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 중심 파주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새로운 문화 중심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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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는 차로 달릴 생각만 했다. 황희 유적지보다는 그 옆 장어로 유명하다는 식당에 갈 계획만 세웠다. 자전거를 타고 파주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미술평론가 이재언이 왜 자전거 예찬으로 입에 침이 마르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편집자 주)

율곡 선생이 임진강을 굽어보며 학문을 완성시킨 화석정.

율곡 선생이 임진강을 굽어보며 학문을 완성시킨 화석정.

수도권 지역에서 자전거를 즐기면서 문화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파주만 한 곳이 없다. 색다른 문화의 중심지 파주 출판문화단지, 가장 성공적인 예술공동체로 자리 잡은 헤이리예술마을, 그 밖에 임진강 일대와 황희 유적지, 임진각과 평화누리공원, 퇴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성리학자 율곡 선생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화석정과 자운서원 등의 문화적 볼거리가 풍성한데다, 자전거 주행 여건이 좋아 자전거 애호가들에게 널리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파주 나들이엔 재작년 순천-벌교 라이딩을 함께했던 브로시오님과 이곳 지리에 밝은 풍경님이 함께 동행했다. 코스는 일산 대화마을-파주 반구정(35km)-임진각(3km)- 화석정(8km, 반환점)-헤이리예술마을(18km)-출판문화단지(12km)-대화마을(9km) 순이다. 다만 코스에 도달해서도 답사에 소요되는 거리가 있어 최종 목적지의 속도계에는 93km가 찍혀 있었다.

황희 선생 영당 내 반구정과 나란히 있는 앙구대.

황희 선생 영당 내 반구정과 나란히 있는 앙구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반구정
자전거 타기에 좋은 5월의 일요일 아침, 이산포 들판에 펼쳐진 싱그러운 신록의 기운을 흡입하며 잡다한 도시의 일상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달려간다.

우리 일행이 자유로 옆 농로를 타고 가던 중 많은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구산 IC에 당도할 무렵 20여 자전거 팀과 조우했다. 아마도 부지런한 아침 라이딩 팀이 이제 귀가하는 중인가 보다 했더니 아는 얼굴들이었다. 일산 자전거 동호회의 아침 라이딩 팀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출발인데 저들은 이미 라이딩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이었다. 얼리버드들의 응원을 받고 페달링에 박차를 가했다.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파주 출판문화단지, 헤이리예술마을은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그대로 지나쳐 계속 북쪽으로 달렸다. 자전거 여행은 힘이 있을 때 거리를 확보하고 난 후, 피로가 쌓이기 시작할 때 휴식도 취할 겸 답사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두 시간 조금 못 걸려 도착한 곳이 임진강 하류 낙하진 근처에 있는 반구정으로 황희 정승 영당이 함께 있다.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내던 곳이다. 정말이지 야트막한 구릉 위에 세워진 반구정과 앙구대에 올라서 보면, 바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것부터 맞은편 북한 땅까지 볼 수 있는 요지이다.

1 헤이리의 명물이 된 나무와 건축의 기묘한 동거. 2 자유로의 종착지 임진각. 3 또 다른 문화의 심장 파주 출판문화단지.

1 헤이리의 명물이 된 나무와 건축의 기묘한 동거. 2 자유로의 종착지 임진각. 3 또 다른 문화의 심장 파주 출판문화단지.

안타깝게도 바로 발아래는 철조망과 초소가 있어 조망을 방해한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이 착잡하게 전해진다. 기껏 내가 사는 동네에서 자전거 길로 두 시간도 안 돼 도착한 데가 바로 이러한 곳이라니…. 그러고 보면 반구정이 참 박복한 곳에 놓여 있다. 서로는 대치의 현장이며, 동으로는 자유로가 가로지르고 있어 접근성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게다가 황희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잘 조성되어 있기는 하나,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자리한 한옥으로 잘 지어진 식당의 이름으로 더 기억하고 있는 현실도 무언가 씁쓸한 느낌을 준다.

자유로의 종점, 임진각과 평화누리공원
반구정에서 나와 자유로 옆 농로를 따라 북쪽으로 3km 정도 더 올라가면 자유로의 종점 임진각이 나온다. 무한대로 질주할 것 같았던 자유로였건만, 임진강변에 서 있는 임진각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소위 안보관광지라는 이곳은 이제 국제적으로도 명소가 되었다. 임진강 너머의 땅을 관측할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의 임진각도 그렇지만, ‘자유의 다리’, ‘임진강 전투 전적지’, 놀이공원, 그리고 완만한 구릉에 색다른 공공미술 작품들이 설치된 ‘평화누리공원’ 등이 함께 있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다. 특히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다. 아무래도 북한이라는 곳이 워낙 이슈의 중심에 선 특이한 나라이다 보니 외국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임진각 옆에 조성된 평화누리공원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광활하고 시야가 좋은 언덕에 조성된 공원은 이제 분단과 대결의 장에서 벗어나 화해와 공존의 염원과 메시지로 충만한 장소가 되어 각광을 받고 있다. 이스트 섬의 모이모이상을 연상시키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설치되어 미디어에서도 많이 소개된 곳이다. 임진각 전투 전적지, 멈춰선 철마로 상징되는 분단과 냉전의 명소 임진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평화 염원의 성지와도 같은 복합 문화공원이 나란히 조성된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유니세프 기부금 조성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는 촛불과 바람개비 등의 연출은 북한 어린이를 도울 수 있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이 살아 있는 화석정
임진각과 평화누리공원을 뒤로하고 1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여우고개 사거리에서 37번 도로로 좌회전을 해서 가면 조금 높은 구릉에 화석정이 자리하고 있다. 화석정은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나무 아래 임진강을 환히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율곡 선생 가문에 의해 세워져 선생도 이곳에서 학자로서 호연지기를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선생이 왜란을 예견하고 장차 임금의 몽진시 임진나루의 밤을 밝혀주기 위해 이 정자가 횃불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정자의 기둥마다 기름칠을 했다고도 한다. 임란 이후에도 정자는 몇 번의 중건을 거쳤지만 고령의 수목들은 변함없이 그 역사를 입증해준다. 이곳에서 보는 임진강은 굽이돌고 있어 장엄해 보인다. 유난히 철학적 사변을 즐겼던 선생에게 이 강이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1 평화누리공원. 2 자유의 다리 앞에서 멈춘 기관차.

1 평화누리공원. 2 자유의 다리 앞에서 멈춘 기관차.

화석정 인근에서 점심을 하기 위해 찾은 식당의 손님 대부분은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수십 명의 중년 라이더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채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제 자전거 복장은 더 이상 민망하고 낯선 것이 아닌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헤이리예술마을로 향했다. 이동 중 인천에서 온 또 다른 무리의 동호인들을 만났다. 그들과 섞여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귀로를 즐겁게 달릴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고 금방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나름의 문화적 공감대와 연대의식이 있다는 것 아닐까.

새로운 파주의 얼굴, 헤이리예술마을과 출판문화단지
5월의 헤이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박물관과 갤러리, 카페 등을 두루 다니며 전시 관람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곳이니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건물마다 건축가의 독특한 개성과 조형적 가치가 담겨 있어 볼거리가 넘치는 예술공동체이다. 무엇보다 이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생태환경을 잘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한몫을 했다. 1998년 처음 조성 계획이 나올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땅이 이렇게 명소로 바뀔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조용한 창작생활을 하고자 입주한 작가들에게 오히려 지장을 줄 정도다.

1 외관이 독특한 파주 출판문화단지 레지던스. 2 헤이리 예술마을 풍경. 3 독특한 공간 체험을 할 수 있는 헤이리의 다리.

1 외관이 독특한 파주 출판문화단지 레지던스. 2 헤이리 예술마을 풍경. 3 독특한 공간 체험을 할 수 있는 헤이리의 다리.

몇 군데 전시를 둘러보고 나서, 인근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조각가 박찬용씨가 작업실에 있는지 전화를 해보았다. 마침 작업이 한창이라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찾았다. 대동리 방향으로 있는 일명 프로방스라 불리는 마을을 지나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고 있는 지점쯤에 규모가 큰 조각 스튜디오가 있다. 역시 조각가인 부인 호혜란씨와 함께 쓰는 이 작업실은 심산유곡에 자리한 가람처럼 조용해 헤이리가 오히려 번잡한 속세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가운데서도 이 부부의 작업은 치열하다. 특히 박찬용씨는 사나운 동물들을 의인화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균열이 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풍자하고 일갈하는 작품들의 제작에 몰입해 있었다. 방해가 될까봐 오래 머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물 한 사발 얻어 마신 후 다시 나왔다.

헤이리 근처에서 작품활동 중인 박찬용 작가.

헤이리 근처에서 작품활동 중인 박찬용 작가.

어느덧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파주 출판문화단지에 도착하니 어린이 도서축제 행사가 막 끝나고 있었다. 출판문화단지 역시 헤이리 못지않게 성공적으로 정착해 지금은 2단계 단지조성 공사가 문발 지역에 한창이다. 헤이리가 주로 작가 개인 중심이라면 출판문화단지는 주로 기업 중심의 입주로 규모가 더 크고 건물의 작품성도 한층 더 짜임새가 있다.

출판이라는 아이템이 대중과 직접적으로 친근감을 주지 못해 헤이리만큼 인파가 운집하지는 못하나, 이곳은 희대의 건축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건축예술의 각축장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은 출판 외에도 IT와 관련한 각종 미디어 아이템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어 새로운 문화의 중심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바로 옆에 있는 심학산이 조용한 전원주택단지로 탈바꿈하면서 파주의 새로운 얼굴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벨트로 도약할 것으로도 기대가 된다.

파주 자전거 답사 지도

파주 자전거 답사 지도

에필로그
한때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는 개성관광도 자전거로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에 부풀기도 했다. 임진강 주변 철책이 걷히고 순찰로가 생태 탐방이 가능한 자전거 도로로 전환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긴장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그 꿈은 요원해진 상태이다. 물론 그러한 청사진이 아니어도 파주는 지금 각지의 자전거 애호가들이 앞 다투어 쇄도하고 있는 명소다. 문화적으로 향유할 거리가 많고 자전거로 즐길 수 있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호전되면 파주는 그야말로 자전거 천국이 될 것이다. 속히 평화 무드가 조성되어 우리 애호가들이 DMZ를 자전거로 달리고, 개성뿐만이 아니라 북한의 산하 곳곳을 자전거로 누빌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새로운 문화 중심 파주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새로운 문화 중심 파주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 글·사진 / 이재언 (미술평론가) ■ 취재 협조 / 울프 라운치(Wolf La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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