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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 따끈한 구들 위로 단잠이 눈처럼 쏟아졌다
잘생긴 기와지붕을 얹은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 위풍당당한 ‘호남제일문’을 통과하는 짧은 찰나, 전주 사람도 아니거늘 고개가 빳빳해졌다. 한옥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오목대에 올라 검푸른 기와의 도도한 물결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러했다. 전주 땅을 밟는 순간,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이야기한 ‘꽃심’이라도 지핀 것일까. 이 고장의 근거 있는 자부심에 동화된 채 종내 식지 않는 흥으로 걷고, 마시고, 기웃거렸다.고속도로를 통한 여행길이라면 톨게이트는 해당 여행지의 첫인상이 된다. 사실, 그 첫인상이 강렬한 도시는 많지 않다. 운전자가 아닌 이상 졸다 지나치기 십상이며, 모든 톨게이트가 해당 도시의 상징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주는 다르다. 한옥 기와지붕을 맵시 있게 올린 톨게이트가 보일 때쯤 여행객은 비로소 전주에 왔음을 실감한다.현판의 힘찬 서체도 근사하다. 한글이 반포된 이후 서민들이 쓰던 글씨체라 하여 ‘민체’라 이르는 서예가 여태명씨의 글씨다. ‘전주... -
충남 서천 -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어제의 해가 잠겼던 바다 위로 떠오른 오늘의 해를 본다. 바람에 수런대는 갈대밭에서, 가창오리떼를 기다리는 금강하굿둑에서, 포구를 바라보는 동백 숲에서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의 하루를 가만히 흘려보낸다. 이즈음의 헛헛한 속을 가라앉히려거든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자연의 조화 속에 기댈 따름이다. 백제 유민의 눈물로 빚었다는 달디단 소곡주 한 잔도 매우 유용하다.서천의 해 지는 풍경은 어디나 아름답다. 금강하굿둑에서 가창오리떼를 기다리다 문득 마주해도 좋고, 낙조 감상을 위해 작정하고 오른 동백나무 숲 동산에서 바라봐도 좋다. 바다와 강을 물들인 붉은 낙조는 어느 곳에서 보든 여운이 길다. 해 뜨는 풍경 또한 그 못지않다. 서해에는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바닷가 작은 마을들이 있다. 당진 왜목마을과 서천 마량포구가 그 대표 주자로, 세밑 세시엔 해넘이와 해맞이를 위해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꽤나 북적인다.마량포구는 바다 쪽으로 꼬리처럼 튀어나온 땅 끄트머... -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그 계절의 풍미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 다음 계절로의 환승이 못내 껄끄럽다. 복잡한 지하철 환승로에서 갈아타야 할 노선을 더듬거리다 우두망찰하는 격이랄까. 어느 날 문득, 잎도 열매도 다 떨군 빈 가지에 허를 찔리지 않으려거든 울긋불긋 열꽃 피운 가을 숲을 너끈히 걸어볼 일이다.하복, 동복, 춘추복의 구분처럼 봄과 가을은 종종 한 묶음이 된다. 격하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이 이들을 묶는 가장 흔한 이유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공통점은 두 계절 모두 참 좋은 시절이라는 것. 카뮈의 말마따나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꽃은 남녘에서 하루에 30km 속도로 북상하고, 단풍은 북녘에서 하루에 20km 속도로 남하한다. 내 집 문 앞까지 번지도록 가만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무르익었다는 발원지로 지레 달려가는 마음은 봄과 다를 바 없다. 꽃놀이처럼 단풍놀이 역시 타이밍이 관건이며, 좋은 시절은 늘 야속하리만치 짧다. 사나운 바람에 가을비라도 내리면 별안간 겨울이 ... -
통영 바다는 사시사철 제철이다
다도해의 비경과 항구도시의 활기 속에, 시인 유치환은 우체국 창문 앞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화가 이중섭은 눈길 닿는 풍경마다 화폭에 담으며 일생의 역작들을 쏟아냈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통영에선 싱싱한 활어회 한 점도 시가 되고, 그림이 됐다. 사철 푸른 바다가 지핀 정념이었다.통영의 별미 도다리 쑥국은 봄이 제철이라지만 통영은 사시사철 제철이다. 바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리 푸르고, 그 앞에서 붕붕 설레거나 돌연 아득해지는 마음은 소년이건 노인이건 다를 바 없다. 바닷가에선 손을 맞잡고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다가도 서로 다른 그리움을 더듬게 되는 순간이 흔하다. 하여 바다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은 되도록 외면하는 편이 좋다. 깍지 낀 손으로도 닿을 수 없는 먼 마음에 괜스레 서운해지지 않으려거든 말이다.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 새벽녘의 거리엔... -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초록이 꿈틀대는 생명의 늪은 하늘과 뭍과 물의 생물들을 끌어당기고 품어낸다. 아무리 작고 약해도 한낱 미물이라 업신여기는 법이 없다. 자라풀은 자라풀대로, 논우렁은 논우렁대로, 늪에 깃든 생명체들은 제 쓸모와 살아갈 이유가 자명하다. 1억4,000만 년의 시간이 고인 원시 정원에서, ‘누군가 막 꾸다 만 꿈’을 만났다.우포늪의 생성 시기는 약 1억4,0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생성 시기와도 같은 중생대 백악기, 까마득한 공룡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우포늪을 ‘생태계의 고문서’이자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일컫는 이유도 그 때문. 황동규 시인은 우포늪을 두고 “돌을 던져도 시침(時針)이 보이지 않는 곳”, “누군가 막 꾸다 만 꿈같다”라고 노래했다. 뭍도 물도 아닌 늪은 바꾸어 말하면 뭍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한 셈인데, 이 모호함은 불가해한 신비와 유연한 상상력을 끝없이 부추긴다.늪은 품이 넓다. 뭍에 사는 동식물과 물에 사는 동식물 그리고 그 중간 지... -
전남 담양 - 여름 담양으로의 자명한 산책
여름날 담양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숲을 흔드는 바람과 메타세쿼이아의 초록 터널, 멀미 나는 삶에 쉼표를 찍어주는 슬로시티, 은둔자의 소쇄한 정원 때문만은 아니다. ‘연못 담(潭)’에 ‘볕 양(陽)’ 자를 쓰는 담양은 연못에 가장 풍성한 볕이 드는 계절, 하여 생장점을 활짝 열어젖힌 수생식물들이 진초록으로 들끓고 볕에 기민한 수련이 눈 뜨는 여름이 제철이다.대숲에서 귀동냥한 푸른 속사정담양의 첫 기억은 대통밥과 댓잎술이다. 담양에 도착하자마자 그걸 먹기 위해 간 것처럼 대통밥 정식으로 유명한 식당부터 찾았다. ‘담양’이란 지명을 떠올릴 때마다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푸른 대숲 이미지가 식욕 중추에도 영향을 미친 까닭이다. 전라도 밥상을 앞에 두고 흐뭇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맑고 순한 댓잎술로 반주도 걸쳤겠다, 걸음걸이에 절로 탄력이 붙을 만큼 기분 좋은 취기에 젖어 죽녹원으로 향했다.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한 죽녹원은 16만㎡에 달하는 거대한 대나무 정원이다.... -
전남 곡성 - 기차는 추억의 속도로 달린다
곡성 여행의 백미는 섬진강을 따라가는 여정에 있다. 옛 곡성역에서 출발하는 증기기관차는 종착역인 가정역까지 약 10km 남짓 섬진강 물줄기를 옆에 끼고 달린다. 추억의 속도로 나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자장가처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눈을 뜨고도 꿈을 꾸게 될 터. 그 꿈 자락에 화사한 장미 향기가 깃들 수도 있겠다. 곡성역엔 장미가 지천이다.지명은 그 지역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정확한 정보를 준다. 곡성(谷城)엔 이름 그대로 골짜기가 많다. 곡성의 주산 동악산과 제1 고봉인 통명산, 천년 고찰 태안사를 품은 봉두산 등 크고 작은 산자락을 성곽처럼 두른 까닭에 청정한 계곡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골짜기 곡(谷)’ 대신 ‘울 곡(哭)’ 자를 썼다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야기다. 해 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것만으로 이동하던 시절, 험준한 심심산골엔 보부상들의 곡소리가 마르지 않았으리라.인접한 남원이나 구례에 비하면 맛도 멋도 소박하게 느껴지는 ... -
경남 남해 - 그리움은 남쪽 끝 섬으로 흐른다
남해를 가니 남해라 답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남해 어디?”라는 질문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던 시절, 나는 젊었고 남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해의 매력에 새삼 눈뜬 건 서른이 한참 넘어서다. 햇살이 흥건한 봄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탄성을 질렀다. 호수처럼 잔잔한 비취색 바다와 올망졸망한 섬들, 쑥쑥 자란 초록색 마늘밭이 얼마나 예쁜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 친구와 돌연 정분이라도 난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 낯선 설렘으로 다가왔다.남해가 고향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남해에 거주하시다 보니 계절에 한 번은 남해에 간다. 지금이야 내 주변 사람들도 다 나이를 먹고 웬만한 국내 여행지는 꿰고 있어 그럴 일이 없지만, 어리고 어리숙한 서울 촌놈들만 득시글거리던 20대 초반엔 남해를 설명하느라 종종 애를 먹었다. 가령, 휴가는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남해”라고 답하면 으레 “남해 어디?”라는 질문이 이어졌고, 내가 말한 남해는 남쪽 바다를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해군’임을 누누이 ... -
전북 고창, 서럽도록 붉고 시리도록 푸른 봄날에
보리밭 사잇길을 지나, 철쭉을 휘감은 조선시대의 읍성을 한 바퀴 돌고, 천년고찰을 병풍처럼 에워싼 동백 숲에 이르렀다. 청춘의 보리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고창 군민의 정원이라 할 모양성과 후드득 눈물처럼 꽃이 지는 선운사는 서럽도록 붉었다. 봄의 절정, 봄이 봄을 밀어내는 풍경 앞에 마냥 헤실거릴 수도 없지 않나. 어쨌거나 이별인데.초록 물결 일렁이는 보리밭 사잇길로보릿고개를 알 턱도 없고, 보리피리를 불어본 경험도 없다. 보리에 대한 기억이라면 그저 어린 시절에 즐겨 하던 ‘쌀, 보리’ 놀이와 가곡 ‘보리밭’을 배우던 음악 시간 정도다. 한데 몇 해 전 4월, 고창 청보리밭 축제를 다녀오고부터 보리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바람이 불고 멈춤에 따라 물결치는 바다가 됐다가 침묵하는 호수가 되기도 하는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본 연후, 멥쌀에 구수한 찰보리를 섞어 밥을 짓고 보리차를 끓여 마셨다. 가루녹차 같은 보리순 분말을 찬물에 녹여 녹즙처럼 마시기도 했다. 입 안 가득 짙은 ... -
전남 순천 - 매향이 깃들까, 꽃그늘 아래 한참을 맴돌았다
한 발 한 발 북상하는 꽃이 내 집 문 앞에 이르도록 기다려보자 싶다가도, 남도의 꽃 소식에 붕붕거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꽃과의 인연도 타이밍이 관건인지라, 꽃구경만큼은 미뤄선 안 된다고 지난봄에 다짐한 터. 꽃 시절에 찾은 순천엔 꽃이 지천이다. 600년 묵은 매화나무도 꽃을 피워 올린다. 그 전설 같은 꽃 사태 앞에 ‘도시가 아니라 정원입니다’라고, 순천시 관광 책자에서 읽은 슬로건을 주억거렸다. 도시가 아니라 꽃밭이었다.이른 봄엔 잎보다 꽃이 먼저다이른 봄의 꽃나무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등 다수가 그러하다. 나무에 따라 잎이 먼저일 수도 꽃이 먼저일 수도 둘이 함께일 수도 있건만, 유독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꽃나무들을 바라볼 때면 감탄이 배가된다. 아마도 그네들이 꽃을 틔우는 이즈음의 정서가 한몫하는 것 같다. 겨울과 봄 사이, 초록은 아직 멀고 말이 예뻐 꽃샘추위지 바람은 독하기 짝이 없는 시절.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