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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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로 자라 수녀가 되고, 사제 서품 받기까지”


사제는 남자라는 고정관념, 이제는 버리자. 성공회에서는 10년 전부터 여성 사제를 배출해내고 있다. 최근 신학을 전공한 9명의 여성 사제에 이어 최초로 수녀 출신 사제가 탄생했다. 카타리나 오인숙 수녀다. 그를 만나기 위해 비밀스러운 수녀원의 문을 두드렸다.


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나 좀 도와줄래요?”
오인숙 수녀가 응접실 한쪽에 있는 주방에서 나를 불렀다. 둘이 들어가기 다소 좁은 공간. 그녀는 차를 타기 위해 물을 데우고, 찻잔을 꺼냈다. 물이 끓자 찻잔마다 뜨거운 물을 붓는다. 뜨거운 물이 찻잔을 데우는 동안 그녀는 재빨리 티포트를 꺼내 홍차 티백과 장미 향 홍차를 섞어 넣었다.

“이렇게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워놓아야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따뜻하게 마실 수 있어요.”
나는 한쪽에 있는 비스킷을 접시에 담아놓았다. 응접실 테이블에는 홍차가 담긴 티포트, 홍차에 넣어 먹어도 좋은 우유, 비스킷 등이 놓여졌다. 티포트는 식지 않도록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주머니를 씌어놓았다. 다소 한기가 느껴지던 응접실이 한결 따듯해졌다.

“우유를 좀 넣어야 맛있을 거예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수도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만 식사를 할 수 있었어요. 아무 때나 물도 못 마셨지.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아요. 수도원도 시대에 따라 변하거든요.”


고정관념 깨고 첫 수녀 출신 사제가 되다
성공회도, 수녀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성은 수녀, 남성은 신부라는 고정관념은 이미 10년 전 깨졌다. 오랫동안 여성이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92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사제가 되었지만, 첫 미사를 드리러 교회에 들어서자 회장은 그녀가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여성 사제에 오히려 여성들이 더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영국 성공회는 남자 사제가 5명이면, 여자 사제는 1명이 될 정도로 그 수가 늘었다.

영국에서 여성 사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도 여성 사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94년 그 제안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인숙 수녀였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저를 찾아와 제가 사제로 첫 테이프를 끊어야 다른 여성들도 사제가 될 것이 아니냐고 했어요. 여성으로서 사명감도 느꼈지만 저는 당시 수녀원을 배반할 수 없었죠. 그렇지만 ‘신부가 있는데 왜 수녀가 날뛰어?’라는 당시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회 안에서도 남존여비 사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죠.”

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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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제는 남자였는데, 왜 갑자기 여성이 하려고 하는가?’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데 오인숙은 여성이기 때문에 사제가 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신도들을 보면 여성의 비율이 훨씬 많고, 이제는 어떤 분야든 금녀의 영역이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은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도 만들고 지속적으로 교회에 요구했다. 결국 2001년 한국에도 신학대학 출신 여성 사제가 탄생했다. 오인숙의 제자였다. 이후에도 꾸준히 여성 사제가 배출되어 지금은 9명의 여성 사제가 활동하고 있다.

어느 날, 원장 수녀가 그녀를 찾았다.
“원장 수녀님은 저에게 우리 수녀원에서도 여성 사제를 만들어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진작 있어야 했는데, 정말 잘 생각하셨다고, 얼마든지 돕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수녀님이 하셔야겠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사제는 65세가 정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해야 다른 수녀들의 문도 열어주는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국내 최초로 수녀 출신 사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 수녀는 올해 67세. 이미 정년을 넘긴 나이다. 그러나 수도원 소속 사제가 되면 나이는 상관이 없었다.


전쟁고아였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어느 일간지에 실린 오인숙 수녀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읽었던 터였다. 그녀가 고아원에서 자란 영향으로 수녀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 수녀는 자신이 고아원에서 자란 경험만이 수녀가 된 이유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저는 한국전쟁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슬퍼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죠. 그렇다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오시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매는 담임과 부교감 집에서 각각 살다가 1·4 후퇴 때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만난 군인들은 자매를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데려다주었다.

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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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 보낸 시간은 아름답게 남아 있어요. 수녀님들 모두 잘해주셨고, 늘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셨어요. 밥을 하느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도 단어장을 보며 공부했고, 언니들을 도와 집안일을 하면서도 즐거웠죠. 넓은 채소밭을 지나가면 2층으로 지은 한옥이 있었는데 그곳에 살면서 어느 가정보다 풍요롭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에서 자랐죠. 오히려 누군가가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어요.”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반장에 1, 2등을 도맡았으니 남부럽지 않게 학교 생활을 했다. 그가 고아라는 사실은 담임이 가정 방문을 해서야 알 정도였다.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셔서는 제가 사는 곳이 고아원인 걸 알고는 깜짝 놀라셨어요. 다음 날 교무실에 가니 선생님들께서 제 이야기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무슨 일이 난 것처럼, ‘너 정말 부모님이 돌아가셨니? 고아원에 살아?’라고 물으셨죠. 대학을 다닐 때도 저는 스스럼없이 교수님과 친구들을 고아원으로 초대했어요. 수녀님들은 큰 `대야에 얼음과 병맥주를 채워놓으셨고, 케이크와 밭에서 난 딸기를 대접했죠. 우리는 선교사님들이 자주 오셔서 그런 대접에는 익숙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은 제가 원장 딸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더라고요.”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자 수녀가 되다
오인숙 수녀는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막연히 사회사업가가 되어서 고아들을 위해 평생 살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수녀원장에게 “수녀원에 오면 사회사업도 할 수 있고 원하는 일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뜻은 모두 반대했다.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너는 정말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수녀원에 들어가니?’ ‘지금이 16세기니…?’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동생도 ‘언니, 내가 뭐든지 다 할 테니 수녀원은 가지 마’ 하며 반대했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수녀가 되면 수도자의 이미지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개 수녀원 하면 연애에 실패해 높은 담 안에 숨어 사는 모습,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처럼 어둡고 그늘진 모습이었으니까요. 저는 화분에 담겨 있는 화초처럼 그렇게 수도 생활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의 발목을 붙잡는 이는 또 있었다. 바로 남자친구였다.

“수녀가 될 결심을 하기 전에는 남자친구도 있었고 결혼도 하고 싶었어요. 남자친구와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제가 수녀가 된다고 하니까 무척 충격을 받았나 봐요.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저를 찾아와 ‘아들이 밥도 안 먹고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우리 아들 죽으면 어떻게 하냐’며 원망을 했죠. 친구가 그렇게 나오니 좋은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국내 최초 사제가 된 수녀 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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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수녀원에는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수녀원에서는 일을 처리하러 갔다가 더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빠진다면 빠져야죠. 그게 길이라면요”라며 수도원을 나왔다. 남자친구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겠다고 했고, 결혼도 안 하고 고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거짓이라고도 했다. “평생 널 위해 기도할게. 너에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라며 남자친구를 달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수녀원에 들어간 뒤에도 남자친구는 예비 수녀가 된 그녀를 만나러 수녀원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수녀원을 찾아왔어요. 결혼하고 선교사로 외국에 나간다고 하더군요.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도 한 번 더 만났어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40년이 넘는 시간을 수녀로 살아온 오인숙. 그에게도 유혹은 많았을 법하다.
“유혹은 많았죠. 그게 삶 아닌가요. 살면서 유혹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으니까요.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고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해요. 약점을 포장하려고 하지 말고,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신부가 아닌 여성 사제로 감사성찬례(미사)를 주관하게 된 오 수녀. 첫날 미사를 드리고 나서 수녀들에게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좋은 마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니 다행이에요. 하루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런 감사성찬례를 드리고 싶어요.”
아직 소녀와 같은 순수함과 수줍음을 지닌 오 수녀와 이야기하다 보니 얼굴의 주름 이외에는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사제로,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는 일상은 오히려 그에게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수도회에서 할 일이 정말 많아요. 매일 미사가 있고, 필요한 곳에 찾아가 예배를 드려야 해요. 장애인이나 치매 노인이 살고 계신 복지단체를 찾아가 미사를 보고, 장례 예배 등 수시로 예배가 필요한 곳에 가서 미사를 보죠. 또 특수 사목, 영성 기도 모임, 예비 수도원 모임…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오랫동안 나가던 학교에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더니 지금 그만두면 학생들이 데모를 할 거라며 수업을 빼주지 않네요. 사실 학생들 만나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사제가 되어 더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진 오인숙 수녀. 그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한결같이 빛이 되어주기를!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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