문을 이용하는 민원인들을 합한 숫자다.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는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옛날에는 참 정(情)이 많았죠. 전에는 ‘질서 확립을 위해서 주차 좀 바로 해주십시오’ 하면 ‘아, 그렇습니까’ 하고 말이라도 따뜻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요. 주차장이 포화상태인데도 근무자가 요청을 하면 도리어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 사이에 정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유난히 정이 많았다. 어느 겨울 날, 박 전대통령은 출근길 현관에서 강씨를 보고 멈춰섰다. 그러더니 그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옷의 두께를 직접 확인했다. 박 전대통령은 “추운데 고생이 많다”며 그 자리에서 방호원들에게 방한복과 방한화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 이후 바로 지급이 됐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부츠도 신고, 따뜻하게 근무할 수 있었죠. 그분이 아랫사람들에게는 참 따뜻했어요.”
이해찬 전 총리는 강씨를 총리실로 불러 직접 차도 대접했다. 박봉에 시달리지는 않는지, 근무 환경은 어떤지,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긴장했지만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방호원들에게 양복을 한 벌씩 선물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낡은 양복은 더 이상 입을 수 없지만 흐뭇한 마음만은 여전하다.
강씨가 처음부터 방호원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입사 전 공무원이 되기 위해 총무처 5급 시험을 봤지만 실패했다. 다른 일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밥벌이’를 해야 했다. 기회가 되면 어디든 입사하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용원’이라는 직제로 방호실에 특채 입사했다.
실제로 근무를 해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하루 24시간 2교대 근무. 고된 일이었다. 생활 리듬도 깨지고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참아야 했다. 연금이 보장될 때까지 17년만 참자고 결심했다. 군 생활을 포함해서 20년간 장기근무하면 연금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년 후에도 그만 두지 못했다. 이제는 가족의 생계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또 한 번 참았다.
큰 사건이 터졌을 때는 특히 힘들었다. 10.26 박 전대통령 서거, 12.12 사태, 5.17 비상계엄확대와 같은 사건에도 침착하게 대응해야 했다.
1979년 10월 26일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수경사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윗분’들의 대화를 귀동냥으로 듣고서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강씨를 비롯한 방호원들과 계엄군은 복초근무를 섰다. 청사 구조를 모르는 군인들은 전등을 켜고 끌 수도 없었다.
강씨는 “건물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치러진 국장(國葬)도 생생하다. 중앙청 앞으로 온 국민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남자들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여자들도 “국부(國父)가 돌아가셨다”며 옷을 갖춰 입고 거리로 나왔다.
12.12 사태 때는 상황이 더 긴박했다. 광화문 앞에 탱크가 ‘주차’되어 있었다. 청사 안에는 수경사 군인들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을 해보니 백마부대 군인들로 바뀌었다.
계엄이 확대됐지만 서울은 조용했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은 광주가 고향인 직원들이 집에 다녀온 다음에야 들었다. 언론 통제가 심했던 시절. 답답한 상황이었다.
작은 사건 사고들도 많았다. 청사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토로하는 것이다. 억울한 사연은 이해하지만, 담당 공무원이 통제를 부탁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청사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팔걸이’를 해서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청사 직원들이 나를 구타했다’고 하는 바람에 경찰서까지 갔다. 종로 경찰서에서 조서도 꾸몄다. 그때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이다.
30여년 결근 한 번 한 적 없는 1등 공무원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겪으며 무사히 공직 생활을 마친 강여형씨. 은퇴식을 마치고 가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들에게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를 당부했다. 그가 말하는 ‘공무원의 품위’란 뭘까.
“정확한 출퇴근이 기본입니다. 자기 책임을 다 해야죠. 민원인에게도 친절해야 하고요.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잖아요.”
기대보다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은퇴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는 가족들과 함께 뒷산에 올랐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묘소에 훈장을 놓고 인사를 드렸다.
“잘 돌봐주셔서 아무 탈 없이 공직생활을 마치게 됐다고 인사를 드렸어요. 시골에서는 면 서기만 되도 ‘누구 아들이 면 서기 됐다’며 우러러보곤 했죠.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어요. 공직을 무사히 마치고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으니 조금은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그저 건강하게,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채소를 기르며 거짓 없이 사는 것이 소원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간의 빚을 갚고 싶다. 지금까지 여행 한 번 간 적이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행도 다니면서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이 배부르게, 등 따뜻하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국민들을 위해서 고민하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강여형씨의 말은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의 삶처럼, 꾸밈없고 솔직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강씨 부부와 뒷산에 올랐다. 서울을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공기가 다르다.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산 아래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은 평화로웠다. 산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봄이 오면 강씨 부부가 무, 배추, 오이 등 채소를 가꿀 땅이다.
저녁 시간이 되자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오늘 저녁의 평화로운 일상처럼, 강씨 부부의 앞날도 건강하고 소박하기를 기원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