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한국건축가협회 수석 부회장이자 건축가인 이광만의 집은 집과 공간에 대한 이광만의 확고한 생각을 들어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수도산 자락이 마치 정원처럼 펼쳐진 단독주택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 산에 꽃을 심고 정성껏 가꾸는 인정 많은 부부의 집.
따스한 불빛이 우드톤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거실에 건축가 이광만과 그의 부인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인 강아지 ‘이벨’이 보인다. 천장은 서까래에서 한옥의 모티브를 따 ‘전통과 내추럴의 조합’의 감성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 꾸준히 프러포즈를 한 덕에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건축가 이광만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건축가협회 수석 부회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100대 건축 회사(2010 World Architecture Top 100)에서 국내 건축회사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에 등재된 ‘간삼건축’을 이끄는 수장이다. 그리고 디지털,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명 ‘종합예술인’이라 불리는 그가 궁금했고 더불어 그의 집, 그리고 얼마 전 자택 1층 공간을 개조해 꾸민 ‘리루미술관’이라는 갤러리 공간까지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었다.
아이패드로 직접 그린 그림이 걸린 1층 갤러리에서 건축가 이광만이 포즈를 취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디자인을 할 때 건물과 사람, 도시 풍경 등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라이트한 그레이 컬러의 외관이 눈길을 끄는 그의 집에 대한 첫인상은 따뜻하다는 느낌이다. 도시적인 그레이 컬러가 그런 느낌을 낼 수 있는 건 아마도 원목으로 마감하고 그 벽을 타고 자라 빨갛게 단풍이 진 담쟁이와 나무들 때문일 것이다. 부부와 단둘이 생활하는 2층 주거 공간에 들어섰다. 나무 소재로 바닥과 천장을 마감한 내추럴한 분위기, 온기를 더하는 노란 불빛, 잘 정돈되어 있는 가구,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소품들이 아늑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만든다. 슬쩍 둘러봐도 그의 가족에 대한 살뜰한 사랑과 정이 느껴질 정도다.
건축가 이광만이 부인에게 보낸 친필 편지. 가족과 부인에 대한 각별하고 절절한 사랑은 그 어떤 비싸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소품보다 집을 빛나게 한다.
“이 집에 이사 온 건 7년 전쯤인가? 오래된 집을 제가 직접 리모델링해 살고 있어요. 이 집에서 아들과 딸이 결혼도 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제 지나온 삶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ㄷ자 구조의 효율적인 공간 디자인이 돋보이는 주방. 좁게 느껴지지만 수납 공간을 넉넉히 두어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오순도순 살 맞대고 밥을 먹을 수 있어 더없이 정겹다고.
집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공간 분할을 위해 가족 회의를 했다. 그 결과 가족이 함께하는 거실은 넓고 큼직하게 하고 각자의 방은 최대한 작고 효율적으로 바꾸는 진정 ‘가족’만의 공간이 완성됐다. 집의 컨셉트는 ‘내추럴’. 평소 소탈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집에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공간은 거실이다. 큼직한 가죽 소파와 그가 무척 좋아하는 아이템인 벽난로로 하나의 거실이 완성됐다면 소파 뒤쪽으로는 커다란 테이블과 책장으로 가족 서재 공간을 꾸몄다.
“우리 가족은 거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아들과 딸이 모두 결혼했으니 앞으로 가족이 더 늘어나겠죠. 그때 아들과 딸, 며느리, 사위에 손주, 강아지 ‘이벨’까지 다 함께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되겠죠.”
건축가 이광만의 시간과 추억이 만든 집
거실 한쪽의 자그마한 발코니도 이 집의 자랑이다. 1층 입구는 주차장으로 사용하면서도 한쪽에 작은 정원을 만들었듯이 2층 발코니에도 꽃과 나무 화분을 키우고 있다. 선호하는 인테리어에 대해 물었을 때 “자연 그리고 한국적인 것”이라고 답한 그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공간 연출이다.
넓은 집과 달리 작고 콤팩트한 주방도 눈에 띈다.
“요즘 아파트들은 주방이 대궐만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넓은 주방이 필요 없어요. ㄷ자 구조로 싱크대와 테이블을 배치하니 요리할 때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 정말 좋아요. 식탁도 평소에는 부부만 식사하니까 작은 아일랜드 식탁이면 충분하죠. 온 가족이 다 모이면요? 거실의 큰 테이블에서 먹으면 되죠.”
(좌) 요즘 유행하는 붙박이 가구가 아니라 필요한 용도에 맞춰 여러 소가구를 두고 그 위에는 하나씩 사 모은 소품과 가족사진으로 장식했다. (우) 냉장고를 꽉 채운 마그네틱은 모두 부인혹은 가족과 함께한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이다.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인테리어 소품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의미 있는 것들이다. 시간과 추억이 만든 소품이기에 그 어떤 유명 디자이너의 신상품보다 훨씬 값어치 있게 느껴진다.
부부는 닮는다 했던가. 그의 부인 역시 겸손하고 소탈한 모습이다.
이 집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건축가 이광만의 획일화 되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컬렉션들 덕분이다. 이 컬렉션의 공통점은 모두 ‘가족’이라는 것. 벽난로 위에는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가족끼리 주고받았던 편지도 고스란히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또 그가 미국 생활 중 사용했던 자동차 번호판, 홀인원한 골프공, 가족 여행지에서 사 모은 아기자기한 기념품들 그리고 그가 언젠가는 꼭 타고 싶다는 포르셰와 페라리 자동차 미니어처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집 안을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소품들은 각자의 스토리와 의미를 담고 있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컬렉션에서 느낄 수 있듯 소품이나 가구를 고를 때도 특별한 스타일이나 취향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한국적인 것이거나 서양적인 것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있으면 된다고. 그의 거실에 놓인 전통 고가구와 블랙 컬러의 가죽 소파, 각이 지게 똑 떨어지는 미니멀한 우드 테이블 모두 다른 듯하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가족의 주거 공간을 지나 그의 사랑방인 1층과 지하 공간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유난히 친구가 많다. 지나치는 동네 주민에게도 친근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그가 완성한 집은 ‘사람 좋아하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건축가 이광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레이 컬러가 현대적이면서도 나무의 질감과 벽돌에서 정감이 느껴지는 외관. 그는 그의 집을 두고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친구가 되는 데 나이나 직업, 환경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이 어린 친구들도 있는데 젊게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즐겁게 삶을 즐기며 사는 거죠. 그래서 이런 공간도 만들게 됐어요.”
그는 요즘 ‘남자의 공간’에 관심이 많다고 덧붙인다. 남자들도 집에서 자기만의 취미생활을 즐겨야 하는데 현재 대부분의 집에는 서재 외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동안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1층과 지하 공간을 그는 물론 그의 지인 모두가 함께하는 오픈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전 오픈한 1층의 갤러리 이름은 ‘리루미술관’. ‘리루’는 그의 성인 ‘李’와 소박한 집을 뜻하는 ‘樓’를 붙인 것으로 말 그대로 ‘이씨네 집’을 뜻한다. 역시 갤러리 이름에서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갤러리 바닥은 에폭시 도장으로 마감하고 화이트 벽면과 노출 천장으로 모던하고 미니멀하게 연출했다. 여기에 포인트를 이루는 가구는 그가 직접 나무를 골라 디자인하고 제작한 내추럴한 것들이다. 지하에는 그만의 비밀 아지트가 있는데 방 한쪽에 그가 직접 나무를 구입해 만든 좌식 테이블을 두어 전통 한식 방으로 꾸몄다. 다른 한쪽은 모던하고 심플한 우드 테이블과 체어 그리고 현대적인 일러스트나 그림들을 자유롭게 벽에 장식해 서로 다른 스타일의 사랑방이 공존한다.
지하 1층의 한식으로 꾸민 다실 공간. 그가 직접 만든 테이블로 좌식 공간을 연출했다. 특히 간접조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는 커다란 펜던트를 찾을 수 없다. 스탠드나 매입등으로 조도를 조절해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낸다.
한국은행 본점, 포스코 센터 등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의 랜드마크로 일컬어지는 대형 건물을 디자인한 주인공 건축가 이광만과 그의 부인은 겸손함과 소탈함, 꾸밈없는 성품이 꼭 닮은 부부다. 또 이광만은 자신만의 멋과 감각을 부릴 줄 안다는 점이다. 그가 연출해내는 멋과 감각은 꼭 명품이나 입이 떡 벌어지는 으리으리한 공간이 아니다. 견고하고 기능적인 안경과 슈즈, 백, 적당히 트렌디하면서도 실용적이며 고급스러움과 예의를 갖춘 세미 캐주얼 룩을 고수한다. 여기에 우리네 전통적인 한국식 인테리어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으면서도 아이패드에 열광하며 업무와 놀이를 함께하는 라이프스타일 등이 그가 연출해내는 그만의 멋이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소셜 네트워크 통해 다양한 친구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한편 부인과 자녀, 지인들에게는 직접 그리고 쓰고 직인을 새긴 편지나 연하장 보내기를 즐기는 소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아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하니 ‘트렌디’하다기보다는 인생을 즐긴다는 표현이 맞겠다.
“갤러리도 꼭 비싸고 가치 있는 작품들만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작품이나 소소한 그림들도 함께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전시한 그림들 역시 제가 아이패드 캐드(CAD) 프로그램으로 그린 건데 재미있죠?”
지하 1층의 모던하게 꾸민 오픈 공간. 야트막한 천장 덕분에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한 기분이 든다.
일부 사람들 중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욕심이 커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꼭 필요하지 않아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경 쓰고 몸에 맞지 않아도 화려하게 멋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나만의 진정한 가치’가 곧 멋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멋이란 자연스러움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람, 추억,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의 집 역시 그를 꼭 닮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집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부탁했다.
“집, 즉 공간은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공간은 그저 공간일 뿐이죠. 장소가 된다는 건 공간에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의미와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과 시간으로 공간을 채워라’라는 뜻의 ‘간삼’의 의미, 또 제 건축 철학도 그렇죠. 세월이 흐르면서 말끔했던 벽돌이 색이 바래고 사이사이에 이끼가 끼게 되는데 새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가족과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 바로 집입니다.”
■진행 / 김민정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