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 최고의 관광지, 카르카손
남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랑그도크 지방의 카르카손일 것 같다. 랑그도크는 ‘Oc란 언어(랭귀지)를 쓰는 땅’이란 뜻이다.
카르카손은 한국인에게 생소하지만 파리와 몽셸미셸에 이어 세 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카르카손의 명물은 카르카손 성이다. 성은 탑만 52개, 2개의 이중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성 내부에는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프랑스 남부를 이해하려면 역사의 시계를 2천 년쯤 전으로 돌려야 한다. 남부의 주요 도시들은 2700년 전부터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그리스였다. 이후 2100년 전 로마인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카르카손 성 내에는 로마의 흔적이 많다. 성내의 박물관에는 로마의 유적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로마의 유적에 시대별로 성벽과 성곽이 덧칠해진 그런 성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자유분방한 문화의 이유
문화는 ‘짬뽕’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 사촌은 스페인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도 많다. 중세에는 사실상 나라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을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100년 전쟁 이후다. 왕가가 결혼을 할 때마다 영토를 건네고 받다 보니 프랑스 땅의 절반이 영국 왕 소유가 된 것이다. 영국 왕이 이참에 진짜 왕 노릇을 하겠다고 일으킨 전쟁이 100년 전쟁이다. 잔 다르크는 몸 바쳐 싸웠고, 그녀가 화형당한 이후에야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는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다고 보면 된다. 8세기에는 사라센인들이 카르카손을 차지했다. 이후 트란카발 가문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남부는 이방인의 땅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1659년 피레네조약 서명 전까지는 프랑스와 아라공왕국의 경계였다. 지금으로 치면 스페인과 프랑스 모두의 영토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이해해야 빠르다. 4세기 교황이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후 기독교는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도 많이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다툼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기독교 공인 후에도 은근히 기독교를 박해하는 황제도 많았다. 기독교도들끼리도 권력 투쟁을 벌였다. 아리우스파, 이그노시우스파… 이 파, 저 파가 갈라져 싸웠던 것이다. 교황의 권위 아래 힘이 집중돼 있을 무렵인 1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알비란 도시를 중심으로 알비니즘(카타리즘)이 퍼져갔다. 알비니즘이란 우리말로 하면 순결파다.
이 교파는 그리스 정교회와 무슬림의 영향을 받았다. 아니 왜 기독교인이 무슬림 영향을 받느냐고? 종교의 가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믿음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에 닿는다. 아브라함이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의 믿음의 아버지다. 십계명 중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이걸 가장 철저하게 신봉한 사람들은 이슬람인이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에는 마호메트의 그림이 없다. 이슬람은 성화조차 우상으로 봤다. 결국 이슬람은 그림 대신 기하학적인 장식을 추구하게 된다.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 반면 기독교는 성화를 많이 그렸다. 성화는 교회의 수익 사업이기도 했다(황제에게로 가야 할 세금이 교회로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된 로마 황제는 우상 파괴란 명목으로 성상(이콘·우상) 파괴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프랑스의 기독교도 중에서 교회에서 성상을 없애야 하며 영적인 교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나왔다. 성상도 돈과 관련 있는 법. 교황청은 발끈했고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왕에게 엄벌하라고 십자군을 보냈다.
1209년 7월 22일 베지에에 도착한 십자군은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자 학살을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 인구의 절반인 6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그 후 801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카르카손 성은 카타 지역 즉 알비니즘이 퍼져간 이 지역의 중심 도시였다. 남부의 교통 요충지인데다 군사 요새였다. 주변에 9개의 성곽이 있는데 카르카손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종교 전쟁에서 힘이 강한 교황에게 결국 살육당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서 남부 스페인과 더 가까운 동류 의식을 느낀다.
게다가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카탈루냐 지방 사람들이 대거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래서 인근 베지에 주민의 절반 정도는 스페인어를 쓴다. 스페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들이다.
카르카손 성의 스파클링 와인
성을 둘러보자. 성으로 들어서는 출입구에 여인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바로 사라센인의 왕비 카르카스다. 카르카손이란 이름은 카르카스에서 나왔다. 8세기 사라센과 프랑크인들이 전쟁을 벌였다. 사라센 왕은 죽고 식량마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왕비 카르카스가 식량을 성밖으로 던지는 꾀를 썼다. 식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프랑크인들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는 것이다.
성 안에서 먹어보고 마셔봐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파클링 와인이고 하나는 카슐레다. 프랑스 와인 이야기를 하면 보르도나 부르고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포도밭이 가장 넓은 곳은 랑그도크다. 29만ha(8억7,725만 평)로 단일 지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해서 어딜 가나 포도밭이다. 프랑스 와인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모르나? 좋은 와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부분 B급 와인만 생산했다.
와인 만드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이 지역 사람들도 맘이 편할 리 없을 터. 1980년대부터 종자 개량을 했다. 포도나무를 다 뽑아버리고 다시 심었다. 이후 와인 등급이 올라갔다. 최고 등급을 나타내는 AOC를 받은 곳이 보르도는 58개, 랑그도크는 아직까지 20여 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도 다른 지방에 비하면 나쁜 편은 아니란다. 그르나슈, 생소, 카르냥 등 한국인에게 생소한 품종들을 심는데 아직은 발전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마셔야 할 와인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프랑스 최초로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된 곳이 바로 랑그도크다.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난 것만을 샴페인이라고 한다. 와인깨나 좋아한다는 사람은 최초의 스파클링 와인은 샹파뉴의 돔페리뇽이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수도사 돔페리뇽이 샹파뉴로 가서 만든 것이 샴페인이다. 한데 돔페리뇽이 샹파뉴로 가기 전에 랑그도크에서 먼저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게 이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성 안에는 와인생산업자 조합이 운영하는 사업장이 있다. 여기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달지 않고 드라이한 ‘Brut’라고 쓰인 와인을 고르는 게 좋다.
역사가 담긴 프랑스 음식, 카슐레
카슐레는 역사와 관련된 음식이다. 앞서 말했듯 성이 포위됐을 당시 이곳저곳에서 식량을 반입한 주민들은 돼지고기에 콩을 넣고 죽 같은 카슐레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사라센인이라면 이슬람교도인데 이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먹었다니. 해석은 두 가지로 해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만큼 생존이 절박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니면 기독교도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다. 어쨌든 스토리가 있는 음식이니 한 번 먹어볼 만하다. 맛은 뛰어나지 않다. 우리의 부대찌개를 연상시킨다.
카르카손에 가면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역사에는 선악이 따로 없다. 역사를 정의와 불의로 나눌 수도 없다. 인생살이처럼 때로는 무섭게, 때로는 즐겁게 세상을 굴려간다. 그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대한 성곽과 그 안에서 마시는 스파클링 와인을 맛보면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여행 길잡이
에어프랑스www.airfrance.co.kr가 들어간다. 프랑스관광청 www.franceguide.com, 랑그도크 관광청 www.sunfrance.com. www.languedoc.com 카르카손 www.carcasonne-tourisme.com. www.monuments-nationaux.fr 카르카손 인근 고성 호텔에 미슐랭 스타 식당이 있다. ‘레알리스 샤토’인데 식당도 예쁘고 맛도 좋다. auri ac@relaischateaux.com, www.domaine-d-auriac.com(04-6825-7222)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