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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꽃 진 자리 서러운 날엔
제천의 명소들은 스스로 슬픔을 치유한다. 고갯마루에 깃든 애달픈 전설은 국민 애창곡으로, 순교자의 붉은 피는 푸른 숲으로 부활하는 식이다. 눈앞이 환했던 자리마다 이별이 발생하는 봄날. 꽃 시절을 보내는 설움은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신록의 숲길을 걷는 것으로 갈음할 일이다.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달에 해당하는 절기부터 짚어보곤 한다. 농군도 아니면서 식구와 친구 생일보다 먼저 태양의 운행 주기를 살피는 이유는 순전히 24절기의 명칭이 예뻐서다. 봄이 선다든가 개구리가 깨어난다든가 하는 말들. 시 구절처럼, 포춘 쿠키 속 행운의 메시지처럼 풀어지는 이름들이 좋아서다.24절기 중 특히 설레는 이름은 봄철에 몰려 있다. 그중에서도 청명(淸明)과 곡우(穀雨)를 품은 4월이 으뜸이다. 청명은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맑고 밝아지는 듯하여, 곡우는 연푸른 햇차 맛이 떠돌아 좋다. 곡우 전후에 딴 찻잎으로 덖은 우전 때문이리라. 봄비는 자분자분, 참으로 곡진하게도 오신다. 백... -
전남 구례&경남 하동 섬진화서(蟾津花序)
무르녹은 꽃 시절, 유순한 섬진강 줄기가 곁을 내어준 마을은 산수유마을이나 매화마을 같은 꽃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골짝 저 골짝 뭉글뭉글 꽃 대궐이라, 꽃그늘 아래 앉아서도 강 건너 꽃구경이 일이다. 꽃길 순례에 밭은 일정은 예의가 아닌 바. 홀리는 대로 걷다가 마음 머무는 자리에 멈춰 가만히 바라볼 일이다. 피는 꽃과 지는 꽃을, 낱낱의 이별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흐를 뿐인 강물을. 유정도 무정도 아닌 아득하고 무한한 서사를.이즈음 남도의 꽃 소식은 ‘꽃몸살’이니 ‘꽃멀미’니 ‘꽃사태’니 하는 제목을 달고 전해진다. ‘꽃-’을 떼고 보면 하등 좋을 것도 없는 몸살과 멀미와 사태가, ‘꽃-’을 만나 별안간 환해진다. ‘꽃차례’란 단어를 처음 봤을 때도 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표현인 줄 알았다. 잔설을 떨친 가지마다 이제는 꽃차례라는 건가 보다, 바야흐로 만개하는 시절, 꽃 세상이라는 뜻인가 보다 했다. 북풍한설이 물러나며 ‘꽃, 네 차례야-’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
강화도- 붉은 연꽃 질 무렵, 아득히 그리운 당신이 지나갔다
산과 바다, 갯벌을 두루 품어 낚시며 등산이며 즐길거리가 쏠쏠한 강화도엔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길이 숱하다. 선사시대 돌무덤부터 조선 왕의 첫사랑까지, 역사의 면면이 깃든 길 위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빙어를 낚으러 갔다가 붉은 연꽃 같은 절집의 우련한 잔영만 품고 돌아왔건만 빈손이 아쉽지 않았다.빙어 낚시를 목적 삼아 떠난 여행이었건만 저수지 앞에서 차를 돌려 나왔다. 얼음 두께가 기준치 이하라 저수지 입장이 불가능하다 했다. 견지대를 위, 아래로 톡- 톡- 들었다 놨다…. 글로 익힌 ‘겨울 호수의 요정을 유인하는 기술’은 써먹어볼 기회도 없었다. 손가락만 한 물고기를 낚겠다고 손바닥만 한 얼음 구멍 앞에서 종일토록 묵상하는 건 애당초 내 취향이 아니었노라, 애써 미련을 갈무리했다.관광지도를 펼치니, 국내에서 다섯 번째 큰 섬이라는 강화는 생각보다 넓고 갈 곳도 많았다. 산과 바다, 갯벌을 고루 품고 있는데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널려 있어 ‘지붕... -
강원도 평창 - 겨울 강(冬江)에 갔다
동강을 앞마당 삼은 문희마을은 고적했다. 심심산골과 섬마을이 외로움을 겨룬다면, 아마도 겨울엔 산골이 우세할 것이다. 나룻배 한 척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노를 저어 얼음을 깨며 물길을 내는 배는 더디지만 조금씩 가까워졌다. 시야를 흐리는 물안개가 소리마저 지우는 것인지, 작은 쇄빙선은 기척도 없이 얼음을 갈랐다. 파르스름한 새벽빛에 길게 누운 동강의 첫인상은 ‘동쪽 강(東江)’이 아닌 ‘겨울 강(冬江)’이었다.얇아 짐이 되지 않고, 아무 쪽이나 펼쳐 한두 장이건 서너 장이건 틈틈이 읽을 수 있는 시집은 여행 중 ‘쪽독서’에 가장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하여 여행 가방을 챙길 때면 시집을 꽂아둔 책장 앞에서 서성이게 되는데, 선택의 기준은 대개 그 즈음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거나 여행지와 어울리는 분위기의 제목이다.평창행을 준비하며 김사인 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꺼내든 이유는 전자에 해당한다. 최근 가장 많이 만지작거렸던 시집이고, 여럿이 술을 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