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피천득 선생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차남 피수영씨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비늘잎도 연한 살결 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 피천득 ‘오월’ 중
“수필에는 서영만 등장하지만 두 아들도 사랑하셨어요”
장례식을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를 가장 가깝게 곁에서 모셔온 차남 수영씨를 만났다. 피천득은 생전에 세 남매를 두었다.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녀가 서영씨밖에 없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세영씨와 서영씨는 각각 캐나다와 미국에 살고 있고, 수영씨만이 10년 전 귀국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딸만 있지 않냐고 물어요. 우리는 나이 먹어도 ‘아빠’라고 부르고, 반말을 했어요. 그만큼 아빠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고, 서로 비밀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세 남매를 모두 사랑한다 해도 막내딸에게 더 각별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수영씨는 언젠가 동생 서영씨에게 ‘너만 딸이냐!’고 따져 물었단다. ‘너만 자식이냐!’라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 헛나온 거였다. 그 말은 들은 동생이 옳거니 하면서 ‘그래, 나만 딸이다!’라고 했다고.
“우리 셋을 모두 사랑하셨지만, 딸에 대해서는 각별하셨죠. 수필에도 나와 있듯이 일찍 여읜 어머니를 깊이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셨는데 막내가 제일 공부를 잘했으니까요.”
피 선생은 평생 어리고 작고 아름다운 것,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사랑했다.
“아버지는 위신을 세우시는 분이 아니었어요. 누구에게나 잘해주셨죠. 여자들이 집에 찾아오면 꼭 모범택시를 불러 차비를 내주셨고, 밤에는 절대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는 반포동 서른두 평 아파트에서 그 흔한 소파나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늘 미안해했다고 한다. 책 읽는 즐거움으로 살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몇 권의 책만 꽂힌 작은 책장만을 남겼다.
“일제시대, 6·25… 참 어려운 시대를 살다 가셨어요. 책이 꽤 많았는데 6·25 때 다 잃어버리시곤 몇 권의 책 이외에 소장하지 않으셨죠. 아버지는 평생 욕심 없이 사셨어요. 우리 형제들에게 늘 정직하게 살라고 당부하셨고요.”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했고, 주옥 같은 글로 남겨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는 피 선생. 그가 건강하게 97세까지 장수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삶의 철학 덕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가족들에게 웃음을 남기고
현재 아산병원 소아과 전문의로 재직 중인 피수영은 20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다 10년 전 귀국해 한국에 살고 있다. 지난 10년간 그는 의사로서, 또 아들로서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아왔으며 임종까지 지켰다.
“지난해 6월쯤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둘째 아들 시카고 대학 졸업식에도 못 갔어요. 그런데 회복이 되셔서 1년을 편안하게 잘 지내셨죠. 그러던 이번 5월, 제가 학회가 있어서 떠나기 전 찾아뵈니 약간 숨이 차셨지만 열도 없으시고 정신도 맑으셨어요. ‘아빠, 괜찮아?’했더니 아버지는 괜찮다면서 ‘학회나 잘 다녀오라’고 하셨죠. 학회에 가서도 마음이 쓰여서 자주 전화를 했는데, 어느날은 간병인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입원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곧장 귀국했죠. 그리곤 2주 동안 병간호를 했는데, 회복을 못 하셨어요. 폐렴까지 겹치고 워낙 연세가 많으셨으니까요.”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떠나기 바로 전날 숨이 차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특유의 유머로 모인 식구들을 웃기기도 했다.
고인의 소식을 접하곤 우리나라 문학계의 큰 별이 졌음에 슬퍼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건강하게 97세까지 사셨으니 호상이다 싶었다.
“호상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께서 ‘나는 100세까지 살거야’라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죠. 이제 고작 3년 남았는데 못 채우고 가셨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아직은 와 닿지 않아요. 어머니를 뵈러 반포 집에 가면 들어가기 좀 그렇더라고요. 영정도 있고, 늘 앉아 계신 의자를 보면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죠. 지난 10년간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며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했고, 아버지도 저에게 의지를 많이 하셨어요. 내게 좋은 아버지였고, 나 또한 좋은 아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왜 없겠는가. 더구나 부모를 여윈 아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교정을 걷는 것을 참 좋아하셨어요. 지난 4월 벚꽃이 만발했을 때 서울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날씨가 좀 쌀쌀했거든요. 감기에 걸리실까 봐 못 모시고 갔죠. 돌아가시고 나니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장지에 가기 전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드렸죠.”
하늘에서도 아이들을 보며 기뻐하실 것
많은 이들이 피 선생의 죽음에 슬퍼했다. 그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은 물론이고, 그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이들까지도 그의 빈소를 찾았다.
“많은 분들이 빈소를 찾아 울고 가셨죠. 특히 감동받은 건 어린 학생들이었어요. 한 번도 아버지와 만난 적이 없지만 평소 아버지의 글을 좋아하고 아버지를 존경해온 학생들이 찾아와 인사를 드리더군요. 제자들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데, 전혀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 단지 책에서 배웠다고 찾아오는 걸 보니 감동적이더군요.”
피 선생의 글은 세대를 초월할 정도의 힘을 지녔다. 지금 막 꺼내 읽어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감성, 열린 생각, 삶의 진리 등이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각계 인사들과 제자들, 독자들이 빈소에 다녀갔다. 이중 독자 한 명이 고인을 위한 뜻 깊은 선물을 통해 그를 영원히 기릴 수 있게 했다. 바로 피 선생을 꼭 닮은 동상이었다.
동상은 장례식날 그가 묻힌 모란공원에 설치되었다.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고 옆에는 미술관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삼우제에 갔다가 동상이 있는 곳에 가보았더니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좌상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계시더군요. 유치원 아이들도 많이 오는 곳이었는데, 어린이들이 몰려가서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았어요. 평생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던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도 무척 좋아하실 것 같네요.”
언론에서는 그의 서재를 다른 곳으로 옮겨 보전할 것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가 남긴 건 자그마한 책장에 몇 권의 손때 묻은 책들, 특별한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떠나는 모습 또한 피 선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원상희·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