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모습을 간직한 도시를 한번 떠올려보자.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독일의 로텐부르크와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교황이 머물렀던 프랑스의 아비뇽,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인 체코 프라하…. 제각각 옛 멋이 남아 있는 도시다. 에스토니아 탈린도 꽤 유명하다. 탈린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여행광들에게는 ‘가고 싶은 북유럽의 고도’다. 중세의 도시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다가 물가도 싸다. 서유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북유럽의 정취도 있다. 탈린이 어디 있는지 머리에 쉽게 위치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영국에서 오른쪽 바다를 가로지르면 북해가 나오는데 이곳에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아래 덴마크가 있다. 이 네 나라가 안고 있는 바다가 바로 발트해이다. 핀란드에서 발트해를 가로지르면 에스토니아가 나온다. 에스토니아 아래는 라트비아, 오른쪽은 러시아이다.
한자동맹이란 독일 도시를 중심으로 중계무역과 상권을 장악하던 도시들의 연합을 뜻한다. 자국 도시에게는 세금을 물리지 않고 타국에서 들어온 물자는 제대로 팔지 못하도록 세금을 물리거나 훼방을 놓는 보호무역을 했다. 한자동맹에 발끈한 덴마크가 침입해왔다. 근대에는 스웨덴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이 탈린을 놓고 영토 다툼을 벌였다. 중세엔 스웨덴에 복속돼 있다가 1710년에는 러시아에 병합됐다. 러시아가 에스토니아를 합병한 뒤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우수한 건축물과 전통이 남아 있는 탈린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하고,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발트해 너머 핀란드의 헬싱키를 묶어 이 세 도시를 러시아의 중심축으로 삼으려 했다. 헬싱키는 당시 신도시였다. 표트르 대제가 지은 여름 별장은 후대에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같은 러시아의 이름난 예술가들이 찾아와 휴가를 보낸 곳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에스토니아는 구소련 붕괴 후 1991년에야 독립할 수 있었다.
중세가 완벽히 보존된 북유럽 사람들의 관광지
탈린은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다. 북유럽은 물가가 워낙 비싸다. 술에도 세금이 많이 붙는다. 해외에 나가서 술을 사오면 면세된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 사람들은 주말이면 두어 시간 배를 타고 탈린에 가서 면세품 술을 두세 상자씩 사온다. 탈린항에 들어가면 입국심사대도 없다. 면세점엔 옷가게나 구두 같은 명품이 있는 게 아니라 술가게만 즐비하다. 명품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왜? 북유럽은 밤이 길다. 겨울에는 헬싱키도 오전 10시에 해가 떠서 오후 2시에 진다. 누가 봐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 명품 입을 이유가 없다. 명품은 질이 좋아서 입고 차는 게 아니라 ‘폼 잡기’ 위해 구입한다. 북유럽에서 실용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이 유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후, 계절적인 요인 때문인 것이다.
마을을 제대로 보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주요 건축물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도 재밌다. 이를테면 광장 어귀에 있는 약국은 1422년에 세워진 현존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다. 가이드는 “고양이 피, 생선 눈, 유니콘 뿔로 만든 파우더를 정력제로 팔았는데 그때 유니콘을 너무 많이 잡아 유니콘이 없어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했다. 시청사 두 번째 기둥에는 쇠고리가 걸려 있는데 죄인들을 묶어놓고 토마토 세례를 하던 곳이라고 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 하나. 의회 의원이 비밀을 누설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깨고 부인에게 회의 내용을 얘기했다. 이 이야기가 흘러나가자 광장을 세 바퀴 기어 다니는 형벌과 함께 토마토 세례를 받게 됐다. 의회광장의 옛 건물 종탑에 올라가면 탈린항과 함께 도시의 모습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원더풀!” 하고 한마디 외쳐줘야겠지만.
도시는 부유했고, 건물은 아름답고 화려하다. 골목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고 있으면 “인생 뭐 별거 있나” 이런 생각이 다 든다.
탈린의 아름다운 교회와 성당
카타리나 골목은 유명한 명소다. 올드타운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기인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다. 건물 벽에는 비석들이 붙어 있는데 러시아 점령 시기에 러시아군들이 세워놓은 곳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곳이지만 이탈리아 식당이 유명해지면서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게 됐다는 것이다. 이 길목의 끄트머리에는 울 스웨터 등 특산품을 파는 성벽 옆에 붙은 가겟집들이 있다.
탈린 사람들은 니콜라스 교회를 꼭 보라고 권한다. 무너진 것을 다시 보수한 교회다. 멀쩡한 것도 많은데 왜? 1400년대에 세워진 니콜라스 교회는 2차대전 중인 1944년 점령군인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군이 폭격을 가해서 일부가 부서졌다. 러시아 정부는 에스토니아를 강점하고 있던 1960년대까지도 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인 러시아인들은 “왜 성당을 수리하느냐”며 버텼고, 결국 세계 각국의 비난이 이어지자 1970년대에 와서야 보수했다. 은근히 점령군 러시아를 비꼬기 위해서 이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행 길잡이
핀란드에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헬싱키까지는 핀에어가 여름철에는 주 4편 들어간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들어가는 배편이 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www.tallinksilja.com/en 유레일패스 소지자는 실리야라인 페리 할인을 해준다. 유럽연합에 가입돼 있지만 화폐는 크룬을 쓴다. 1유로는 15.6크룬. 올드타운에서는 유로화도 받는다.
■글&사진 / 최병준(경향신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