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초의 ‘담배 소송’은 배금자 변호사의 관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보수도 없는 힘든 싸움에 매달렸건만 결과는 원고 패소. 그러나 배금자 변호사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얼마나 더 긴 시간을 싸워야 할지 모르는 일에 다시금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공익과 인권을 위해 일해온 배 변호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년을 끈 담배 소송, 1심에서 패소 판결
배 변호사의 이력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승소할 것이다”라는 예측을 내놨다. 하지만 지난 1월 25일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배금자 변호사는 즉각적으로 항소를 결정했다. 배 변호사는 군산 성매매 화재 참사 소송에서 국가 배상을 이끌어냈고, 김보은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사건 등 공익 소송의 변호사로 유명하다. 이번 ‘담배 소송’으로 배 변호사는 또 한 번 공익 소송의 대표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지난 2월 6일 항소를 했습니다. 요즘은 항소 이유서를 쓰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일부 승소 판결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예상 밖의 결과라서 황당하기만 해요. 재판부가 너무나 보수적인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담배 소송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재판부에 제출할 자료부터 KT&G의 반박 자료까지 혼자서 준비해야만 했다. 이번 소송의 최대 쟁점은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가?’ ‘담배를 오랜 기간 피우면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는가?’ ‘KT&G 측이 담배의 유해성을 제대로 알렸는가?’ 등이다. 이를 알리기 위해서 해외 의학 논문과 리포트 등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수백 쪽에 이르는 자료를 스스로 수집해야만 했다. 집과 사무실은 온통 담배 소송에 관한 서류로 뒤덮일 정도였다.
배 변호사는 이번 소송을 준비하면서 담배의 유해성을 확신하게 됐다.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면서는 법정에서 만난 의사나 증인들과도 날선 토론을 벌일 정도가 됐다. 4번이나 담당 판사가 교체됐다. 배 변호사는 담당 판사가 바뀔 때마다 재판부를 설득하기 위해 증거자료를 1백 회 이상 제출해야만 했다.
“KT&G 내부에는 담배에 관련된 연구소가 있어요. 담배 연구 문건을 공개하라는 청구를 했는데, 문서를 받는 데 3년이나 걸렸어요. 사법부가 자료를 공개하라고 해도 그쪽에서 거부를 해버리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의 사법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 절실하게 느꼈죠. 그리고 세계적으로 인정된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에 대한 자료를 모두 제출했는데, 사법부는 특정 전문가의 의견만 고집을 하는 거예요. 이번 소송을 진행하면서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넘기 힘든 벽을 느꼈어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연구 결과는 무시되고, 비전문가의 증언만 채택될 때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상도 없는 공익 소송에 7년이나 발이 묶여 매달려 있어야 했던 것도 크나큰 부담이었다. 7년 동안 대형 로펌이나 법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쉽고 편하고 돈 많이 버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공익 변호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기에 그런 제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배금자 변호사는 이번 소송이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놨다고 자부한다. 예전에는 “폐암에 걸린 것은 흡연자의 잘못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데 지금은 “흡연자도 피해자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또 보람된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담배 소송은 대법원 판결까지 갈 것이다. 담배 소송에 얼마나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배 변호사는 끝까지 해볼 작정이다. 승소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억울한 사연 듣고 판사의 꿈 키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구 제일여상으로 진학했고, 초등학생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하지만 가난에 굴복하기는 싫었고, 부모에게 떳떳한 딸이 되고 싶었다. 부산대 사학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법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해 판사의 꿈을 키워갔다. 학교에 있는 고시반에 들어갈 때도 ‘여자’라는 이유로 입소를 거부당했지만, 교수를 설득해 고시반에 들어간 최초의 여대생이 되기도 했다. 졸업 후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졸업 후에는 연거푸 시험에 떨어졌다. 남편은 군대에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도 혼자만의 몫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밤새 공부를 해야만 했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서 건설회사에서 경리 일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1985년 27회 사법시험에서 합격해 1988년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판사직을 맡게 됐다. 하지만 막상 판사가 된 후에는 자신이 생각했던 판사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충격을 받았다. 남들은 모두 말렸지만, 그녀는 1년 6개월 만에 판사복을 벗어버리고 변호사로 나섰다.
“여자인데도 ‘영감’ 소리 들으면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어요. 원래 제가 생각했던 판사의 모습이 전혀 아니에요. 법원에 계속 남아 있으면 시야가 좁아질 것 같았습니다.”
배금자 변호사는 이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김보은, 김부남 사건을 시작으로 약자를 위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높이기 시작했다. ‘한미행정협정 개정위원회’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등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MBC-TV 생방송 ‘오변호사 배 변호사’라는 프로그램에 오세훈 현 서울시장과 함께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년 후 「이의 있습니다」라는 책을 펴내 우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변호사 배금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인기와 경력을 버리고 배금자 변호사는 1996년 홀연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갔다.
“정신대 문제로 UN 인권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세미나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느꼈죠. 한국이 아닌 세계무대를 상대로 뛰고 싶었어요. 남편은 농림부에서 일했는데, 다행히 미국 농무성으로 파견되어 함께 나갈 수 있었죠. 남편과 아들은 워싱턴 DC에 있었고, 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어요.”
홀로 밤을 지새우면서 공부해 3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남들은 로스쿨 졸업장만 따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배 변호사는 석사 논문까지 준비했다. 논문 주제는 ‘미국 담배 소송 이론 한국에의 적용’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담배 소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터라 배 변호사는 자연스럽게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담배 소송 변호를 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것은 곧 1998년 뉴욕 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고 싶었지만,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인권 보호와 약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익 소송을 담당했다. 2002년 7월에는 군산 대명동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하다 화재로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국가배상을 받아내기도 했다. 처음으로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국가 책임의 전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담배 소송까지, 그녀는 여전히 약자와 인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번 담배 소송으로 변호사의 한계를 절감했어요. ‘우리 법조계가 이렇게 답답하고 불합리하구나’라는 걸 생생하게 깨달았죠. 지금은 변호사보다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이제는 인류를 위해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10년 후에는 제가 한국에 없을 수도 있겠죠.”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녀의 도전이 언제쯤 빛을 보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던 꿈을 위해서 시골 소녀는 꾸준히 달렸고, 묵묵히 노력한 결과 현재는 공익을 위한 변호사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새로운 도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게 되는 이유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