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1 00:00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 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은 자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옵니다다녀왔습니다#1마포대교인지, 성산대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알려고만 하면 지금이라도 알 수 있는 이름인데 굳이 알아보지 않은 것은 그 다리를 어떤 특정한 이름으로 가둬놓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멋진 여행 엽서의 사진 같던 그 다리의 풍경이 흔해 빠진 도시의 지명이 되는...
2009.06.01 00:00#1시를 읽으며 사랑하는 이와 처음 손잡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지금일까, 아닐까’ 수만 번 생각의 뒤척임을 지나 손을 뻗어 그/그녀에게 다가갈 때, 온몸의 세포가 손으로 모여드는 것만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눈과 귀와 심장이 손끝으로 전이되고 머릿속 온갖 생각들도 한 곳으로 수렴된다. 이 때 손은 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란 ‘눈과 코와 입이, 손과 발과 몸이, 얼굴과 머리와 몸통이, 그리고 피부와 심장이 전부 다 당신을 향해 두근대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몸은 그렇게 ‘내’가 되고 ‘사랑’이 된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좇는 듯 보이지만, 사실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몸이 하는 말에 대해 귀 기울이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눈으로 보여지는, 냄새로 느껴지는 각각의 감각들이 흩어졌다 만났다 헤어지면서 감정과 추억을 빚어내는 것. 솔직하게 요동치는 온몸의 설렘과 진동을 느낄 때면 ‘당...
2009.05.01 00:00#1오랜만에 내려간 집에서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모서리가 둥그렇게 닳은 사진 속 엄마는 스물두 살이었다. 남자친구들도 있고 지금도 만나는 대학 동기 아줌마도 옆에 계신 걸 보니 MT 사진쯤 되나 보다. 어디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어깨 너머로 강인지 호수인지가 넓게 펼쳐진 야외에 앉아 엄마는 기타를 들고 웃고 있었다. 엄마가 기타를 칠 줄 알았던가. 아니, 엄마도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꽃놀이를 가고 여름이면 친구들과 계곡으로 물놀이를 하러 다녔었던가. 스물두 살 엄마는 소매가 봉긋한 반팔 셔츠에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앞머리를 올려 왼쪽으로 핀을 꽂은 모습이 낯이 익다. 요즘 부쩍 엄마와 밖에 나가면 ‘딸이 엄마를 쏙 빼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지금의 나와 머리 모양이 똑같은 스물두 살 엄마를 보니 꽤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입고 있는 셔츠는 작년에 내게 선물해주신 하늘색 블라우스와 닮았다. 그 때 엄마는 “옷도 유행...
2009.04.01 00:00조용한 시선으로 자연의 진정성을, 그늘진 곳을 바라보는 신용목 시인은 2000년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외 4편이 「작가세계」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 시대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가는 젊은 시인으로 손꼽힌다. 시작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에 재학 중이다. 삶의 지난 흔적들을 거슬러 올라 바람의 언어를 담아내는 시를 쓴다. 시집으로는 모 에어컨 CF 카피로도 쓰였던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 지성사)와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창작과 비평사)가 있다. #1 최근 한동안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살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음에 쏙 들면서 조건도 좋은 그런 집을 아직 찾지 못했다. 드넓은 서울 땅 위에 세워진 수많은 칸막이 속에 내 한 몸 편히 뉘일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이사를 나가기로 결정한 이상, 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집도 이제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왠지 모...
2009.03.01 00:00“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사랑을 생각하게 되지요. 아직은 저릿한 찬바람에도 꽃이 피었다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봄입니다”#1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우리나라에서는 ‘춘희’로 알려져 있다)’의 원작 제목은 ‘동백꽃 부인’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동백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던 날, 알프레도에게 마음을 연 비올레타는 자신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 동백꽃을 가슴에서 떼어 그에게 건네며 “이 꽃이 시들 때쯤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정열의 장미도, 순수의 백합도 아닌 동백꽃에 약속을 실어 전한 것은 이들이 결코 함께 영원할 수 없음을 뜻한다. 하루 만에 시들어버리는 동백꽃은 바로 다음날 연인을 만나게 해주지만 빨갛게 멍든 꽃잎처럼 두 사람의 마음에 핏빛 생채기를 남겼다. #2 매서운 북풍을 이겨내고 먼저 봄을 알리려 피어나는 동백꽃.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
2009.02.01 00:00‘끊임없이 집을 삼키며, 집을 부수며, 폐허의 집터에서 한 채의 집을 복원하려 드는’ 시인 이정록은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농부일기’가,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에 ‘아이들에게’와 ‘감자꽃이 피기 전에 북을 돋워주세요’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혈거시대’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가 자신의 좌우명이라며 여유도 부리지만 온 세상을 시와 글로 채울 수 있을 만큼 부지런히 물갈퀴를 놀리는 글쟁이다.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1994)를 비롯해 「의자」(2006)까지 다섯 권의 시집과 「귀신골 송사리」 등의 동화집을 냈다. 현재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한문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1어렸을 적, 우리 집 안방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흔들의자가 있었다. TV에 나오는 부자 회장님 댁 거실에나 어울릴 법한 모양의 커다란 원목 흔들의자였다. 벽난로 온기가 전해지는 널따란 거실은커녕 살림살이가 쌓인 비좁은 방 가운데 ‘주제도 모르고’ ...
2009.01.01 00:00“누군가가 되어보고, 무엇인가가 되어보는 과정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 몰라요. 차이는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겹침’의 순간에 공감하는 마음을 담을 때, 내 삶도 온전해지는 것 같아요”#1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을 사귀는 일이 힘들어진다. 뭐든 자꾸만 반복하면 쉬워진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누군가와 친해지는 능력은 탄력성 좋은 고무줄처럼 거듭되는 경험에도 늘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이는 없는데 그나마 함께였(다고 생각되)던 이들은 대륙이동을 하는 판처럼 멀어지기만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영 밑지는 장사지 싶다. 지난해를 돌아보면 참 많은 이들이 나의 삶에 미세한 균열을 남겼다. 심장을 죌 듯 깊숙이 들어왔던 누군가는 썰물처럼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얼굴만 쓰다듬고 떠난 이도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나로부터 뒷걸음질 쳐 제자리로 돌아가게 만들었을까. 아니, 나는 왜 내 섬 안에만 갇혀 있었던 걸까. #2사람들은 보통 ‘비슷한 점이...
2008.12.01 00:00송승환 시인은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나사’ 외 4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 시적인 것으로 풀어낼 것인지를 고민하며 시를 쓴다. 변화와 지속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즐기는 듯 보인다. 최근에는 국문학과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며, 두 번째 시집 준비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2005년「현대문학」에 신인 추천 평론 부문에 등단한 뒤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존재하고 있는 주변 사물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하고 살았으면 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연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1 친구와 쌈지 스페이스를 찾았다. 보통 전시장은 입구를 열어놓는 편인데, 이곳은 문이 닫혀 있다. 들어가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자동문인 것 같은데 열리지 않는다. 망설이다가 한 발 물러서니까 문이 스르륵 열린다. 열린 틈으로 얼른 몸을 들이밀고 보니 문 모양도 좀 이상하다. 안은 더 이상했다. 휑한 그곳에는 똑같이 생긴 문 다섯 개가...
2008.11.01 00:00“삶이라는 것이, 매일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향기에 가까운 것 같아요. 훅 끼쳐오면서 같이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금방 사라져버리는”#1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어제를 살았던 ‘나’와 오늘의 ‘나’는 아주 사소하지만 조금은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것을 내 자신이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아주 미묘하지만 내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뭔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면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낯설어진다. 나는 이미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고, 한 번 흘러가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순간은 ‘찰나’다. 미끄러지듯 번져서 막연히 아스라한 확신만 남는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다.#2 의지를 갖고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일에 대한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있다. 도약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낯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달라지는 ...
2008.10.01 00:00“살아가면서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죠. 거기서 느껴지는 슬픔과 십오 초 동안 마주해보세요”#1 어두운 방 한쪽에서 여자는 아이에게 죽을 떠먹이고 있다. 남편이 들어와 불을 켜자 화면은 긴 터널 속을 빠져나온 듯 비로소 빛이 스며든다. 멍한 남편의 표정을 뒤로하고 아내는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쥔 채 편지를 받아 읽는다. 그러고는 다시 편지를 내려두고 아이에게 계속 죽을 먹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저장해둔 듯한 표정, 울음을 미뤄두고 아이의 입에 죽을 밀어 넣던 그녀의 그 오묘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계속되던 그 장면이 바로 내가 영화 ‘비정성시’를 기억하는 이유다. 그리고 가끔 마음 한구석에서 이 영화를 불러내 조용히 이름을 읊조려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마저 비장한, 가늠할 수 없는 그 슬픈 깊이 때문에. 짧은 시간이 흘렀다. #2 살아간다는 것이 죄스러울 때가 있다. 피붙이의 죽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