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잠재력, 가능성 집중 해부 그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라트비아 대통령 비케 프라이베르가, 필리핀 대통령 글로리아 아로요, 뉴질랜드 총리 헬렌 클라크,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 독일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칠레 대통령 미첼 바첼렛. 세계 각국의 여성 대통령, 총리의 면면들이다. 바야흐로 여성들이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됐다.
1천3백 년 전 당나라 무측천 이후 뛰어난 재능과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은 많았지만 권좌는 허용되지 않았다. 여성이 정권에 도전해 성공한 것은 1990년대 들어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세계 약 10개국에서 여성이 최고 통치권을 갖고 있다.
미국의 2008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현재 가장 당선이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부각된 힐러리는 최초의 부부,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모멘텀을 맞고 있다. 힐러리의 당선은 세계 여성 정치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후보 박근혜 전 대표, 범여권의 한명숙 전 총리가 의욕적인 대권 행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민노당 심상정 의원, 민주당 추미애 전 의원 등도 대선 경선에 이미 뛰어든 상태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아직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차차기의 가능성이 관측되는 등 여성 최고 정치 지도자의 등장이 임박한 사안이 됐다.
여성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안 된다는 정서도 문제지만, 반대로 여성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위험하다. 여성 대통령을 둘러싼 논의는 대통령을 지향하는 여성 후보가 과연 제대로 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냉정한 관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레이디경향」에서 박근혜, 한명숙, 심상정, 추미애, 강금실 5인 여성 리더십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집중 해부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국판 철의 여인, 최강 라이벌 잡고 집권할까”
그는 사실상 대선 출정식이었던 올 신년 인사회부터 대한민국의 탈출구를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지도력, 즉 대처리즘에서 찾아왔다. 당시 박 전 대표는 “대처가 영국병을 치유했다면, 나는 한국병을 고치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한국도 이제 여성 대통령이 나올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는 것이 또한 그가 내세우는 ‘시기 도래론’이다.
박 전 대표는 누가 뭐래도 대권에 가장 근접한 여성 정치 지도자다. 운동 경기에 비유하자면 ‘준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편 조는 아직 예선 리그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경기 일정조차 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강 라이벌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같은 조에 속해 있지만 최근 지지율에 지각 변동이 생기면서 희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1952년 2월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에서 2녀 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이 되던 1961년 당시 소장이던 부친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후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18년의 청와대 생활 동안 박 전 대표는 부친의 정치적 리더십을 목도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철들기 시작할 무렵, 밥상에서 가난한 국민의 모습을 보면서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1974년 어머니를 잃고 스물두 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74년부터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1979년까지) 그는 다양한 국정 경험과 함께 국제적인 외교 감각을 터득했다. 이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조국, 민족, 국가라는 단어들이 깊이 각인됐다고 한다. 대통령을 향한 가물거리는 꿈도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박 전 대표 역시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경험과 자산을 스스로 높이 평가했다. 1979년 미국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공인 전자공학이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뜻밖에 퍼스트레이디를 맡게 됐을 때 전자공학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더 어려웠던 것이 퍼스트레이디였지만 타고난 책임감과 소명의식으로 그 역할을 오히려 즐겼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이 당시부터 꼼꼼히 기록하고 챙기는 습관이 유별났다. 박 전 대통령의 치밀함과 용의주도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성품이다. ‘추위가 빨리 온다’, ‘눈이 많이 온다’는 기상예보만 나오면 박 전 대표는 직접 청와대 담당자들을 불러 “전국을 빠짐없이 챙겨 피해가 없도록 준비하라”며 수첩에 그들의 보고를 메모하곤 했다. 요즘 그가 ‘수첩 공주’로 불리게 된 단초가 된 습관이기도 하다.
1979년 아버지마저 여의면서 박 전 대표는 삶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는다. 말수는 적어진 대신 생각은 더 깊어졌다. 정치 세계의 비정함뿐만 아니라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도 실존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정작 부친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는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유고를 처음 전했던 비서실장에게 건넨 그의 첫마디는 “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표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국가 안보가 DNA처럼 피 속에 박혀 나온 조건반사적 이야기”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1997년 11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대선 유세 지원 활동을 벌이면서 사실상 정치 활동에 입문했다. 1998년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 공식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빠진 국가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정계 입문의 변이었다. 그는 최근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10년 전 IMF 위기가 터졌을 때, 국민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제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치겠다고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다 쓰러져가는 한나라당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던 그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못다 한 두 가지를 꼭 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이며, 또 하나는 그 시절 고통받았던 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정계에 입문한 그는 초고속 정치적 성장을 거듭했다. 아버지의 후광과 지역 정서, 특히 영남 지역의 백업이 그의 약진에 큰 힘이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0년에 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하면서 당 개혁안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을 보였다. 이 기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 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을 도모하겠다는 전략과 의지를 한층 강화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전 총재가 개혁안을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2002년 후반 한나라당에 재입당한 박 전 대표는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았다.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2004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박풍’을 일으켜 1백21석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면서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로 불렸다. 이로써 ‘위기에 강한 여자 박근혜’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후광정치’를 벗어나 대선 후보로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그는 이후 2년 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5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거뒀고, 그의 재임 기간 여당 대표는 8명이 바뀌었다. 박 전 대표가 처음 대표로 취임할 당시 7%에 머물던 당 지지율이 지난해 6월 퇴임시에는 50%에 육박하게 됐다.
당시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비주류 수장격인 홍준표 의원을 당 혁신위원장에 임명해 당 개혁안을 마련하는가 하면, 지난해 5·31 지방선거 지원 유세 당시 테러를 당해 입원해 있으면서도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선거 판도를 바꾸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박 전 대표는 전후 세대 특히 신세대와 통하는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1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싸이월드’의 미니홈페이지 방문자가 6백만 명에 가깝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평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를 즐겨 부르면서 이들과 더욱 친밀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인기 관리’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박 전 대표는 붉은 옷을 좋아한다. 정책 토론회 등 중요한 행사 때마다 그는 붉은 재킷을 즐겨 입었다. 보통 피 혹은 혁명을 뜻하는 붉은색은 진보 성향의 후보가, 푸른색은 보수 성향의 후보가 좋아한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의 경우는 다소 의외라 할 수 있다.
가여워 보이던 영애(令愛)에서 강력한 여성 대선 후보로 거듭난 그에게 붉은색은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전투복’이란 애칭으로 알려진 바지 정장 차림 또한 정국의 고비 때마다 가진 중요한 기자회견이나 장외 투쟁을 할 때, 민생 현장을 방문할 때는 빼놓지 않았던 박 전 대표의 대표적인 패션이다.
“결혼은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 이미 나라와 결혼했다”는 것이 그의 결혼관이다. 사실상 독신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굳이 숨기지 않으며 가장 부러운 사람으로 ‘가족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을 꼽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 “부드러운 카리스마, 어머니의 리더십”
한명숙(62) 전 총리는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간첩사건으로 구속돼 13년간 생이별을 하고, 자신도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재야 운동권 출신이다. 작년 4월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로 지명된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럽지만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첫 여성 총리는 여성에게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을 ‘어머니의 리더십’으로 정의한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어머니의 정신 밑에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강인함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화해와 소통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결단과 용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투지와 강인함, 결단력을 어느 누구보다 확실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 시대정신으로 ‘통합’과 ‘평화’를 꼽은 뒤 “통합은 국가경쟁력, 선진화와도 직결된다”면서 “한반도와 남북평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 차기 리더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전 총리는 온화한 외모지만, 생각은 철저한 재야파에 가깝다.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공동 발의하고, 지난해 국회서 처리된 과거사법에 대해선 여당이 찬성 당론을 정했는데도 내용이 후퇴했다면서 기권할 정도였다. 당시 한 전 총리는 당 지도부였다.
1944년 평양에서 태어난 한 전 총리는 이화여대 불문과 재학 중 서울대생이던 남편 박성준씨(65·현 성공회대 교수)를 기독교 연합서클인 ‘경제복지회’에서 만났다. 4년 열애 끝에 1967년 졸업과 함께 결혼했으나, 남편은 6개월 만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한 전 총리도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간사 시절 체제 비판적인 이념 서적을 학습하고 반포한 혐의로 2년간 투옥된 경험이 있다. 당시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유신 독재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념적으로 좌경단체는 아니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 한 전 총리는 이후 여성민우회·여성단체연합 등을 이끌며 많은 여성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여성 운동의 대모(代母)’로 불리며 그의 대선 출마는 여성단체와 여성 운동계의 강력한 지지와 옹호하에 추진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계에 입문,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에 진출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았고, 경기 고양 일산갑에서 한나라당 홍사덕 전 의원을 꺾은 후 상임중앙위원에까지 올랐다. 2004년 조선일보가 실시한 17대 국회의원 인맥 조사에서는 여야 여성 의원들과 두루 친분이 있는 ‘여성 네트워크 허브(hub)’로 나타났다.
그의 사무실 캐비닛 위에는 부엉이 인형들이 가득하다. 그가 부엉이 인형을 수집하는 이유는 부엉이가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가 부엉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나자 해외 나갔다 온 지인들이 선물로 부엉이를 주기도 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부엉이를 선물했다고 한다.
사실 한 전 총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 국민의 지지율, 정치적 인지도, 그를 둘러싼 정치 환경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큰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표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확실한 비교우위를 보여줄 카드와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한 전 총리는 박 전 대표를 겨냥, “박 전 대표와 그를 둘러싼 세력이 역사를 앞으로 끌고 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국민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한 전 총리는 “박 전 대표와는 대척점을 형성하겠지만 인신공격에는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정책과 함께 시대정신을 갖고 확실하게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2세 때부터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왔다.
반면 재야 여성 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한 전 총리는 1979년 박 전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숙명적 대결이 될 수밖에 없는 구도하에 있다. 그러나 한 전 총리는 박 전 대표가 “정치적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안정감이 있고, 정치적 수업을 어려서부터 받아 훈련된 리더십을 갖췄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한 전 총리는 노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한 전 총리는 전·현직 대통령이 올해 대선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선 “솔직히 노심(盧心)과 김심(金心)이 뭘 해주겠나. 모든 사람이 노심과 김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독자생존론’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세운 원칙과 소신에 따라 뚜벅뚜벅 길을 가겠다는 얘기다.
열린우리당 일각에선 한 전 총리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우선 총리 시절 각종 국정 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한데다 당·청과 당·정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한 전 총리는 ‘4년 중임제 개헌안 발의’를 놓고 당 지도부를 설득해 노 대통령의 중재안을 수락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개헌안 발의를 철회시켰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 또한 한 전 총리에게 ‘최상의 총리’란 후덕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한 전 총리는 노 대통령이 자신을 신임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미군기지 평택 이전 건을 꼽았다.
“총리로 임명된 직후 미군기지 평택 이전으로 혼란이 많았어요. 청와대나 국방부 등에선 강경진압 쪽으로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지요. 범대위 등 주민들도 강경진압에 맞서 강경투쟁 일변도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내가 대통령에게 ‘대화와 합의를 통해서 이뤄야만 의미가 있다. 나는 대화로 풀고 싶다. 내게 기회를 달라’고 했지요. 강경진압하기로 결정한 당시 상황이 어려웠지만 대통령은 내게 기회를 줬습니다. 9개월간 노력 끝에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공들인 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전략통인 민병두 의원은 “한 전 총리는 정체되어 있는 우리의 판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며 “한 전 총리가 어떻게 판을 요동치게 하느냐에 따라 결선에 오를 수도 있고, 페이스메이커에 그칠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한 전 총리의 준비 정도와 권력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축구선수 중 브라질의 호나우디뉴 선수를 좋아한다. 꽁지머리에 덧니가 있는 호나우디뉴는 “단순히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웃으면서 그라운드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선거도 정치도 춤추듯 축제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것이 한 전 총리의 희망이다.
한 전 총리가가 작년 3월 신고한 재산은 남편 명의 아파트 두 채, 본인 명의 아파트, 상가 전세 등 모두 4억1천9백만원으로 2005년보다 5천1백만원 늘어났다. 16대 국회의원이 된 2000년 당시 신고한 재산은 1억4천4백만원이었다. 한 전 총리는 “본인과 남편의 급여를 모은 것”이라 밝혔다.
한 전 총리는 결혼 후 25년간 무려 스물여섯 번의 이사를 했다. 반지하방, 부엌도 따로 없는 옥탑방 등 셋방살이의 아픔을 서민과 함께 겪어왔다. 그는 서울에 땅 한 평 갖고 있지 않고, 주식 한 장도 없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이명박 전 시장처럼 자식을 명문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 본인과 측근의 주장이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남성 중심 세계서 단련한 철의 리더십”
심상정(48) 의원은 2004년 17대 국회를 통해 당원들이 뽑은 ‘비례대표 1번’으로 진보 정당의 첫 원내 진출을 이뤘다. 그는 첫해 의정 활동에서부터 눈부신 활약을 했다. 몇몇 언론매체가 초선 의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최고의 국회의원’으로 뽑혔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도 작년, 재작년 연거푸 여성 의원 중 의정 활동 1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를 ‘구로’에서 보낸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과격한 전력을 지녔다. 전노협 쟁의국장을 지냈을 땐 ‘인민무력부장’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유홍준씨(현 문화재청장)가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 건설 등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현대·대우 등 대공장 조합원들을 상대하는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사무처장을 연임하면서 남성 중심의 노동판에서 리더십을 키웠다. ‘철의 여인’이란 별명은 그때 얻었다.
심상정 앞에 붙는 ‘철의 여인’이란 말은 박근혜 앞에 붙는 수식어와는 그 질과 뉘앙스와 실질적 성격이 다르다. 그는 집회 반, 회의 반인 일상에 잦은 지방 출장으로 절반은 집 밖에서 보냈다. 그를 키워낸 건 8할 이상이 공장의 불빛과 투쟁의 현장이었다. 심 의원 앞에 붙는 ‘철’이란 말에는 그야말로 야전과 현장과 대장간에서 단련된 바로 그 ‘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제도권에 들어와선 ‘경제’ 분야에 전문성을 발휘,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송곳’으로 유명하다. 2005년 국정감사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파생상품 시장을 통한 정부의 외환 개입으로 1조8천억원대의 대규모 손실을 초래했다”고 지적해 잘못을 시인하게 만든 사례는 유명하다.
같은 상임위에서 활동한 김양수(한나라당), 이상민(열린우리당) 의원이 “심상정 신당이 생기면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최근 FTA 협상 과정에서도 심 의원은 날카로운 논리와 정열적인 언변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심 의원을 TV에서 처음 본 사람들은 “저런 걸출한 여자가 민노당에 있었나”란 감탄을 연발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과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함께한 손낙구 보좌관은 심 의원을 ‘무서운 아줌마’로 평가한다. 정치 입문 3년 만에 대선 후보로 발돋움할 만큼 정치인으로서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이면서도, 주변을 따뜻하게 품을 줄 안다는 것이다.
심 의원은 정부관료·경제정책 전문가들로부터 “똑똑하고 당차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 의원 지지를 선언한 단병호 의원은 “심상정이야말로 우리 당이 이번 대선에서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상품”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당 안팎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철저한 준비자세 때문이다. 심 의원은 밤을 새서라도 내용을 숙지하고 완벽하게 판단을 끝내야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이런 태도가 “심 의원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 “비판과 정책이 구체적이고 알차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심지어 권영길·노회찬 의원 지지자들한테서도 “심 의원 때문에 고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지난 3월 7일 심 의원은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3박자 경제론’을 내놓았다. ▲국내 ‘서민경제론’ ▲한반도 ‘평화경제론’ ▲동아시아 ‘호혜경제론’이 그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부터 경제자문역을 맡아온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도 ‘심상정 캠프’에 합류했다. 서울대 동기인 두 사람은 한미 FTA의 졸속 협상을 전면에서 비판해온 공통점이 있다.
심 의원이 ‘콘텐츠를 갖춘 우량주’라는 점에선 이견이 없지만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점은 극복 과제다. ‘심상정의 아줌마 경제론’을 내세워 좀 더 가까이,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는 권영길, 노회찬 의원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중적 인지도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낙관론을 피력하기도 한다.
노동운동가로서 심 의원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서울대에 입학한 다음해인 1979년에 구로공단에 취업하면서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3년 대우어패럴노조 결성, 1985년 구로동맹파업 참여,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거쳐 1990년 전노협 쟁의국장, 2000년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 2001년에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맡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게 되면서 생산의 주역인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못 받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충격이었어요.” ‘왜 노동운동을 시작했나’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다.
그렇게 시작한 노동운동. 하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뾰족구두 신고 화장을 하던 처녀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는 ‘전노협 쟁의국장’이란 무시무시한(?) 꼬리표를 달고 5백만원의 현상금이 내걸린 군사정권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지난 3월 대선 출마 선언문을 통해서도 그 비장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떨리는 가슴으로 당원 동지 여러분과 역사 앞에 섰습니다. 전태일 정신으로 달려 왔습니다. 막상 새로운 길을 나서려고 하니, 27년 전 오늘과 똑같은 떨림으로 저 자신과 시대를 마주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수배 중이던 스물두 살의 저는, 서울 명일동에 있던 한 직업훈련소에서 어렵사리 미싱사 자격증을 따냈습니다. 그 자격증을 움켜쥐고 힘껏 내달리며 외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태일 동지, 저도 이제 미싱사가 됐어요!’”
그는 올해 대통령 선거의 성격을 ‘정권교체가 아니라 시대교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의 한국사회를 “부와 가난이 세습되고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도 빼앗긴 사회”라고 진단한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보수세력과 연합해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권’이라며 이들은 우리가 싸워서 세운 민주주의를 ‘부자를 위한 민주주의’로 전락시켰다고 규정한다.
심 의원은 여성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와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는 아버지를 등에 업은 세습정치와 보수정치의 전형이며, 한명숙 전 총리는 노 대통령 밑에서 총리까지 한 분으로 실패한 정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와는 해볼 만한 상대가 될 것 같다”며 “박근혜 전 대표와 붙어 보수 대 진보의 진면목을 보이고 싶다”는 것이 심 의원의 희망이다.
대권 도전을 선언한 후 심 의원의 패션 스타일도 변하고 있다. 그동안 즐겨 입던 남색이나 회색 정장에서 주황, 연두, 파랑색으로 옮아가고 있다. 심 의원은 출마 선언 전까지만 해도 남색이이나 회색 계통 바지 혹은 투피스 정장을 즐겨 입었으나 이제는 흰색과 파란색 정장을 선호하고 있다. 구두도 검정색 일색에서 베이지색과 검정색으로, 정장에 따라 바꿔 신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
액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는 게 심 의원의 트레이드마크다. 액세서리라고는 진주가 들어 있는 실 목걸이가 전부로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이다. 특이한 점은 얼마 전까지 맨얼굴이던 심 의원이 이제 립스틱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눈 화장을 시작해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그 점에 대해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고요한 행보, 차차기 리턴매치 준비 중?”
강금실(50) 전 법무부 장관의 행보는 고요하다. 지난 3월 「서른의 당신에게」라는 책을 내고 가끔 여성 리더십 등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 나갈 뿐이다. 생활비를 마련하고, 빚을 갚고,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버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농담조로 설명하는 자신의 근황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 자체를 포기했다고 보는 것 또한 어리석은 예단이다. 오히려 그는 더욱 철저한 준비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리더십의 본령을 모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권 일각에선 “강금실은 차차기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서울 시장 선거의 낙마로 ‘정치권에 환멸을 느낄 정도로’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10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한국에서의 여성 리더십의 부상’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대학 국제학연구소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의 초청을 받아 학부와 대학원생, 교수들을 상대로 강연한 것이다.
그는 이 강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리더십의 본질을 ‘기본적인 원칙을 중시하는 행위의 총체(the whole package of respecting basic fundamentals)’로 규정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서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이해당사자를 참여시키고, 재소자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비정부기구(NGO)를 참여시킨 일은 ‘전례 없는(unprecedented)’것이었다고 자평했다. ‘낡은 조직과 인맥(old boy network)’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혁신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설정한 아젠다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소회를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검찰 조직의 하부를 구성하는 일군의 평검사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그 과업을 수행할 때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이 약점보다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토로했다. 남성 지배 조직을 개혁할 때는 오히려 여성이 적합했다는 자신감을 표명한 것이다. 작가 조선희씨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 발탁의 여성 운동사적 의미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 자신이 인정하든 부인하든 상관없이, 여성 정치세력화라는 주제 앞에서 그는 이미 어떠한 여성 정치인보다 더 정치적이고, 어떤 여성 운동가보다 더 치열한 운동가다. 그가 대한민국 첫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업적이다. 그 업적으로 그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의 보폭을 10년쯤 앞당겼다. 가령 마거릿 대처가 10년 동안 영국 총리를 했다는 것이 영국민 전체에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열 번씩 읽힌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였을 법한 것처럼 말이다.”
그 당시 강 장관은 참으로 영리했다. 그는 아마도 검찰 개혁에 반발하는 인사들이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기득권을 향유하는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검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종횡으로 연결된 학맥과 인맥을 그는 ‘Old Boy Network’라는 간결하고 멋진 영어로 표현했다.
그는 검찰 인사 원칙 중 ‘경향 교류의 원칙’을 선두에 내세웠다. 그동안 같은 검찰 조직 내에서도 따돌림당했던, 학맥과 인맥이 없는 아웃사이더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개혁의 선봉에 세우고자 했다. 그는 경향 교류 인사를 통해 이들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요직에 앉히면 개혁 작업이 자연스럽게 탄력을 받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강 전 장관의 공직자론이다. 그는 장관이든 시장이든 대통령이든 업무 수행 이상의 의미를 두는 행위를 ‘촌스러운 것’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장관직에 업무 수행 이상의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해요. 거기에 자신의 퍼스널리티를 실으면 안 된다는 거죠. 내일 당장 그만둘 수 있을 정도로 태도가 객관화돼야 해요. 내가 장관이 됐으니 무조건 오래 해보고 싶다는 태도는 촌스러운 것 아닌가요? 인기나 평가는 국민의 몫이고 나는 나대로 일하면 그만이에요. 인기가 떨어지면 할 수 없지, 내가 왜 부담을 가져야 하나요? 공직이란 것은 내 일이 아니잖아요? 국민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일 못한다는 평이 나오면 빨리 그만둬야지,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도록….”
“지금 제가 법무부 장관을 하는 것이 사회적 화제가 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여서 희소성 때문에 그런 거고, 앞으로는 여성 법무부 장관도 평범한 일상이 돼야겠지요. 그런데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고, 장관도 노력하면 잘해 나갈 수 있는 자리지만,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봐요. 제가 확신하는 것은, 나는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전후 사정 속에서 강 전 장관의 최근 ‘고요한 처신’을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로 보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그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처럼 시장바닥을 훑으며 악수 공세를 펴는 ‘표의 구걸’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다. 정치를 하려면 본인이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미소 지으며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5선, 6선 의원들도 “정치는 더럽다”고 말한다. 강금실이라면 단호하게 그런 억지 미소와 표를 구걸하는 정치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하기 싫은 일이므로 하지 않는다. 작년 5·31 지방선거 전 과정의 가치를 그가 어떻게 판단하고 내면화하고 있느냐가 향후 그의 정치 행보를 결정할 변수가 될 수도 있다.
장관은 이미 해버렸고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낙마했다. 강금실이 정계의 스타로 다시 등장하려면 고도의 묘기를 부려야 한다. 그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얻어놓은 이미지를 다치지 않고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전에 손발을 맞춰 완벽한 무대를 기획해야 한다. 강 전 장관 스스로 대권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는 이가 여권의 차기 후보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문제는 강 전 장관의 숨겨둔 개인기를 마음껏 발휘할 화려한 무대를 누가 설계하고 지휘할 수 있는가다. 당내 기반, 지역 기반이 전혀 없는 강 전 장관이 유력한 조력자의 도움 없이 중앙 정계의 스타로 다시 떠오르기란 힘든 일이다. 그 조력자는 과연 누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사람은 변한다는 세상의 이치 안에서 강 전 장관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지인들도 없지 않다. 지인은 그 이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법무부 장관 제의를 수락할 때도 저는 굉장히 놀랐다. 그런데 ‘툭’하고 자신을 밀어넣듯 장관을 한 것이다. 강 전 장관에게는 그런 면이 있다.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거고, 그런 생각을 실천할 힘이 있다. 그래서 그의 행보는 아무도 모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제는 시대가 정말 절실하게 강금실 같은 사람을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절대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범여권의 단일후보 선출 과정에서의 강 전 장관의 역할론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사람들이 있다. ‘개혁세력 재집권론’이 강 전 장관의 소명의식을 자극하고, 그가 공감하는 후보가 그의 조력을 필요로 한다면 파시미나와 숄을 걸친 그의 모습을 유세장 연단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여전히 복잡하고 전망은 불투명하다. 강금실의 마음을 모르는 그 모든 추론과 가정은 모두 헛되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추론과 가정 중 그러나 흥미로운 것도 있다. 차차기 대선이 작년 서울 시장의 리턴매치가 되리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차차기의 가장 유력한 주자 오세훈 서울 시장과 강금실 전 장관이 2012년 대선에서 다시 승패를 가릴 수 있을까. 강 전 장관에게는 그런 장기 전망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지 않는 정치적 잠재력이 있다.
추미애 민주당 전 의원 “추다르크의 깃발, 통합세력의 중심될까”
추미애(49) 전 의원은 대선 경선 출마를 이미 확정한 상태다. 그의 출마 화두는 ‘21세기 지식 경쟁력’이다. “21세기 핵심 경쟁력은 지식 경쟁력이며 이것이야말로 민주세력의 블루오션”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식기반 산업은 20세기 산업화 세력과 대립적인 세력 개념이다.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20세기 산업화 세력이 선택받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다시 한번 정치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 그의 경선 출마의 변이다. 여기서 20세기 산업화 세력이란 이명박, 박근혜로 상징되는 한나라당 세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16대에서도 무난히 당선돼 재선의원으로 활동하며 ‘여성 리더십’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특히 지난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는 서울 종로의 유세 현장에서 차기 대통령감으로 추 전 의원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노무현-정몽준’ 공조 파기를 초래했다. 유례없는 정치 드라마의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드라마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차기 대권 후보감’으로 꼽던 그는 17대 총선 직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작한 ‘노무현 탄핵 발의’에 동참하며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민주당이 배제된 것에 대한 분노가 추 전 의원으로 하여금 현직 대통령 탄핵 발의라는 정치적 실수를 유발했다.
추 전 의원은 당시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탄핵 발의에 동참하지 않았던 내가 탄핵 찬성론자들을 말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노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보고 재신임을 스스로 평가하겠다며 대국민 협박을 한 것을 보고 탄핵하지 말자고 할 수가 없었다”고 탄핵 소추 찬성으로 입장을 바꾼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또 “이른바 ‘친노’(親盧) 쪽이 더 정의롭고 민주적이고 깨끗하다면 나도 친노 쪽으로 갔을 것”이라며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정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지지세력을 분열시키고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당을 쪼개고, 부패한 것을 일찍이 눈치채 가지 않았던 것”이라며 열린우리당을 공격하고,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금을 거론하기도 했다.
추 전 의원의 별명은 ‘추다르크’다. 17대 총선에서도 그는 민주당을 위해 추다르크의 깃발을 휘둘렀다. 탄핵 발의로 위기에 처한 민주당을 구하기 위해 선대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민심 돌리기에 안간힘을 썼다. 호남지역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온몸을 던졌지만, 결과는 무참한 패배였다.
추 전 의원은 공천 물갈이를 시도했다가 이른바 ‘옥쇄 전쟁’에서 패한 후 광주에서 삼보일배에 나섰다. 3일째 되던 날 그는 5·18묘지에 도착했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탄핵 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는 광주에서 정치적 고난의 ‘절정’을 맞은 셈이다.
추 전 의원 스스로도 탄핵역풍에 밀려 지역구 선거에서 낙마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는 등 ‘잠행’을 거듭했다. 올 초까지 북핵문제에 관한 견해를 피력해왔을 뿐 국내 정치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남북관계 분야를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철저하게 경제 분야를 파고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정치 리더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내공과 훈련을 쌓았다는 후문이다.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선 것은 5월 광주에서다. 그는 지난 5월 16일 광주를 방문, 전남대에서 강연을 하고 17일에는 지지자 2백여 명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6월 22일엔 여의도 대산빌딩에 캠프 사무실을 오픈, 정책과 전략을 담당할 싱크탱크와 경선 준비팀을 곧 꾸릴 예정이다. 캠프에는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 출신 인사들이 일부 합류할 것으로 알려졌다. 팬클럽 연합체인 ‘추미애 서포터스’도 곧 발족한다.
추 전 의원이 본격적인 정치 행보의 시발을 ‘5·18’과 ‘광주’로 잡았다는 점에서 철저히 준비된 행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는 지난번 광주 방문에 앞서 “민주세력의 자존심인 광주 방문으로 저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이 시작됨을 뜻 깊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추 전 의원은 5월 전남대 강연에서 대선후보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을 맹공했다. 그는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보이자 급기야 민주세력의 자존심인 광주도 산업화 세력에 편승하라는 오만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민주세력의 가치를 털어버리고 산업화 세력에 편승하는 것은 개발독재 시대로의 역주행일 뿐이며 광주정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광주의 한을 털어버리고 희망과 번영을 이 광주에서 만들어내자. 긍정적인 사람들의 힘을 모으자”고 했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무엇보다 추 전 의원은 영남(대구) 출신이면서 호남 유권자에게 ‘가장 잘 먹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판사복을 벗고 정치권에 입문한 추 전 의원은 ‘DJ의 정치적 딸’로 불린다.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보좌했다.
이런 측면에서 호남 사람들은 추 전 의원에게 매우 강력한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다. DJ의 후광을 가장 강력하게 받고 있는 추 전 의원이 뜻하지 않게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추 전 의원은 범여권 통합 논의와 관련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는 용광로론을 펼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본인이 지지부진한 대통합 논의를 돌파할 수 있는 ‘히든카드’가 될 수도 있다.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등 범여권 주자들의 지지율이 5~8%를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후보 중심 통합론’의 중심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젊은층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데다, 지난 3년간 현실 정치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등 참신성도 갖췄다.
물론 그가 통합 논의의 전면에 나서기 위해서는 박상천 민주당 대표와의 마찰이 불가피하다. 최근 박상천 대표가 주장한 ‘중도개혁 신당의 3대 조건’이 열린우리당 측의 거센 반발을 사자, 당내에서조차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 범여권 통합을 위한 또 다른 세력화가 진행될 경우 추 전 의원의 활동 범위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추 전 의원이 박상천 대표를 제치고 다른 정당이나 정파 간 연대을 이끌어내면 최고의 몸값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열린우리당 내 친노파 쪽에서는 탄핵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초·재선들 사이에서는 추 전 의원에 대해 거부감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 기획 / 경영오 기자 ■글 / 한기홍(자유기고가)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