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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에 대한 확신
평소 오 변호사의 팬이 아닌 독자라도 이달은 이 칼럼을 꼭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그 어떤 대단한 자기계발서보다 가치 있는 귀한 깨달음이 담긴 지상 강연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편집자 주)오늘 청주 복대중학교에 강연을 다녀왔다. 가보니 나 말고도 교사, 경찰관, 소방관, 소설가, 기업인 등 강연할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 직업을 물어보고 숫자가 많이 나온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각각 섭외한 것이었다. 법조인을 선택한 학생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2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난 성장기에 굉장히 소심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우더니, 전날 텔레비전에서 본 ‘전설의 고향’ 줄거리를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평소 성적은 좋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내 성격을 한번 바꿔보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난 한마디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끝내는 선생님도 포기했다.내가 ... -
초보 도시 농부, 제대로 한 방 먹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강풍이 창문을 마구 뒤흔들던 그날, 태풍 볼라벤이 충청도를 지난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문득 오 변호사네 밭 걱정을 했었는데 말이다. 찢겨진 비닐하우스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어서 툭툭 털고 행복한 가을걷이를 하길 바라본다. 정성을 듬뿍 받고 자란 농작물이니만큼 회복도 빠르리라. (편집자 주)올해는 지난봄에 지은 비닐하우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작년엔 베어낸 참깨를 비를 피해 말릴 곳이 없어 세워놓은 채로 그 위에 비닐을 덮었는데, 그 비닐이 비바람에 날아가면 참깨가 비를 쫄딱 맞곤 했다.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마음이 불안했다. 평일 낮에는 직장에 가야 하는 도시 농부라 주로 새벽에 밭에 가는데, 참깨를 털라치면 내려앉은 이슬 때문에 쉽지 않았다. 올해는 비닐하우스가 이 같은 고민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참깨는 비나 이슬에 구애받지 않고 잘 마르고, 비가 오는 날에도 참깨를 털 수 있게 됐다.갓 베어낸 참깨를 털다 보면 참... -
자급자족의 기쁨
초가지붕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누렇게 무르익고 있는 호박을 보니 스윽 미소가 지어진다. 결실의 계절이라는 말이 와 닿는 가을의 초입이다. 지난봄, 여름의 기운을 그대로 담은 빨간 고추와 방울토마토까지,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편집자 주)농부의 정성을 먹고 자란다올핸 텃밭농사가 꽤 잘되고 있다. 전에는 애를 먹었던 고추나 방울토마토도 괜찮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더니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밭에 들락거린 보람이 있다.고추는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키우기가 매우 어렵다. 바로 옆에서 농사를 짓는 장인어른도 다른 작물에는 농약을 치지 않지만 고추는 어쩔 수 없다며 농약을 뿌린다. 짧지만 내 경험으로도 그동안 고추에 농약을 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풋고추를 조금 따 먹은 뒤 장마철이 닥치면 내가 키우던 고추는 영락없이 시들면서 병이 들곤 했다. 고추가 빨갛게 익는 것을 보기가 힘들었다.그런데 올해는 지금까지 하나도 죽지 않고 빨간 고추를 만들어... -
야생과의 싸움? 아니, 조화
오랜만에 감자를 삶았다. 보기 좋게 툭 터진 껍질 사이로 포슬포슬 뽀얀 속살을 드러낸 햇감자 하나를 호호 불어가며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아, 기분 좋은 포만감! 텃밭에서 길러낸 햇감자, 마늘, 풋고추가 담긴 오원근 변호사의 택배 상자를 여는 순간, 이달의 행복은 시작됐다. (편집자 주)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을 시작했다. 자연 상태에서의 채집과 수렵에서 나아가 자신들이 먹을 것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야생 동물에 비해 우월적인 위치에 올라선 인류는 점차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배와 수탈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붙으면서 확대됐고, 지금은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제 인간의 손길이 뻗은 곳에서는 자연을 쉽사리 찾을 수 없다. ‘놀이를 위해’ 4대강을 따라 난 자전거도로가 그것에 깔린 자연을 능가하는 가치물로 대접받는 세상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앞으로 더 심해질 ... -
어디서나 잘 쓰일 수 있는 사람들
그저 숨만 쉬어도 땀이 난다. 눅눅한 공기는 불쾌지수를 고조시키고, 냉방병 탓인지 뼈마디까지 욱신거리는 듯한 여름이다. 이 계절을 가장 생산적으로 보내는 이들이 바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아닐까. 조화로운 성장이 있어 보람된 오 변호사의 소담스러운 텃밭, 이 글을 통해 마음으로나마 ‘나누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편집자 주)얼마 전 백일출가 동기행자님들이 내가 사는 청주에서 모였다. 난 3년 전 검사 사직 후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출가해 100일간 행자 생활을 했다. 모두 20여 명이 회향했는데 이번 모임에는 10명이 왔다. 서울은 물론 멀리 창원, 부산, 대구에서도 올라왔다. 100일간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경쟁했던 도반들에 대한 그리움이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게 한 것이리라. 회향 후 두 번째 모임이다. 구성원은 다양하다. 대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환갑을 몇 해 남기지 않은 분들도 있다. 나이 차가 아무리 많이 나더라도 ... -
생태뒷간 짓기
지난달 심은 씨감자에서 잎과 줄기가 많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반갑다. 오원근 변호사의 밭에 이달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태뒷간을 짓는다는 것, 어렵지만 그만큼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일 게다. (편집자 주)난 오래전부터 인분을 퇴비화하는 데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언젠가 꼭 농사를 지으리라 마음먹었던 차에 검사 시절인 2005년 8월 전북 부안에 있는 변산공동체학교에 3박 4일간 머물면서 농사일을 했다. 그때 인분을 퇴비로 만들어 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인분을 퇴비로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똥과 오줌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 둘이 섞이면 냄새가 많이 나고 구더기가 생긴다. 이렇게 분리한 뒤 대변에 톱밥이나 왕겨 같은 것으로 덮어주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효된다. 그렇게 1, 2년 정도 묵히면 퇴비로 쓸 수 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퇴비장에 쌓인 인분 퇴비를 하루 종일 뒤집어주는 일을 했는데 약간 ... -
도구로부터의 자유
유난히 더디 온 올 봄, 도심에서는 꽃망울이 언제 터지느냐를 두고 봄의 시작을 가늠하고 있었는데, 부지런한 오 변호사는 벌써 감자를 심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온 가족이 함께 파쟁기를 이용해 밭일을 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다음달에는 또 어떤 변화와 성장이 있을지,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편집자 주)사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은 인식과 행동의 영역을 크게 넓히면서 다른 생명체들을 압도하는 만물의 영장이 됐다. 이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최근 300여 년간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런 흐름의 속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흔히들 과학기술(도구)은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왜일까? 인간은 틀림없는 생명체인데 그 생명이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고도화된 도구에 예속되기 시... -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나온다
봄나물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은 물론 기력까지 회복시켜주는 귀한 식품이다. 오 변호사의 손에 들린 냉이는 그렇게 겨우내 꽁꽁 얼었던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더딜지언정 봄은 오고야 말 것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편집자 주)지난 2월 22일 내가 사는 청주에서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 스님의 강연이 있었다. 고인쇄박물관에 마련된 강연장 좌석과 복도를 다 채우고도 모자라 청중은 무대에까지 올라가 앉았다. 나도 무대에서 스님의 옆모습을 보며 강연을 들었다. 강연 방식은 즉문즉설(卽問卽說), 그 자리에서 청중이 묻고 스님이 바로 답한다. 그 때문에 청중의 집중력이 대단하다.초등학교 6학년 딸을 둔 어머니가 물었다.“딸아이를 장차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보낼 생각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회장 선거 때 한복을 입고 유세를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키워도 되는지요?”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커주는 딸아이를 은근히 자랑하는 눈치였다. 스님이 답했다.“아이한테 옷... -
진정 자유롭게 사는 법
부산의 한 독자는 지난달 오 변호사의 글을 읽고 정서적으로 살이 찐다는 말이 와 닿더라고 했다. 2년째 텃밭을 가꾸고 있다는 군포의 독자에게도 이달의 칼럼은 더욱 의미 있을 듯하다. 작든 크든 밭을 일구는 이들에게 ‘농사’란, 눈에 보이는 수확 이상의 의미가 된다는 것을 오 변호사의 글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편집자 주)내가 사는 청주 시내 한가운데로 무심천(無心川)이 흐른다. 무심천은 이름만큼이나 예쁘다. 제멋대로 흐르는 개울물이 주변의 억새, 갈대, 버드나무와 잘 어울린다. 풀숲에서는 새들이, 물 위로는 오리 떼가 자유롭게 노닌다. 이른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무심천을 거닐며 가만히 소리, 색깔,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행복이 조용히 솟아난다. 하천의 이름 그대로 무심의 경지에 다다를 때도 있다.지금은 그 모습 자체로 평온함을 안겨주는 곳이지만 전에는 사람들의 잘못된 욕심으로 하천변을 일직선으로 만들고 그곳에 콘크리트 벽을 쌓았다. 하천은 자연의 모습을 잃고 획일화... -
농부 되는 것의 어려움
부산의 한 독자분께서 ‘변호사 오원근님의 귀농 일기를 읽으니 세상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는 소감을 보내왔다. 아직은 자신이 ‘농부’라고 소개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오 변호사님이 용기백배하셨으면 좋겠다. 농부라는 타이틀 앞에는 ‘행복을 짓는’이라는 수식이 생략되어 있으니 말이다. (편집자 주)한겨울에 꺼내 먹는 내가 기른 무요즘 밭은 눈으로 덮여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눈은 오로지 햇볕으로만 녹아 없어질 수 있다. 봄이 되어야 눈이 스러져 흙이 드러나고, 거기에서 연초록 생명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눈은 겨우내 추위로부터 땅속 생명들을 지켜내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눈밭이 포근해 보이는 것은 그와 같이 생명에 대한 따뜻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지난 늦가을 심은 마늘도 눈의 포근함 속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게다.밭에는 마늘 말고 무도 있다. 무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무를 보관해놓았다. 시골 어머니에게 물어 만들었지만 막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