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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향한 여행 - 해남 땅끝마을
느닷없이 불어온 찬바람에 내몰리듯 길을 떠났다. 겨울에도 초목이 마르지 않고 벌레가 움츠리지 않는 땅.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땅끝에서 마주한 바다는 진한 가을볕 아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전라남도 해남에는 땅끝마을이 있다. 한반도 최남단. 육지로 치면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며 삼천리금수강산의 시작점이자 끝점이기도 하다. 여행객들에겐 스쳐가는 계절의 여운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 안은 들판에는 계절을 잊은 들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옹기종기 작은 섬들이 머리를 내민 앞바다는 아침저녁으로 색을 바꾸며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끝. 지리학적 위치가 주는 명백한 정의는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끝을 보기 위해, 누군가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매년 수많은 발자국들이 땅끝에 선다.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 반. 해남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달리면 땅끝마을에 다다른다. 터미널에 도착해 땅끝으... -
부산 대룡마을 - 예술가들이 사랑한 동네
떠들썩했던 여름이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계절의 끝자락을 거머쥐고 선 어느 날, 부산 대룡마을을 찾았다. 예술의 향취와 정겨운 풍경이 흐르는 조용한 시골 마을, 하늘은 파랬고 바람은 선선했다.부산 해운대에서 울산 방향으로 14번 국도에 몸을 싣고 30분쯤 달리다 보면 ‘대룡마을’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 나타난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오리. 공예가와 도예가, 조각가 등 젊은 예술인 13명이 둥지를 튼 예술 창작촌이다. 낮은 담장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선 오솔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분주했던 여름의 소란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알록달록 마을을 수놓은 벽화와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조형물, 시골 풍경 속 있는 듯 없는 듯 몸을 숨긴 예술 작품들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속으로 즐거운 여행이 시작된다.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곳곳에 체험 가능한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마을지도가 방문객을 맞는다. 농가와 작업실이 한데 모여 있는 대룡마을에서는 야생화 체... -
혼자여도 좋을 골목 탐방 - 연희동 산책
마른 날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장마가 쉬는 틈을 타 벼르던 연희동 산책에 나섰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사이 작은 카페들과 갤러리를 둘러보며 사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내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히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짬뽕 드시러 가세요?” 해가 머리꼭대기에 선 점심시간, 택시에 올라탄 손님이 연희동을 외치자 택시 운전사가 묻는다. 유서 깊은 중국음식점들이 많은 곳,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부촌, 흔히들 ‘연희동’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다. 1970년대 초부터 주택가로 개발되기 시작한 연희동은 기독교 계통의 대학교들이 인근에 있어 교수와 선교사, 외국인들과 정치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비슷한 시기 명동에서 한성화교학교가 옮겨오며 작은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는 이 평범한 주택가에 요즘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작은 골목길 따라 하나 둘씩 문을 연 카페들과 문화 공간들 때문이다.연희삼거리에서 좌회전, 연희동 우체국에서 사... -
바다가 보이는 벽화마을 - 묵호 논골마을
바다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허니, 성난 파도가 고깃배를 삼키고 거센 바람에 한 칸 살림이 무너져도 원망할 것이 없다. 동해시 묵호동 산중턱, 짙은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앉은 논골마을에는 뱃사람들의 고단하지만 소박한 희망이 빛나고 있다.파란하늘에 뻥 뚫린 바다가 보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비 소식에 마른 날을 골라 묵호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청량리역에서 묵호역까지는 기차로 5시간 30분이 걸린다. 아침 7시에 출발한 첫차는 해가 머리꼭대기에 섰을 때쯤 조용한 바닷가마을에 여행객들을 내려놓았다. 시원한 물회 한 그릇은 갈증과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논골마을은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여느 바닷가마을이 그렇듯 바다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다. 붉고 푸른 지붕들이 낮은 담장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작은 골목길이 아슬아슬 언덕을 타고 있는 이곳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연합... -
신당창작아케이드- 시장 안 비밀스러운 놀이터
신당동엔 떡볶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파가 오고가는 중앙시장, 붐비는 발걸음 아래로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이 숨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시장과 예술 공방의 재미있는 공존이 펼쳐진 그곳, 신당창작아케 이드로 나들이를 떠났다.서울 신당동 중앙시장 입구. 신당창작아케이드가 펼쳐진 지하상가로 들어가는 길에는 세 개의 이름표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신당창작아케이드’와 ‘신당지하쇼핑센터’, 그리고 ‘회센터’ 간판이다. 간판이 말해주듯 중앙시장 지하상가에는 예술가들의 작업 공방이 모여 있는 창작아케이드도 있고 쇼핑센터도 있으며 횟집도 있다. 한 자리에 그려 넣기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공간들이지만 아래로 향하는 입구를 따라 지하상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다. 알록달록 물고기들이 그려진 횟집들과 깜찍한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각종 표지판들, 사진과 그림, 조각 공예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 공방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휘영청 형광등 불빛만이 길을 비추는 ... -
도심 속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연희문학창작촌
5월, 볕이 좋은 날을 골라 연희동을 찾았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연희동 주택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연희문학창작촌이다. 서울의 한가운데, 숲으로 둘러싸인 문인들의 창작터. 사락사락 원고지 위 연필이 길을 내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특별한 일 없이 소란하고 바쁜 나날이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봄비 때문인지,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인지, 계절과 계절 사이를 오가며 어디론가 향하는 마음을 붙잡다 문득 생각난 곳이 연희문학창작촌이다. 몇 해 전 겨울, 눈 쌓인 언덕을 지키던 소나무 숲이 지금쯤 푸르러졌겠다 싶었다. 소나무와 감나무, 밤나무 등 과실수 숲으로 둘러싸인 연희문학창작촌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있던 곳이다. 시사편찬위원회가 이전한 뒤 한동안 비어 있던 공간은 몇 번의 민간 매각 고비를 넘어 작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하는 전원형 문학촌으로 태어났다. 2009년 11월 문을 연 후 신달자, 은희경, 윤대녕 등 60여 명의 문인들이... -
군산, 잠든 시간을 거닐다
금강과 서해를 끼고 있는 군산은 호남의 비옥한 평야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일제강점기의 가슴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근현대사의 아픔이 유물처럼 남아 있는 곳. 바래진 역사의 뒤안길을 4월, 봄볕 아래 거닐었다.여행은 ‘짬뽕’에서 시작되었다. 꽤 여러 명에게서 군산에 참 맛있는 짬뽕집이 있다고 들었던 것이 왜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던 날 불쑥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군산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은 곳이기도 하고, 영화 ‘타짜’에서 고니가 화투짝 수련을 하던 평경장네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실보다는 오래된 영화나 소설 속에 존재할 법한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풍경, 낡고 이국적인 건물들을 휘감아 도는 골목길엔 쉬 지워지지 않을 100여 년 전의 시간들이 얽혀 있었다.군산시에서 개발하고 있는 구불길은 군산과 맞닿은 강과 바다, 내륙을 함께 거닐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지난해 완성된 비단강길과 햇빛길, 큰들길, 구술뫼길에 이어 올해엔 물... -
바다와 숲이 있는 길! 인천 월미공원 봄 산책
3월 초까지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하루아침에 사그라져버렸다.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에 유난히 추웠던 겨울은 저만치 멀어지고 들뜬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대문을 나설 듯 서성인다. 인천으로 떠난 봄 산책. 월미공원에서 내려다본 인천 앞바다는 봄볕을 한껏 머금은 채 눈이 부셨다.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옷깃을 파고들던 바람이 부드럽게 무뎌지고 온기를 듬뿍 담은 햇살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어디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들뜬 마음을 재촉하는 봄기운에 문득 떠오른 곳이 인천 월미도다. 발걸음은 어느새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미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섬이 반달의 꼬리처럼 길게 휘어져 있다 하여 이름 붙은 월미도(月尾島)는 인천의 관광을 상징하는 명소이자 서울 근교의 나들이 코스로 친숙한 곳이다. 흔히들 ‘월미도’ 하면 DJ의 입담으로 유명한 월미놀이동산과 조개구이집들이 길게 늘어선 인천 앞바다를 떠올리지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책... -
여유로움을 거닐다 - 합정역 카페 골목
젊음의 열기가 가득한 밤문화로 대표되는 홍대에는 밤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낮이 존재한다. 번잡한 홍대 중심부를 비껴 상수역과 합정역 부근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조용한 주택가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카페들은 20, 30대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또 다른 홍대의 일상을 그려내는 중이다. 그 중 합정역 카페 골목은 한적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매력을 가졌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도 들를 수 있는 곳이다.홍대’에는 무엇이든 있다. 카페나 밥집은 말할 것도 없고 쇼핑센터, 영화관, 클럽까지.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누리고 즐길 수 있다. 무엇이든 있는 홍대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여유’다. 조용한 일상의 여유를 찾는 이들은 포화 상태에 이른 홍대를 벗어나 ‘홍대 옆 동네’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합정역 ‘솔내길’도 그 중 하나다. 합정역 5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첫번째 골목에서 몇 발짝을 내려오면 왼쪽으로 홍대주... -
차곡차곡 시간이 쌓인 동네 광명시 철산4동
광명시 철산4동은 뉴타운 개발로 사라져가는 오래된 동네다. 고여 있는 시간을 찾아 나선 길. 도덕산 기슭을 밟고 서 있는 그곳은 겨울의 한가운데 눈 내리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도시의 몇 남지 않은 달동네를 찾아 지하철 7호선 철산역을 나서니 불쑥, 도심 한가운데 발걸음이 토해졌다. 대형 쇼핑몰과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 병풍처럼 둘러선 고층 아파트 사이에서 정신이 멍해져버렸다. 여느 도심과 다르지 않은 풍경에 당황한 것도 잠시, 시선을 위로 옮기니 산기슭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작은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맞은편에 보이는 약국 옆 작은 골목을 타고 올라가 부동산을 끼고 화장품 가게를 지나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골목을 파고드니 기우뚱, 운동화 앞코가 고개를 든다. 몇 번의 오르막을 넘었을까. ‘철산동 프로젝트’라는 안내판이 문패처럼 방문객을 맞이한다.‘철산동 프로젝트’는 2006년 문화관광부와 공공미술 추진위원회가 공동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다. 홍익대 미대생들과 20여 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