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약속을 어긴 남편이 이젠 더 이상 원망스럽지 않네요”
부유층과 권력층 저택만을 털고 훔친 현금의 일부를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주며 ‘의적’, ‘대도’로 불리던 사나이 조세형. 청춘을 청송교도소에 바친 그의 곁에는 지난 2000년 결혼식을 올린 열여섯 살 연하의 아내 이은경씨가 있다. 목회자로 새 인생을 맞은 줄 알았던 남편의 두 차례 교도소행을 지켜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그녀는 지금 ‘반야화 법사’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이 조세형의 아내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외부의 시선을 피해 지내던 이은경씨(43)가 어렵게 인터뷰에 응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공통분모로 조세형(69)과 부부의 연을 맺은 그녀는 1년 6개월 전 서울 중랑구에 포교원을 차리고 ‘반야화 법사’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대도’가 훌륭한 목회자라는 뜻인 줄 알았다
이은경씨가 조세형을 처음 만난 건 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서였다. 조세형의 이름 앞에 붙는 ‘대도’라는 뜻이 훌륭한 목회자란 뜻인 줄 알았을 만큼 그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그녀는 건실한 전과자들의 취업을 도와달라는 그의 제안으로 이후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종교적인 교감을 나누며 친분을 쌓던 중 조세형이 경기도의 한 교회에서 간증을 하다가 이씨에게 공개 프러포즈를 했다. 난감함에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이씨는 과거를 고백하며 진심을 보여준 조세형에게로 마음을 돌렸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5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씨는 당시 직원 3백 명 규모의 기업체를 이끌고 있는 능력 있는 여성 사업가였던 터라 주변의 반대는 더욱 거셌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유층이나 권력층의 저택만을 상대로 금품을 털어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현대판 홍길동’이라고까지 불리던 조세형은 1998년 15년의 수영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 목회자의 길을 걸었고, 1999년에는 한 경비업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결혼 3개월 전 태어난 아들 승진이(가명)까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일본 절도 사건이 발생했고, 5개월의 감형이 있기 전까지 3년 1개월간 조세형은 일본 고부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3백 통의 편지가 현해탄을 오가는 동안 이은경씨는 노래방에 이어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서 아이를 키웠다.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없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집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안정을 되찾았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암이에요.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해버렸어요. 평상시 저를 아는 분이니 망정이지, 초면이었다면 미쳤다고 욕을 했을 거예요. 한참을 의아하게 저를 쳐다보던 그분이 며칠 뒤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병원에 가보니 자궁암 초기라서 수술을 했다고요.”
이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상대방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말을 하지 않으려고 깨물었던 혀의 피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행여나 손가락질이라도 받을까 싶어서 다시금 칩거에 들어갔다. 한 달 후 일본에서 돌아온 남편은 더욱 황당해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남편은 신 내림을 받은 듯 남의 운명을 줄줄 읊어대는 아내가 영 마뜩찮았던 것이다.
“천주교 모태신앙인 저는 오죽했겠어요? 무속신앙이나 신 내림에 대해서는 일체의 정보가 없었기에 저에게 찾아온 성령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요. 고백성사를 하며 신부님께 상의했더니 제 상황은 이해하지만 사회에 노출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정말이지 전 아이에게 유능한 사업가 엄마로 남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아이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운명에 무릎 꿇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심산으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독한 맘 먹고 집을 나서는데 남편이 “차라리 같이 죽자”며 아이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그러나 또다시 언쟁이 시작됐고 견디다 못한 이씨가 벼랑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차는 폐차 지경에 이르렀는데 가족들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법사(중생을 이끄는 승려라는 뜻으로 신도와의 상담을 하는 봉사자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이은경씨는 설명했다)가 되는 과정을 밟기 위해 알아보던 중 그녀는 고인이 된 외할아버지가 큰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정어머니가 천주교도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고.
집 근처 중랑시장에서 ‘왕꽃선녀님’이라고 소문이 날 만큼 신도들이 끊이지 않자 내내 등을 돌렸던 남편도 자신의 운명을 봐달라고 청했다. 부모로부터 버려져 생년월일조차 모른 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하며 자란 조세형은 존재조차 몰랐던 형이 어린 시절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드디어 운명의 타래를 풀게 됐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날 제가 얘기한 것 가운데 여덟 가지 정도가 이후 6개월간 마치 예정된 각본인 양 이뤄졌어요. 안타깝게도 그중 관재(官災)가 있었어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분이 아니라 의아했지만 일단은 남편에게 6개월 후에 환란이 있을 테니 조심하라고 일러두었죠. 백일기도를 하라고도 했지만 남편은 따르지 않더군요.”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 그날. 조세형은 일본 사건과 관련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며 돈을 달라고 했다. 신병의 기운은 가수가 되면 풀 수도 있을 거라는 지인의 조언에 따라 음반을 준비하던 이씨는 제작비를 지불하느라 돈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내의 얘기를 거짓으로 받아들인 남편은 단단히 화를 내더니 “오늘만은 집밖에 나가는 일을 삼가라”는 그녀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마침 제가 수양어머니로 모시던 분이 오셔서 파마를 해드리려고 남편에게 파마약을 사다달라고 했더니 순순히 그러마 했어요. 바로 집 앞 가게에 다녀오는 거라 안심하고 보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날 그녀는 또 한 번 남편의 안부를 뉴스를 통해 확인했다. 서울 마포구의 치과의사 집을 털다가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는 것이었다. 첫 면회를 갔을 때 남편은 “뭔가 홀린 듯이 버스를 타고 마포로 갔으며, 어떻게 빈집에 들어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일본에서 억울하게 당했다는 말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으며 아들을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힐 거라며 자료를 모으던 남편이었기에 이은경씨는 더욱 현실을 받아들이기과 어려웠다. 죗값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3년형을 받고도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았다. 2005년 3월, 다시 남편과의 생이별이 시작됐다.
남편을 향한 울분과 원망은 가슴에 묻고
워낙 과거사를 잘 들추지 않는 조세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단다. ‘우연히 절도를 위해 저택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고가의 물건이 있을 줄 몰랐다. 자신처럼 못난 사람들과 사는 것 자체가 달라서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아원에서 자란 어린 시절과 자신을 버린 부모님 생각이 나서, 어차피 자신이 가지지 못한다면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불공평하게 사는 게 싫었던 젊은 시절 울분에 차서 저지른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게 후회스럽다’고. 그는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 붙은 ‘대도’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이 점은 이씨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여자 같았으면 남편으로부터 수십 번 도망쳤을 거라고들 해요. 남편을 만나면서 제 사업의 리듬은 다 깨졌고 죄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냈으니까요. 남편이나 아빠로서는 1백점 만점에 40점을 줄까 싶지만, 인간적으로는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결혼한 지 6년이 지났지만 부부가 함께 생활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온 이래 같이 지낸 1년의 시간이 고작이다. 결혼 후 ‘남편이 불행을 자초하면 이혼 후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그녀였지만, 신의 사람이 된 뒤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증오와 분노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교화시켜서 품으로 감싸줄까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 했다. 남편이 구속된 이후 회한과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그 감정을 글로 풀었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의류사업으로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가 화마로 인해 빈털터리가 된 뒤 단돈 3만 7천 원을 들고 상경해 공장 3개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성공한 이야기부터, 조세형과의 운명 같은 만남,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사연은 「하늘연가」라는 제목을 달고 곧 세상의 빛을 본다.
“한 달에 두 번 남편을 만나러 가면 함께 기도를 한 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이젠 남편도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힘을 실어주세요.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남편에게도 회고록을 쓰라고 권했는데 그동안 속에만 담아두었던 얘기를 풀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그분의 미래에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일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돌잔치도 치르지 못했던 아들 승진이가 올해 여덟 살이다. 유치원에 보내지 못해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는데도 교과과정을 잘 따라가서 2학년에 무난히 진급하게 되었다며 이씨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음지었다. 엄마 치마폭을 잡고 놀 나이에 포교원을 찾는 신도들에게 엄마를 빼앗긴 뒤 투정을 부리던 승진이는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차분한 성격은 아버지를 꼭 빼닮았단다.
“아이는 아빠가 거기 계신지 몰라요. 외국에 있다고 둘러댔더니 친구들에게도 아빠는 미국에 있다고 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법사의 길에 들어선 것을 절대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이은경씨는 내년 이맘때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남편을 위해서 인터뷰를 결심했다고 전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을 일이라는 체념의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 올바른 일만 행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삶을 살겠다는 부부의 약속이라는 뜻이 더욱 클 것이다. 상담료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신도가 1천여 명이 넘어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라는 그녀는 작은 의류업체를 운영하면서 포교원의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베풀고 봉사하는 삶이 남은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며 이은경씨는 가톨릭 신자 시절 자신의 세례명이 ‘데레사’였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글 / 장회정 기자 ■ 사진 / 원상희 ·이은경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