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역사소설 「리진」 펴낸 소설가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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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 가련한 삶을 살다간 ‘리진’을 사랑했던 지난 4년간의 고백”


신경숙이 6년 만에 발표한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모으고 있다. ‘리진’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인물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7월의 어느 날 신경숙과 함께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경복궁과 명성황후 생가 등을 함께 걸으며 리진과 조우했다.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 궁중 무희 하나가 프랑스 공사관 콜랭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나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때의 일이라지만, 조선시대 여성의 신분으로 서양 땅을 밟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는 실제 기록으로 남은 이야기다.

6년 만에 역사소설 「리진」 펴낸 소설가 신경숙

6년 만에 역사소설 「리진」 펴낸 소설가 신경숙

그러나 이 이야기가 더욱 가슴속에 남는 것은 이 여인에 관한 슬픈 결말 때문이다. 프랑스로 건너간 여인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향수병에 시달린다. 보다 못한 남편은 여인과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신분이 존재하는 봉건사회였다. 당시 기록에는 ‘궁에서 사람이 나와 그녀를 데려갔고, 콜랭은 이를 그저 지켜보았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이미 신문물에 익숙한 그녀가 다시 궁녀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건 더 힘들었다. 게다가 남편도 곁에 없었다. 삶의 희망이 사라진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금종이를 먹고 자결한 것이다. 이 가련한 여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대의 작가들은 그녀에게 ‘리심’이나 ‘리진’과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백 년 전 가련한 무희를 가슴속 깊이 담다
‘리진’이란 이름은 작가 신경숙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는 「바이올렛」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동안 「리진」은 조선일보에 「푸른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면서 그 존재가 드러났지만, 한 권의 장편소설로 묶이면서 비로소 완전한 생명력을 갖고 숨을 쉬게 되었다.

신경숙이 처음 리진과 만난 것은 4년 전. 그녀의 지인이 외국어대학교에 소장된 어느 고서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백 년 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이었는데, 한 대목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번역되어 신경숙의 손에 건네졌고, 백 년 전 이야기는 한 작가를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궁중 무희와 프랑스 공사의 사랑이라는 점이 너무 화려해서 소설의 소재로 삼기에 약간 주저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서양문물을 일찍 보고 겪은 한 여자의 이야기가 보이더군요. 불어를 몹시 잘해서 그녀가 말하면 프랑스인이라도 황홀하게 경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총명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대에 일개 궁녀였는데도 불어를 멋지게 구사할 수 있었던 여인. 지성과 관능을 겸비한 여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리진에 대한 기록에서 신경숙은 가슴 아픈 대목을 발견했다. 프랑스로 건너간 그녀가 몸이 매우 쇠약해져 ‘마치 장난으로 여자 옷을 입혀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는 대목이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몹시 후려쳤어요. 리진을 그 이야기에서 끌어내 현재에 살게 해야겠다는 욕망이 생겼죠.”
그러나 이 소설은 리진의 삶만을 다루지 않았다. 조선 말의 어수선한 역사를 안고 간다. 어머니와 같은 명성황후가 등장하고, 고뇌하는 고종이 등장하며, 일본인과 중국인이 등장해 어지러운 나라를 고스란히 그려냈다.
“처음에는 화사하고 밝은 사랑 이야기로 시작됐고 그렇게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리진을 취재하고 자료를 찾고,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이 역사를 통과한 길이 있었을 것 같았고요. 한 나라가 패망했는데 사랑 이야기만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주제는 역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6년 만에 역사소설 「리진」 펴낸 소설가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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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명성황후는 이제까지의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어린 리진을 딸과 같이 예뻐하는 모습이며, 자신의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모습 등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성과라면 성과일 터이다.

“장편소설은 그런 것 같아요. 소설 속에 옆방 화연이라는 여자를 잠깐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따라오더군요. 왕비의 경우는 처음 생각보다 훨씬 더 비중이 커졌어요. 작가로서의 연민이 발동하지 않았나 싶어요. 처음에는 그저 모녀 관계로 설정하려고 했으나, 큰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건 작품을 써가면서 알게 되었죠. 리진이 그걸 원하지 않았나 싶어요.”

‘리진’을 접하고 적잖이 놀란 부분은 그녀가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달리 처음으로 역사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는 점이었다. 역사소설이 겪게 되는 통과의례는 실제 역사와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는 비판이다. 실제로 이 소설은 A4용지 한 장 반 남짓한 분량을 바탕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 작가의 상상이 가미되었다. 강연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켰고, 실존 인물인 홍종우를 다소 치졸한 남성으로 그렸으며, 자살할 때 먹었던 ‘금종이’를 ‘불어사전’으로 바꾸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는데, 역사의식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소설로 어떤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를 재해석하기만 한다면 논문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요. 어떤 소설을 쓰든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고, 내 소설의 주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거든요. 역사가 사람들을 어떻게 내치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하고 몰아내기도 하는가. 그런 것들이 부딪치고 상응하는 모습을 그리는 거죠.”


역사 속에 빠져 지냈던 지난 4년
그녀가 썼던 이제까지의 소설을 읽어보면 여성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깊은 슬픔」 「외딴방」 「바이올렛」 또 「리진」까지. 그녀가 특별히 여성에 집중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듯하다.

“남자를 잘 모릅니다(웃음). 그것이 제 단점이기도 하죠. 여성들의 삶 속에서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 매우 큰 울림을 주기 때문에 집중하고 있어요. 사실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화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죠. 그리고 온전히 여성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지 주인공을 사랑하는 아마추어적인 면도 있고요. 소설은 결국 자기가 잘 아는 세계를 쓰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신경숙은 ‘소설은 소통의 출구’라 생각하는 듯하다. 여성성이 강한 자신의 소설을 남성들에게 보라고, 더 나아가 남성이 중심인 소설이나 연극은 여성들이 많이 보라고 권하고 있다. 서로의 생각을 읽게 된다면 융화되기도 더 쉬울 거라는 생각에서다.

“대신 내 소설 속에는 뒤로 물러난 듯싶지만 숱한 남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성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죠. 저는 여성 내면이 강한 소설을 남성들이 많이 읽기를 바랍니다.”

신경숙은 이 소설을 행복하게 작업했다고 고백한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전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으로 살려낸 리진과의 만남은 소설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6년 만에 역사소설 「리진」 펴낸 소설가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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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을 써도 다른 소설을 쓸 때보다 세 배는 더 걸렸어요. 그렇다고해서 이 소설이 세 배 훌륭한 건 아니에요. 백 년 전 이야기를 끌어내느라 계속 확인하고, 살펴봐야 했죠. 그 과정에서 당시 역사적 배경이나 상황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어요. 그럴 때는 하던 일을 밀어놓고 그 시간에 빠져 보냈습니다.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좋은 시간이었어요. 원래 소설 한 편이 끝나면 좀 허탈해지면서 쉬고 싶어지는데, 이 작품을 쓰고 나서는 더 힘이 나고 다른 작품도 더 잘 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리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대단했다. 실존 인물이지만 대부분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을 바라보는 마음은 특별한 듯하다.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벅찬 기분이 들어요. 리진이라는 인물은 잊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다시 잊혀져서는 안 되는데’ 하는 이상한 작가의식도 있고요. 그렇지만 소설의 완성은 독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이 독자의 가슴에 어떤 울림으로 남는가가 소설의 마침표가 아닐까요.”

리진과 함께한 지난 4년간, 그녀는 더 찾을 수 없는 리진에 대한 행적에 가슴 아팠고, 때로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기쁘기도 했다. 이렇듯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지난날들을 그녀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 그 역시 글 쓰는 사람으로, 누구보다 그 시끄러운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함께 글을 쓰니까 작품을 쓰다가 예민해져서 히스테리를 부려도 이해해주는 게 너무 좋아요. 글 쓰는 시기가 겹쳐 서로 예민해져 있어도 먼저 잘 이해해주는 소탈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팬이라면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일본의 문예지에 츠시마 유코와 함께 연재한 「산이 있는 집, 물이 있는 집」이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된다. 이미 지난 7월 일본에서 발매되었고, 곧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홍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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