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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초월한 아름다움 - 금동관음보살입상
통통한 얼굴형에 눈은 크고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코와 입은 오밀조밀 작은 편이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고, 전체적인 표정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친근한 인상을 풍긴다. 이것이 현존하는 금동불 가운데 가장 여성미가 뛰어나다는 금동관음보살입상의 모습이다.무녀인가, 보살인가보살이란 분명 ‘석가의 가르침을 깨달은 구도자’ 중 하나일 텐데 관음보살상은 마치 춤추는 무녀(舞女)를 보는 듯 조각이 섬세하고 유려하다. 머리에는 삼면이 장식된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정면에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장식물이 유난히 크고 뚜렷하게 만들어져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볼드한’ 목걸이 장신구는 지금 보아도 잡지 화보에서나 쓸 수 있는 무척이나 화려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착용한 의상 또한 신체를 따라 물결 형태로 흐르듯 걸쳐져 아름답고 우아하다. 곱게 쥔 손의 곡선과 잘록한 허리선은 참으로 섬약해 보인다.여기서 드는 의문! 그럼 관음보살은 여성이란 말인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
(11) 탐스럽고 예쁜 달이 좋아, 백자 달항아리
예부터 우리는 보름달을 보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염원을 빌었다. 둥글고 큰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가진 우리 조상은 달을 그대로 본떠 항아리를 만들었다. 발을 굴러 작동시키는 수동식 물레로 원형에 가깝도록 둥글게 말아 올리는 달항아리의 제작 과정은 매우 까다로웠을 것이다. 실패를 거듭해도 둥글게, 더욱 동그랗게 만들고 싶었던 갈망. 소원 성취로 가는 한 걸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무늬 한 점 없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울까둥글둥글 토실토실한 모양, 투명한 우윳빛 유약이 마치 보름달을 연상시킨다. 화려하지 않지만 후덕하고 정감 있는 모습이 화려한 청자, 청화백자와 달리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도자기다. 달항아리는 대부분 경기도 광주 분원과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됐다. 조선시대 반가에서 쓰던 생활자기로 19세기에 접어들 때는 조금 길쭉한 것, 작은 것 등 모양도 천차만별로 웬만한 가정에서는 한두 개씩 놓고 썼다. 그래서 비교적 많은 숫자가 남아 있긴 하지만 명품 달항아리 가치의 척... -
조선, 푸른빛에 반하다 청화백자
중국 원나라에서 시작된 청화백자의 열풍은 한국, 일본을 건너 유럽까지 퍼졌다. 18, 19세기에 걸쳐 최고의 ‘하이테크’로 인정받았고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세계가 푸른 빛에 물들어갈 때 당시 조선의 청화백자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을까?왕실 미의식의 정수, 청화백자조선 청화백자는 세계 청화백자 역사상 중국에 이어 매우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 또 19세기 후반까지 왕실의 주도하에 그 수준과 취향을 일관되게 투영했던 것이 특징이다. 중국, 일본, 유럽의 청화백자가 세계 경제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것에 비해, 조선 청화백자는 무역품이었던 적이 없고 순수하게 조선왕실과 사대부, 문인 지식층, 부유층들이 향유하는 문화였던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조선왕조에서 그릇은 큰 의미를 지녔다. 왕실이 관리하는 가마인 관요(경기도 광주)가 따로 있어 철저히 왕실에서 쓸 그릇만을 제작했다. 관요는 사옹원(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의 분원... -
(9) 백옥 피부에 대한 열망, 박가분
국산 화장품 매장에는 늘 외국 관광객들로 붐빈다. 한류 붐과 품질을 앞세운 우리나라 화장품이 아시아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박가분이다.최초의 브랜드 화장품박가분(朴家粉)은 1920년 공산품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브랜드 화장품이다. 글자 그대로 ‘박씨가 만든 분’이란 뜻이다. 박씨는 박승직이란 인물로 현 두산그룹의 창업주 박두병의 선친이기도 하다. 박가분이 나오기 전에는 여성들은 분꽃의 열매나 쌀가루로 백분을 만들어 각자 써왔다. 한 노파가 직접 백분을 만들어 포장해 파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은 박승직은 공장형 가내수공업으로 10여 명의 아낙을 모아 백분을 만들고 공산품으로 팔기 시작했다. 종이 상자 위에 ‘朴家粉’이라 표기해 브랜드의 가치를 넣기도 했다.박가분은 원래 가루 형태는 아니었다. 3mm 정도 두께에 바둑판 모양의 작은 고형 조각들로 이뤄졌다. 한 조각씩 떼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이나 기름을 떨어뜨... -
(8) The Power of Color 철화 기법
예전에는 ‘색’이란 참 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인공 안료가 흔하디흔한 시대가 됐지만 과거에는 색이란 모두 자연에서 일일이 얻어야 했다. 그러므로 과거 예술가들은 그 어딘가에서 새로운 색을 ‘발견’해내려 꽤나 애를 썼을 것이다. 무른 도자기와 철이 만나 산화되면 붉은색을 띤다는 철화 기법, 그 창시자는 어느 예술가 겸 과학자였을까?치명적인 그녀, The Red순백자 위에 철화로 찍은 붉은 점 하나는 마치 분대화장으로 꽃단장한 기녀처럼 유혹적이다. 또 청자를 바탕삼은 활달한 검붉은 철화 장식은 안료의 농담으로 수묵화의 풍취도 느낄 수 있다. 빠른 붓질과 소탈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문양으로 기운생동한 멋과 흥취를 자아낸다.철화란 산화철(FeO) 혹은 제이산화철(Fe₂O₃)을 점토와 유약을 혼합해 분쇄·정제 과정을 거친 뒤 이를 붓으로 찍어 자기 위에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이때 자기는 초벌구이 한 것을 사용하는데, 이 위에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구우면 문양을 그린 부분... -
(7) 청화백자의 멋, 코발트 블루 이야기
한국 전통문화의 백미, 도자 예술. 그 안에서도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도자기라면 단연 청화백자다. 물감인 코발트는 바닷바람 같은 시원한 청명감을 주는 동시에 뽀얀 순백색과 만나면 그 여백을 살려 돋보이게 하는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조선 청화백자 특유의 청백의 조화는 주변 나라의 것과 달리 도안과 발색이 과하지 않다. 그래서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맛이 있다.‘여백의 미’의 유래‘코발트’라는 푸른 물감의 원료는 이슬람권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산 넘고 물 건너’ 온 만큼 비싸고 귀한 것은 당연했고 매우 아껴 써야 했다. 그러니 숙달된 화공만이 코발트를 만질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 전해오는 청화백자 도안이 하나같이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중국의 청화백자처럼 발색이나 모양이 화려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꽉꽉 채우는 면이 아닌 가느다란 선 위주로 도안을 넣어야 했고 자연스레 여백을 최대한 살리는 절제된 도안이 나와야 했다... -
(6) 도공의 대담한 솜씨 분청사기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분청사기란 도자기가 있었다. 회색 태토(胎土) 위에 맑게 거른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 문양을 그려 넣고 유약을 발라 구운 조선 초기 도자기다. 1백50년의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하얀 분장 위에 대담하게 그려진 문양은 그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청자, 백자 아닌…조선 초인 15세기부터 유행했던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백토와 회청색 유약을 발라 ‘마치 분장(扮裝)을 한 것처럼 꾸몄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분청사기는 청자처럼 맑은 빛깔과 유려한 자태를 뽐내거나 백자처럼 단아하고 세련된 품격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도공들의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기질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도자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도공들은 분청사기에 마음대로 나름의 창조적인 조형미를 그려낼 수 있었다. 특별히 넣어야 할, 혹은 넣지 말아야 할 문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분청사기에는 청자, 백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추상 혹은 반추상의... -
(5) 화려한 흙, 토기
2천 년 전 태초의 흙과 불로 그릇을 만드는 영민함은 누구에게서 나온 걸까? 토기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유롭게, 본격적으로 장식을 더하기 시작한 때가 삼국시대부터다. 특히 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의 미에 섬세한 조각으로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그것은 마치 기적처럼토기는 청자나 백자에 비해 수집가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기물이다. 외형이 투박하고 거칠다는 이유에서 또 재질이 약해 보존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토기는 과연 외면받아 마땅한 기물일까? 나뭇잎이나 나무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던 구석기시대를 지나 인간은 마침내 그릇을 발명한다. 진흙과 불이 만나면 단단한 물질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음식은 물론 깨끗한 물을 담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인간은 거대한 도구의 역사를 써내려간 것이다. 이런 토기가 1천 년, 2천 년의 세월을 견뎌 어느 한 곳 깨진 데 없이 고스란히 우리 곁에 있다면, 그것... -
(4) 하얀 떡살 위에 새겨진 소원
떡살은 떡본 혹은 떡손, 병형(餠型)이라고도 한다. 떡살은 누르는 면에 음각 혹은 양각의 문양이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문양이 아름답게 남는다. 사용하는 방법은 적절한 크기로 썰어낸 채 식지 않은 떡에 참기름을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살박이를 한다. 선조들은 이 떡살의 문양에 길흉화복의 염원을 담아냈다.작은 예술품 ‘떡살’ 이야기무명 앞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소쿠리를 들고 앞뜰과 후원을 오가며 바삐 움직인다. ‘쿵떡~ 쿵떡~’ 떡메는 남자들의 몫이다. 동네 아이들은 우렁찬 떡메 소리에 일찌감치 몰려와 옹기종기 앉아 군침을 삼킨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떡은 잔칫날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의미 있는 날을 맞은 주인공을 축복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떡을 만들었다. 그러니 살박이는 미적 요소도 있었겠지만 소원을 담아내는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떡살은 잔칫날의 성격에 따라 사용하는 문양도 달랐다. 아이의 백일에는 기쁨을 의미하는 물고기를, 혼인에는 부부... -
(3) 이도다완, 일본 국보가 되다
직경 15cm, 높이 약 9cm. 그릇의 굽은 사람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높고 구연부가 밖으로 눕지 않아 차를 마시면 옆으로 새지 않는다. 바닥은 달걀이 세워질 정도로 움푹하게 들어가 말차 거품을 내기 쉽다. 크기에 비해 가벼워 찻잔으로 더없이 좋다. 일본이 더 사랑했던 우리의 백자 사발, 이도다완. 그 숨겨진 이야기를 전한다.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이란 찻잔은 우리나라 조선 초기 백자 사발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인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으로 그 전까지 ‘막 사용한다’라는 의미로 ‘막사발’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 문화의 정수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 초기의 모든 사발이 이도다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도다완은 진주 지역 지리산 자락 부근에서 만든 사발로 다른 지역의 것보다 직경이 2cm가량 적어 그 크기와 무게가 찻잔으로 쓰기 매우 적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사용하면 할수록 찻물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