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류은규는 25년 전 호기심으로 찾아갔던 청학동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지난 25년간 그들과 동거동락하며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냈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청학동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작가 류은규(45)가 처음 청학동을 찾은 건 정확히 25년 전인 1982년 여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스무 살. 그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희한한 기사를 발견했다. 지리산에 올랐던 어느 등산객이 산을 내려오다 이상한 마을을 발견했다는 짧은 내용의 기사였다.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사극에나 나올 법한 사람들이 지리산 깊은 산골에 모여 살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호기심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로 하고 지리산으로 떠났다.
호기심으로 찾아가 25년간 인연을 맺다
서울에서 기차와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탄 뒤, 하루에 두 번 다니는 청학동행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랐다. 청학동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에서 15시간 남짓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청학동에 매료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당시 잡지사 사진기자였던 그는 출장 일정이 끝나면 바로 청학동으로 달려가곤 했다. 일단 청학동에 찾아가면 보통 15일에서 한 달까지도 머물렀다. 당시 청학동에는 민박은커녕 식당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매번 자신이 먹을 쌀을 챙겨 가야 했다. 쌀가마니를 지고 땀을 흘리며 올라오는 그를 보고 그곳 사람들은 “돼지가 온다”고 놀리기도 했단다(지금과는 다르게 덩치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사진 촬영은 쉽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이 나간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자신들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생각한다고 기분 나빠했다. 카메라만 보면 실실 웃으며 돌을 던지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특히 여자들은 더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일단 많이 찍지 않았어요.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에는 동네 청년들하고 놀다가 나오기 전 한 컷 찍으면 그날은 성공한 거였죠. 처음에는 한 장도 못 찍고 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청학동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한심했을 거예요. 겨우 사진 한 컷 찍겠다고 하루 종일 일만 하고 돌아가다니.”
얼마나 다녔을까. 그는 제법 친구들이 생겼고,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들이 궁금해서 가게 됐다.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여기가 내 고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즈음부터는 어느 정도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됐다.
“한 번 두 번 찾아가니, 자연히 동년배 친구들이 늘어났어요. 그때부터 그곳 어른들에게 내가 ‘아들의 친구’가 된 거죠. 친구 집에 놀러간 김에 사진을 찍게 되고, 친구, 친구의 형, 친구 형의 친구, 친구의 가족 이렇게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죠. 어느 정도 사진을 찍게 되면 인화해서 선물로 나누어 주었죠. 그러다 보니 그들도 사진 찍는 일이 익숙해졌어요. 그후로는 결혼식, 장례식, 집안 대소사 때 사진을 찍어주게 됐죠.”
처음 그가 청학동을 찾았을 때는 전기나 전화도 없었고, 초가집에서 모두 서당교육만을 받고 살았다. 당연히 외지인도 없었다. 유독 총각들이 많았다. 모여서 사는 사람들이 뻔한데 양가의 아들 딸이 한번 결혼을 하면 친척이 되어버리니까 딸들은 외지로 시집을 보내고 아들들만 남아 있었다.
최근에는 청학동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매스컴을 통해 청학동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고, 방학이면 아이들이 예절교육을 받으러 서당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특수를 노려 청학동으로 이사와 서당을 여는 이들도 있었다. 민박집도 생겼고, 식당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청학동이 전입률 1위입니다. 도시 처녀들이 청학동 총각에게 곧잘 시집을 오고, 전입해서 들어오는 외지인들도 많죠. 그래서 청학동 땅값이 많이 올랐어요.”
청학동은 예전 그곳이 아니었다. 조용히 살려고 모였던 청학동 사람들은 하나 둘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도시에 정착해 서당을 열기도 했고, 더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이젠 청학동에도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고급 승용차들이 다니기도 한다. 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집이 없다. 방학이면 그곳으로 캠프를 갔던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잡음들.
그러나 류은규는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분명 많은 것이 변했고, 달라졌는데도 말이다. 그가 말하는 변하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정신, 마음이라고 한다.
“처음 청학동에 방문했을 때는 제가 가져간 쌀을 조금 나누면 먹여주고, 재워줬습니다. 친구집이나 친척집에서 하듯 말이죠. 그리고 26년이 흘렀는데,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일절 돈을 받지 않습니다. 이들이 나를 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들의 정신세계, 사상, 신념, 즉 속마음은 그대로죠.”
“옷부터가 틀리다고 봐요. 늘 한복을 입으면 한복을 입을 때 나오는 스타일이 있어요. 음식을 먹을 때는 소매부터 걷고, 한복을 입으면 앉는 폼이나 걷는 폼이 달라지죠. 한복을 입고 갓을 쓰면 몸에 밴 예의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죠. 또 그들은 지금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있지만 서당교육도 빼먹지 않아요. 기본 바탕이 한문이고, 아버지가 집안의 가풍이란 건 바꿀 수 없거든요.”
류은규는 일본공항(JAL)의 사진을 맡아서 촬영하다 한 일본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현재는 중국 남경시각예술대학 사진대학 학장과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에 머물면서도 그는 1년에 네 번 정도 청학동을 방문한다. 여전히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신비감도 사라졌을 만한데, 그는 여전히 청학동을 누비고 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죠. 내 친구들의 스무 살, 서른, 마흔 그리고 결혼 후 늘어난 식구들을 찍습니다. 얼마 전에는 청학동이 아닌 전라도 광주에 갔어요. 거처를 옮겨 서당을 하는 친구를 찍기 위해서였죠.”
그의 청학동 사랑은 이미 네 번의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올해에는 「청학, 존재하는 꿈」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했다. 이번 사진집에는 25년간 사진으로 기록된 청학동의 모습이 담겼다. 영어, 독일어, 일어, 한국어 네 개의 언어로 씌어져 올해 열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출품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