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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집, 늙지 않는다 - 장욱진 가옥
순수하고 토속적인 감성을 담아 한국적 추상화를 개척한 거장 장욱진. 우리는 작고한 그의 흔적을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119-8 장욱진 가옥. 수도권 아파트의 난개발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가족이 지킨 공간이라 더 소중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장욱진을 향한 꿈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집은 더 이상 늙지 않는다.화백의 흔적이 남아 있는 힐링 공간용인 신도시의 아파트촌을 지나 ‘과연 여기에 고택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즈음, 홀연히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장욱진 가옥의 마당에는 칼바람이 낸 상처를 쓰다듬듯 따스한 겨울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곳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세련미와 치밀한 구성미를 살려 표현한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낸 집이다. 이달 ‘고택 시리즈’는 화백의 작품을 좋아하는 필자의 사심이 가득 담긴 섭외였지만 집을 지키고 있는 장 화백의 셋째 딸 장혜수씨(63)와 사위 김익성씨(66)는 ... -
때 묻지 않은 순결한 맹사성 고택
따뜻한 볕, 온양. 이곳은 예부터 물 맑고 경치가 좋아 정사에 지친 왕들의 ‘힐링 장소’로 사랑받았던 지역이다. 얼마나 시간을 거슬러야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온양을 지나면 고려시대 무신 최영이 짓고 조선 세종 때 삼정승 중 한 명인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 나온다. 곧게 뻗어 마당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6백50세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강렬한 가을볕 때문일까? 묵직한 세월의 향기 때문일까?묵직한 세월, 변치 않는 사람들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맹사성 고택에 들어서자 종부 성낙희씨(80)는 마당에 앉아 도토리 껍질 까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서 오셨소?” 도토리에서 눈을 거두지 않고 무심하게 묻는다. 이런저런 설명을 다 하기도 전에 “아들은 저 위쪽 사랑채에 있으니 가보세요”라며 손짓한다. 현재 고택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은 고불 맹사성 21대손인 맹건식씨(81)·성낙희씨 부부다. 맹사성 고택은 기존에 소개했던 한옥 체험을 겸하는 고택들과 달리 ... -
당찬 여인네의 옹골찬 손맛, 선병국 가옥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선병국 가옥. 개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섬 아닌 섬의 형상이며, 개천과 집 사이의 사시사철 푸르른 노송들은 가옥을 포근히 감싼다. 따로 연못이 필요 없고 정원이 필요 없는 연화부수형. 곱게 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고택은 그렇게 피어오르는 듯하다.당찬 종부의 장맛 보실래요?8년 전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고택 살리기’에 큰 뜻을 두고 전국 각지의 종부들을 서울로 초청해 만찬회를 연 적이 있다. 문화재를 보유하거나 독특한 관혼상제와 음식문화를 보존해온 종가의 종부가 초청 대상이었다. “고택을 관리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든 해달라”라는 청장의 말에 다들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호기롭게 손을 든 여인.“종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참 힘든 일인데 사람들은 잡초나 흐트러진 겉모습만 보고 종부를 탓합니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주신다면 규제뿐만이 아니라 지원을 해주시던가, 아니면 소득 사업을 할 수... -
(9) 꽃처럼 피어나는 한옥 나주 도래마을
나주 혁신도시의 반듯하고 위엄 넘치는 건물들을 지나 우거진 숲과 들판을 10분 정도 달리면 나주 도래마을이 나온다. 풍산 홍씨 집성촌으로 한옥들이 잘 보존돼 있는 곳이다. 젊은 한옥지기 홍주연씨의 안내를 받아 홍기창·홍기응 가옥 그리고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고운 이름의 고택을 둘러봤다.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알다나주 다도면 풍산리에 위치한 도래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산에는 꽃이 피네’의 한옥지기 홍주연씨(41)가 달려 나와 일행을 맞는다. “무엇이 볼 것 있다고 여기까지 왔습니까”라며 구수한 전라도식 반어법 인사를 건넨다.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가니 시원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이미 에어컨으로 손님 맞을 방을 식혀놓은 상태였다. 한여름에 한옥을 방문하는 것이니만큼 다소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고 왔으나 주인 입장에서는 먼 길 찾아와준 손님에 대한 예의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어쨌든 시원해서 좋은 방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으려니 떡이며... -
(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영월의 여름은 싱그럽다. 푸르른 신록이 뿜어내는 맑고 차가운 공기는 몸속 세포에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조견당을 향해 굽이굽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 단위 캠핑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주천강에서는 다들 다슬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바캉스의 계절을 실감한다. 고택에 들어서니 여자아이가 마당을 뛰어다니다 어느새 사라진다. 그러곤 퐁당퐁당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이전 고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기가 이곳에 흐른다.집이 나를 꽉 잡았다조견당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오던 피아노 소리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주태·안양순 부부의 딸, 열 살 김휘영양의 솜씨였다. 고택 시리즈를 반년 넘게 진행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집은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조견당이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는 젊은 주인 내외의 면면 때문이었다. 바깥주인인 김주태씨(53)는 MBC 기자로 현재는 MBC 수원총국 총국장이다. 안주인인 안양순씨(51)와는 방송국에서 만났... -
(7) 옥란재 - 상상력, 연꽃과 피어오르다
옥란재는 생명력이 넘치는 고택이다. 정원에서는 네 마리의 오리가 꽥꽥거리며 줄지어 다니고 마구간에서는 ‘그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이 잊을 만하면 기척을 낸다. 살아 있는 것은 비단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듯 마당에는 붉은 보리수가 익어가고 푸른 연못에 연꽃이 피어오른다. 연못가 창포도 슬슬 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옥란재의 여름, 꿈결이라기엔 무척이나 생생하다.자연과 예술이 녹아 있는 고택, 옥란재옥란재는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고택의 주인(고택과 부동산을 옥란문화재단에 기부했다)이자 관리자인 미래상상연구소의 홍사종(59) 대표는 닭장이었던 공간을 카페로 둔갑시키고 애마를 위한 마구간을 손수 지었다. 어린 자녀들을 위해 그가 만들었던 오두막은 이제 더 이상 주인의 발길이 닿지 않지만 숲 속 산책길에 더없이 어울리는 풍경이 돼준다. 홍 대표가 집을 짓거나 목공을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작년에는 목공을 배운 지인들과 함께 ‘명사들의 목수열전’이라는 근사... -
(6) 종부, 온기와 정취를 불어넣다 - 의정부 박세당 고택
박세당 고택에는 세상이 한 번 뒤집히고, 옛것이 점점 사라져갈지라도 묵묵히 종부의 미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한 여인이 있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녀가 맞이한 서른을 갓 넘은 젊은 며느리는 자신이 앞으로 이어 나가야 할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이해하고 지지하며 따른다. 나란히 앉은 종부와 차종부, 두 사람은 고택 뜰 안에 핀 모란을 닮아 어여쁘다.도심 한가운데, 여유서계 박세당 고택의 뜰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드넓은 잔디밭에서 천연덕스럽게 뒹굴고 있는 예닐곱 마리의 진돗개들이 보인다. 볕이 좋아 일광욕하기 딱 좋은 날씨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집 지키기는 이미 그들의 소명이 아니었다. 누구 하나 낯선 이에 대한 경계 기미도 없이 보란 듯이 배를 쭉 내밀고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이 고택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발길을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12대 종부인 김인순씨(60)는 종가에 시집와 한 일의 대부분이 오가며 들르는 손님이나 문중 어른들 방문에 차 대접,... -
(5) 혼자 즐기는 멋 경주 독락당
경주 독락당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5백 년이 된 목조 건물이다. ‘낡고 헤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둘 만큼 견고하고 멋이 듬뿍 담긴 고택이었다. 특히 이 고택의 백미는 계당에서 바라보는 풍경. 흐르는 개천을 내 정원인 것처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는 적적함마저 잊어버린다. 독락당(獨樂堂), ‘혼자 즐기겠다’라는 회재 선생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겠다.왠지 느낌이 좋은, 독락당나무마다 가지마다 연두색 새순으로 몸단장이 한창이다. 여름의 청청하고 풍성한 나뭇잎보다 이런 연하고 뽀얀 새순에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느낀다. 독락당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마치 깊은 숲 속을 헤쳐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과연 길이 나올까 싶지만 환한 빛 속 공간을 슝슝 통과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윽고 위풍당당한 독락당이 눈앞에 등장한다. 위엄이 느껴지는 솟을대문이지만 누구든 반겨줄 듯 활짝 열려 있다. 독락당은 안채와 사랑채, 별... -
(4) 고귀함이 피어오르다 전주 학인당
학인당의 품격과 향기가 남달라 앞마당을 거닐자면 고고한 양반가 규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햇빛 잘 드는 사랑채에 앉아 차를 우려 마시다 보면 저절로 등이 곧아 자세 또한 바르게 된다. 집의 좋은 기운이란 사람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바꾼다.한옥의 근대적 발전전주시 교동 학인당의 큰 솟을대문을 앞에 두고 그 위용에 잠시 주춤했다. 초인종도 없고 여느 고택처럼 늘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다. ‘똑똑똑’ 손기척으로는 기별도 안 갈 것 같았는데 어느새 알고 종손과 종부가 대문을 활짝 열어주며 반긴다. 앞마당에 한 발 들여놓았을 뿐인데 1백 년 전으로 타임슬립을 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학인당은 수원 백씨 백낙중의 고택으로 올해로 1백6년이 됐다. 다른 고택들과 달리 비교적 머지않은 과거에 지어졌기 때문인지 현실과의 괴리감은 비교적 적게 든다. 그저 어디론가 멀리 떠나온 듯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정돈된 고택, 보존을 잘... -
(3) 양반의 품격이 깃든 계암고택
한옥은 단순한 집이 아니란 걸 이번 고택 방문에서 깨닫는다. 계암고택은 선조들의 삶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었다. 행랑채는 지나가는 길손을 내치지 못하는 정의 문화를, 초당은 서민들과 함께 공감대를 이루고자 하는 상생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택, 가치 있는 삶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 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오목한 그릇 형태의 분지로 온 동네에 햇빛이 내리쬐면 따스함을 가득 담아낼 것만 같은 마을이다. 동남쪽으로는 대교천이 흐르고 마을 대부분의 땅은 비옥한 농경지다. 그 주변으로 가옥이 형성돼 있는데 뒤편에는 나지막한 야산 지대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과거에도 이곳은 기름진 곡식과 냇가에 떼 지어 다니는 물고기로 먹을거리가 풍부했을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부촌의 형태다. 현재 마을에 남은 한옥은 정순왕후 생가와 계암고택이며, 두 집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의 역사를 소리 없이 나이테에 새기고 있다.이번에 방문한 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