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아슴아슴 여린 빛들이 매달린다. 꿈을 꾸나 싶어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켰다. 비에 젖은 섬진강이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하동행 버스에 몸을 실으며 파랗고 노랗고 빨간 섬진강변을 그렸다. 봄비가 흩뿌리는 섬진강변은 뽀얀 분홍빛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초록으로 물든 악양 들판이 펼쳐진다. 섬진강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너른 들판이다. 거지가 일 년 내내 집들을 돌며 동냥을 해도 들르지 못한 집이 세 집이나 된다는 풍요와 인심의 땅. 박경리 선생은 이곳에 만석지기 사대부집을 지었다. 색이 짙어지는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굽이치는 섬진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최참판댁이 자리 잡고 있다.
초가집들을 스쳐 최참판댁 솟을대문 앞에 서면 만석지기 최씨 집안의 위엄이 드러난다. 3천여 평 대지에 지어진 14동의 한옥은 조선 반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살린 것이다. 윤씨 부인과 서희가 기거했던 안채, 길상이를 비롯한 하인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김환과 야반도주한 별당 아씨가 머물던 별당, 최치수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한 사랑채 등이 잘 정돈되어 있다. 작은 연못 위로 수양버들이 춤을 추는 별당은 최참판댁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빗방울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연못에는 작은 서희를 업은 길상이가 어린다.
최참판댁에 들렀다면 반드시 누마루에 올라보자. 탁 트인 시야 가득 드넓은 악양 들판이 펼쳐진다. 용이와 월선이처럼 다정한 부부송 한 쌍도 눈에 들어온다. 멀리 굽어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까지,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절경이다.
최참판댁 뒤에는 소설 「토지」를 비롯해 하동과 관련된 문학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평사리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 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개최되어 문학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십리벚꽃길 따라 꽃 대궐 즐겨볼까
하동에서 최참판댁만큼이나 유명한 곳이 바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다. 지금은 여느 시골장터와 다름없는 화개장터는 광복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였다. 지리산 화전민들이 고사리와 더덕, 감자 등을 가져와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보리를 내다 팔았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가지고 모여들었고 여수부터 남해, 충무, 거제 등지의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해 미역과 청각, 고등어 등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는 상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상점에 초가지붕을 얹어 전통 시골 장터 분위기를 냈다. 있어야 할 건 다 있다는데, 무엇을 팔고 있나 살펴보니 헛개가지, 느릅나무, 둥글레, 겨우살이와 같은 지리산 약초와 야생차, 산나물 등이다.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고로쇠 약수도 눈에 띈다. 냄새의 유혹에 넘어가 노랗게 치자로 물들인 은어튀김을 한 입 베어무니 바삭,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섬진강 정기 이어받은 왕의 녹차를 즐기다, 하동야생차문화축제
하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녹차다. 하동 일대는 섬진강과 함께 여러 지류가 있어 안개가 많고 다습하며 일교차가 커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질을 가지고 있다. 하동의 차 재배 면적은 전국의 23%를 차지하는데 재배 농가는 전국의 35% 정도다. 하지만 하동에서 생산되는 차는 전국 생산량의 13%에 불과하다. 대부분 손으로 직접 따고 덖는 수제차이기 때문이다.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하동의 야생차밭은 보통 TV에 많이 나오는, 가지런히 줄을 맞춘 녹차밭과는 다르다.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따라 빼곡하게 찻잎을 내밀고 있다. 생기가 차르르 흐르는 여린 찻잎 위에 봄볕이 내려앉으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도심다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야생차밭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5월 초는 본격적인 차 수확 시기다. 이 시기 하동에서는 명실 공히 우리나라의 대표적 차(茶)문화축제로 자리 잡은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하동야생차축제에서는 야생차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참가자들이 직접 찻잎을 따로, 고르고, 덖고, 말리는 제다 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올해 하동야생차문화축제의 주제는 ‘왕의 녹차! 느림, 비움, 그리고 채움’이다. 차가 가지고 있는 정적인 이미지와 하동이 갖는 여유와 휴식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 주제로 5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동군 화개면과 악양면 일원에서 펼쳐진다. 하동이 가장 아름다운 봄빛을 뽐내는 5월, 녹색 차밭의 비경과 십리벚꽃길,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함께하는 하동야생차문화축제에서 바쁜 삶을 잠시 내려놓고 차와 자연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하동야생차문화축제 주요 행사
2 섬진강 달빛차회 차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축제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대표 프로그램.
3 대한민국 녹차 요리 콘테스트 다양한 녹차 요리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행사로 수상작에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이 수여된다.
4 왕의 녹차와 함께하는 1박 2일 찻잎 따기 및 덖기, 다도 및 다숙 체험을 통해 차 문화를 경험한다.
5 홍신자와 함께하는 차 명상여행 세계적인 무용가이자 명상가인 홍신자가 진행하는 1박 2일 명상 체험.
6 왕의 녹차 템플스테이 내외국인이 함께하는 쌍계사 체험.
7 슬로시티-소풍 평사리와 최참판댁 주변의 자연을 배경으로 걷기 체험.
이 밖에 쌍계사에서 펼쳐지는 산사 음악회, 악극과 마당극 형태가 가미된 창작극 ‘다향의 노래’ 등이 주요 공연 행사로 열리며 차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과 신라시대 이미지를 구현하는 시배지 다례식, 대렴공 추원비 헌다례, 최고 차나무 헌다례 등이 제례 프로그램으로 마련될 예정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제공 / 노정연, 이유진, 하동야생차문화축제 ■여행 문의 / 하동군청(055-880-2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