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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
가슴속에 사랑하는 이가 없다봄바람이 내 스카프를 흔든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렸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발길도 가뿐했다. 아이들은 환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부드럽게 부푸는 꿈 향기가 났다.아이들은 금세 나를 앞질러 지나갔다. 아이들 뒤로 펼쳐진 풍경. 늘 보는 하늘이고, 나무고, 구름이지만, 단 한 번밖에 못 볼 듯이 아껴가며 보았다. 이 길이 내 몸의 일부가 돼 거리의 사랑과 고독, 그 모든 것을 노래하고 싶다.그러나 어쩐지 허전한 감이 있다. 인생은 과자처럼 쉽게 부스러지고 금세 녹아버리며, 시간은 어김없이 서글픔을 남긴다. 최근에 나는 내 인생의 중간 점검일 산문집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을 냈다. 공들인 만큼 마음에 들어서 구름 위를 걷듯이 뭉실뭉실 가슴이 따스하다. 정말 기분이 좋다. 그래도 아주 ‘2그램’ 정도 남는 서글픔이 뭘까 생각했다. 내 책에 아래와 같이 썼다.간간이 커피 향이 내 존재감을 일깨우듯, 문득 바람이나 음악이 내 텅 빈 가슴을 훑... -
영화감독 신이수의 ‘뽁싱’에 관한 이야기
“옘마, 샌드백 때리면 당연히 때려지짐마. 그게 거기에 있으니까 당연히 때려진다고. 샌드백 칠 때랑 똑같이 허공에 끊어칠 줄 모르면 말짱 소용없는 거얌마. 뽁씽은 무조껀 뎀비는 게 아냠 마. 길거리 개싸움에 없는 게 있어야 뽁씽이라고, 알아들어? 알아들었으면 샌드백 그만 때리고 가서 섀도복싱이나 더 햄마.”3일 만에 도장에 나와 속죄의 샌드백 치기를 하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1999년 국가대표 선발전 1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출전에 빛나는 서울 마포구 ‘A뽁싱클럽’ P 관장이 다가와 은근슬쩍 칭찬도 나무람도 아닌 애정 섞인 놀림을 늘어놓는다. 그게 거기에 있으니 당연히 때려진다니….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표현을 감히 빌려 ‘뽁씽의 시적 상태’라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은, 뽁씽(Boxing)에 대해서다. 그러자면 비탈리 클리츠코(우크라이나 출신 권투선수로 WBC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다. 2005년 정계에 입문해 정치 활동을 펼치... -
작가 김경의 죽어버린 사랑을 부활시키며
인류학자 프랑코 라 세클라가 쓴 「이별의 기술」이라는 책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사랑에 진정한 종말은 없다는 것, 종말 그 자체도 사랑의 한 순간이며, 언제나 열려 있어서 다시 시작할 수도, 꿈꿀 수도, 체험할 수도 있어야 한다’. 지나간 내 사랑의 연대기를 다시 애틋하게 돌아보며 생애 첫 번째 연애소설을 쓰고 있는 요즈음 내게는 마치 첫눈처럼 다가오는 말이다.사랑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변해간다. 그것은 계절과 비슷하다. 마치 생명처럼 봄이 돼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고, 여름의 태양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가을이 돼 색깔과 온도가 변하고, 겨울이 돼 덧없이 죽어버리기도 한다.사랑이 죽어버린 그해 겨울을 떠올리고 있다. 자기 스스로 죽어버린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죽인 거였다. 정확히 나의 이기심과 교만함이 사랑을 질식사시켜버렸다.“결혼은 딴 여자랑 해. 나랑은 그냥 연애만 하다 끝내고. 난 너랑 결혼해서 행복할 자신이 없다. 답답해서 도망칠 궁리만 하다가 바람을 피울지... -
시인 박준의 취향의 탄생
생각해보면 나는 환경이 바뀌는 일에 유난히 민감해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흘러도 집에 있는 가구들의 배치를 바꾸는 법이 거의 없고, 매일 저녁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꼭 같은 곳에 주차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교환학생이며 해외연수며 하는 이름들로 멀리 떠났지만 나는 늘 빈 강의실과 한적해진 도서관과 학교 앞 술집들을 지켰다.일찍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새 학기만 되면 나는 으레 말수가 적고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 있었고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유치원 문턱에도 가지 못한 아이가 바로 나였다.유년을 보낸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이야기도 조금 하고 싶다. 서울의 변두리 동네답게 군사보호지역에 개발제한구역, 거기에 북한산국립공원으로 묶여 있던 곳이었다. 다른 서울 동네에 비해 집값이 만만했던 터라 가난한 어머니와 가난한 아버지는 이곳에 자신들의 집을 구할 수 있었고,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나 20년을 내리 살았다.앞... -
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서효인 시인은 이달 「레이디경향」 독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로 지나간 겨울의 기억들을 꺼내보았다. 캠퍼스 가득 쌓인 눈이 깔아놓은 둘만의 흰 양탄자 위에 누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의 음성을 듣던 어느 날,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취해 있던 코 끝 시린 행복.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뭉텅뭉텅 흘러 아내의 배 속 아이까지 세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지켜주면서 곧 함께 눈 맞춤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지난겨울의 설렘을 떠올려봤다. 이 이야기는 지난 2월 15일 세상에 내려온 서 시인의 예쁜 딸이 태어나기 전 그 시점으로 돌아가, 가만가만 쓴 모양이었다. (편집자 주)아가야, 너를 기다리는 겨울이야. 이번 눈은 명동의 트리처럼 많이 내려. 아빠의 작은 차는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했단다. 차가 조금 컸다면 동네 어귀에 있는 애꿎은 전봇대나 남의 집 착한 담벼락에 닿았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빠는 차에서 튀어나와 타이어를 발로 차며 겨울이 내려보낸 하얗고... -
소설가 박솔뫼의 뜨개질하는 시간들
뜨개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뜨개질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상관없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이야기하자면 뜨개질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하는 것에 관해 쓰고 싶었다. 그럼에도 왠지 시작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유는 뜨개질의 세계는 내가 뭐라고 쓰기에 무척 넓고 깊었고 내가 알거나 할 줄 아는 것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뜨개질에 관해서라면 아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지하철을 타도 아무렇지 않게 어려운 뜨기를 손도 안 보고 하는 사람들을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되고, 당장 어머니만 해도 어릴 때 눈으로 배워 혼자서 옷을 여러 벌 떴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다. 아마 어머니 또래의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뭐랄까, 나는 이제 뜨개질이라는 바다에 발만 담그고 있는 정도인데 ‘뭐라고 쓸 수 있을까’, ‘써도 되려나’, 뭐 그런 생각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뜨개질에 관해 무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강하게 품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작년... -
시인 김소연의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사랑에 대한 질문 하나
사랑, 이라는 말을 ‘설렘, 두근거림, 반함’ 같은 말로 곧바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종족처럼 보였다. 내가 혹여라도 그런 사람과 사랑하게 될까 봐 경계했다. 설렘과 두근거림과 반함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나도 실은 얼마나 그게 좋은가. 그러나 설렘과 두근거림과 반함은 한순간의 일이고, 설렘이 성장하여 든든함이 되고 두근거림이 성장하여 애틋함이 되고 반함이 성장하여 믿음이 되는 시간의 순례를 함께 겪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례는 또 얼마나 가혹한가. 그 여정에서 겪는 무수한 오해와 격심한 허탈과 지난한 다툼은 또 얼마나 처절한가. 그렇게나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까지 해서 누려야 하는 게 사랑이라면 누가 맨 처음 사랑을 시작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다 알면서도, 굳은 결의처럼 시작한 사랑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랑의 편을 들고 싶었다. 그런 사랑을 해서, 비록 그 끝에서, 지울 ... -
소설가 김미월의 어느 날 시화전에 갔다
소설가가 된 이후로 사람들에게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어릴 때부터 꿈이 작가였나요?” “언제부터 소설을 썼나요?”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번번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할 때를 놓치곤 했다. 어느 시인은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됐느냐”라는 질문에 “당신은 언제부터 김치를 먹었는지 기억하느냐”라고 대답했다던데, 나는 기억이 안 나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대답하려고 하면 왠지 막막해져서 그랬다.참으로 싱겁고 시시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처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동화책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통해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매혹적인지 깨닫게 됐으니까. 책을 읽다 보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면서 어느 틈엔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책과 나만이 남은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때의 희열이란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의 달콤함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여 나는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노상 동화... -
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자주 길을 나섰다. 그리고 오래도록 낯선 길을 걸었다. 가슴속 어디쯤이 허전해서이기도 했고 이유 없이 술렁거리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두려움 없이 잘 걷다가도 가끔 내 안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생각 없이 걷다가도 끝내 생각이 무거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면서. 모든 것은 그렇게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민하던 일도 삶도 사랑도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자주 그것을 찾으러 밖으로 걸었다. 걷다가 보면 다가오는 모든 풍경 속에서 좋은 인연이 돼 힘을 얻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불안함에 더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은 나와 멀리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많았으므로 나는 자주 길을 나섰다. 마치 행복이라는 것이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다른 곳에 매달린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나는 나를 사랑한 적 없으니... -
소설가 전민식의 세상 물정이라는 거, 하늘의 뜻이라는 거
다들 잘들 계시죠? 요즘 들어 나이를 얼마 먹지 않았는데도 인생 뭐 별거 있냐라는 생각도 들고, 영화를 보다가 남들은 웃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어느 땐 생각에도 없던 감상이 떠올라 날밤을 새기도 하네요. 시간이 흐르며 이런 지질한 생각들이 확장되는 건, 늦게 결혼한 탓일 수도 있고 불혹을 넘긴 후에 자식을 얻은 덕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철도 들지 않았는데 그저 세월을 자꾸 먹은 탓이겠지요. 세상이 수상한 걸 수상하지 않은 척 느끼며 살아온 벌일지도 모릅니다.하루는 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남은 쌀을 박박 긁어 압력밥솥에 담아놓은 후 넋 놓고 있자니 텔레비전이 저 혼자 떠들어대던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수상한 세상을 욕하기 위해 광화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고요. 누군가는 먼저 간 사람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남은 사람들이 반성해야 한다며 어깨를 들썩이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저 자리에 나가 초 하나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