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도방’의 이정표는 민가와 인적이 끊긴 한적한 숲길로 향해 있었다. 숲 속 외딴 집이라 하여 적막강산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뛰놀 법한 야생동물들을 흙으로 빚어 정원에 풀어놓고, 총천연색 도자 그림을 집 외벽에 휘감아놓은 부곡도방은 천변만화하는 신상호 작가의 작품 색을 반영하듯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며 들끓어 오르는 별천지다.

1·2·3·4 부곡도방의 드넓은 정원을 수놓은 도예가 신상호씨의 작품들.
가령 건축을 전공하지도 않은 안주인이 창문 크기까지 꼼꼼히 계산해 손수 모눈종이 위에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을 그려가며 설계했다는 안채, 한밤중에만 울어대는 갓난아기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민한 아티스트 아빠가 홧김에 뚝딱 지어냈다는 사랑채의 건축 비화는 각각 감동과 웃음을 호출하는 코드다. 30여 년 전, 초보 아빠의 도피처 기능을 담당했던 사랑채는 이제 지인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다. 이용객들이 주로 외국 친구들인 만큼 한국의 전통미를 느낄 수 있도록 꾸민 것이 특징이다.
“집이란 살면서 필요에 따라 더 나은 방향으로 고치기도 하고, 모양도 내는 겁니다. 집주인이 자신에게 맞게끔 공간을 활용하고 점유해야지, 으리으리하게 지어놓은 집에 종속돼 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허물고, 짓고, 보태는 과정을 더해 삶의 공간을 점유해나가고 있는 도예가 신상호씨.
부곡도방의 건물들은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지어지고 꾸며진 것이 특징이다. 허물고 다시 지은 것도 있고, 이미 지어진 집에 필요한 공간을 보태고 덧대 확장시킨 것도 있다. 그는 이를 ‘달아냈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를테면 채광을 위해 온실 같은 테라스를 달아내고, 수납할 공간이 필요해 방 하나를 달아냈다는 것이다. 살면서 조각보처럼 기우고 덧댄 집 안 곳곳엔 가족의 역사와 추억이 담겨 있다. 배냇저고리에서 웨딩드레스에 이르는 딸들의 성장사와 엄마이자 여자인 아내의 꿈, 가장이자 예술가인 그의 열정이 초록색 창문과 벽난로, 주방의 시렁과 서까래 하나하나에 오롯이 배어들었다고나 할까.
주인의 동선에 맞춤 제작된 집은 천편일률적인 공간 구성과 가구 배치를 거부한다. 가령 거실과 똑같은 평수에 집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공간을 차지한 안채의 부엌은 안주인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또 소파와 텔레비전의 공식을 거부한 거실은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한다. 한때는 부곡도방의 거실에도 응접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단다. 한데 어느 날, ‘집 안의 가장 비싼 스페이스에 잘 앉지도 않는 비대한 소파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 당장 들어냈다는 것. 눈 뜨면 작업하고 해 지면 잠드는 그에게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일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터. 소파를 없앤 거실엔 긴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다. 식구들이 사용하는 식탁은 주방에 있으므로 이 테이블은 평상시엔 책을 얼마든지 늘어놓고 펼칠 수 있는 책상이 되기도 하고, 손님이 방문할 땐 여러 사람 함께할 수 있는 넉넉한 식탁이 되기도 한다.

서재 한쪽에 놓인 이국적인 작품.
날마다 새로워야 하는 숙명
입체와 평면을 넘나들며 과감한 컬러를 구사하는 그이지만 시작은 청자, 백자류의 전통 도자기였다. 그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고, 원하는 만큼 부와 명예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점에서 돌연 전통도예를 내려놓고 실험과 모험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천을 떠나 장흥에 터를 잡고 부곡도방을 일구게 된 사연인즉 그러하다.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칠까?’ 생각할 만큼, 한동안 아프리카에 꽂혀 있었다. 원시 자연의 생명력을 간직한 아프리카 예술에서 현대미술의 한계를 극복할 해답을 보았던 까닭이다. 초원을 누비는 동물들을 빚어내고 주술적일 만큼 화려한 원색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아프리카를 여행하고부터였다. 기실 그에게 컬러란 곧 언어다.

1·2·3 안채에 장식된 수집품과 소품. 아기자기하면서도 오랜 세월의 멋이 느껴진다.
흙과 불에 뿌리를 두었을 뿐 도자와 회화, 도자와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에 매진하는 그를 두고 누군가는 ‘현대도예의 거장’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도예계의 이단자’라 폄훼하기도 한다. 하기야 청자, 백자를 잘 만들다가 별안간 컬러풀한 동물 두상을 들고 나왔으니 놀랄 만도 했을 터. 하지만 그는 세간의 평가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쉼 없이 작업하고, 작업 중의 깨달음을 좇아 천변만화할 뿐. 지루한 동어 반복은 작가로서 그가 가장 경계하는 태도이며, 늘 새로워야 한다는 건 그가 가진 유일한 강박이다.

4 벽돌 위에 알록달록한 색감의 타일로 포인트를 살린 안채 외관. 5 기다란 테이블을 놓고 벽난로까지 설치하니 운치 있는 거실이 완성됐다. 6 전통적인 분위기로 꾸민 사랑채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있다. 7 그의 수집품인 빈티지 트랜지스터라디오는 거실 한쪽에서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사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도 그 덕분에 탄생했다. 애초에 김해시청이 분청도자박물관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을 그의 제안으로 전혀 새로운 미술관이 됐다는 것. 미술관의 설립 단계부터 참여한 그는 김해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해미술관 외에도 서울 신문로의 금호아시아나 사옥과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의 외벽을 장식한 구운 그림은 눈부신 색채감으로 건물의 표정은 물론 도시의 풍경을 바꾸어놓는 데도 톡톡히 한몫을 한다. 그림을 외벽에 건다는, 건축물에 옷을 입힌다는 발랄한 상상력이 이룬 쾌거인 셈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감의 타일로 마감한 갤러리 외관.
그의 작품 세계처럼 37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 부곡도방이지만, 처음과 다름없는 한 가지는 여전히 이웃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숲 속의 외딴집이란 것이다. 이 외딴집에 철저히 은둔하기 위해 6년 전 홍대 미대 학장을 지내던 중 홀연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살면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로 정년을 채우지 않고 일찍 은퇴한 것을 꼽는다. 은퇴 이후의 삶이 계획대로 풍요로운 까닭이며, 그 원천은 단연코 ‘작업’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초대전과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준비로 지난여름을 누구보다 뜨겁게 지내온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내년 6월로 예정된 금호미술관 초대전을 준비 중이다. 그의 전시는 언제나 ‘최근작’이다. 이전에 작업했던 작품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지루함을 못 견디는 그의 성격상 불가능한 까닭이다. 머릿속엔 온통 새로운 미적 자극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생각뿐. 자려고 누웠다가도 작품 생각에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내내 작업 중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변화무쌍에 예측불허’라고도 하지만, 쉼 없는 작업으로 달려온 작가의 삶을 보면 이처럼 지독한 한 우물도 없지 싶다.

2·3·4 갤러리에서는 자연 채광을 받아 더욱 강렬한 색감을 발산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진행 / 고우정(프리랜서)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