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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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카와(三河)의 전설을 찾아서

지난달 나고야에 이은 오카자키 지역의 여행기는 한 편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현지에서 그의 흔적을 되짚으며 풀어낸 필자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재해석이 돋보이는 이재언의 일본 기행 두 번째 이야기. (편집자 주)

오카자키성 천수각.

오카자키성 천수각.

이른 아침 7시. 오카자키로 향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는데 직원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객실 내 자전거 주차를 몰래 한 처지라 슬그머니 나가려던 참인데 직원의 반갑지 않은(?) 배웅을 받게 됐다. 알고도 묵인을 해준 것이라면 인사까지도 생략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가리야(刈谷), 오카자키(岡岐), 도요타(豊田) 등을 돌고 오려 한다”고 하자, 고생 좀 할 거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닌 게 아니라 문밖을 나서자마자 맞이한 햇살이 예사롭지 않다. 전날은 주로 오후 라이딩이어서 바닷바람 덕을 본 것 같은데 오늘은 바람마저도 없어 보인다.

오케하자마(桶狹間)
이번 코스는 주로 1번 국도를 이용할 예정이다. 헤매지 않기 위해 일단 나고야 역에서 동쪽으로 1km 이상을 나아가 남북으로 통하는 19번 도로를 만나 남진하다 야쓰다신궁 남쪽에서 1번 국도와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GPS가 가능한 스마트폰을 휴대했지만 비싼 데이터 이용 요금 때문에 어지간하면 지도 찾기를 하거나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전날의 답사 때도 느낀 거지만 1번 국도는 차량이 너무 많고 갓길이 좁아 거의 인도를 이용해야 했다. 호텔을 출발한 지 18km 정도 되었을까, 도요아케(豊明)시에 접어들었다. 이제 오른쪽으로 수백 미터만 더 들어가면 오케하자마(桶狹間) 전적지가 나온다. 이곳은 오와리(尾張, 지금의 나고야)국 약관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2천 명의 소수 정병을 이끌고 4만 대군의 쓰루가(駿河)국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본진으로 돌진해 패퇴시킨 것으로 유명한 전투의 장이다. 일본에서 개발한 컴퓨터 게임에까지 등장해 젊은이들에게 중세사에 관심을 갖게 할 정도로 잘 알려진 전국시대 전투다. 이 전투의 승리로 패권의 향방이 크게 바뀌면서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戰國)의 패자가 되는 발판에 우뚝 서게 되었다. 지금은 주택가로 밀집되어 전장 자체를 온전히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전사와 관련한 전적지, 사찰 및 신사 등이 여러 곳에 산재되어 보존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투가 벌어진 지 45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6월 이래 여러 가지 재연 행사를 했던 모양이다.

오케하자마 신명사(사진 왼쪽). 아이치현 이동 요도.

오케하자마 신명사(사진 왼쪽). 아이치현 이동 요도.

가리야(刈谷)의 두 여인
다시 1번 국도를 따라 6km 정도 가면 후지마쓰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우회전을 하면 지류(知立)시와 가리야(刈谷)시가 나란히 나온다. 두 도시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붙어 있는데 농촌이면서도 공장들이 많은 도시다. 여기서 서쪽의 가리야가 관심을 끄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생모 오다이(於大, 가리야의 영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의 출생지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도시화되어 그곳에서 그녀와 관계되는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여성을 전리품 혹은 볼모로 써먹곤 했던 야만적인 전국시대의 제물이 된 비운의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오다이’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전국시대 여인으로 손꼽힌다. 열네 살의 나이에 친정 가리야와 인접국 미카와 간의 화친 제물로 뽑혀 젊은 영주 마스다이라 히로타다(松平忠政)에게 시집을 가서 적자 다케치요(훗날의 이에야스)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맹국인 쓰루가의 압력에 의해 이혼을 강요당해 젖먹이 아들과 생이별을 한 후 가리야 친정으로 돌아갔으며, 다시금 아주 작은 아구이 성주에게 시집을 가서 3남 4녀를 낳고 살게 된다.

오카자키의 관문 야하기강.

오카자키의 관문 야하기강.

그녀의 생모 게요인(華陽院)은 더욱 기구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오다이의 부친인 가리야의 영주 미즈노 다다마사와 결혼해 5남매를 둔 현모양처였다. 그런데 한때 힘센 인접국 미카와의 영주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이에야스의 조부)가 농으로 건넨 “달라”는 말 한 마디에 남편과 이혼당한 후, 기요야스에게 보내져 자기 친딸의 시어머니가 되어 오다이를 며느리로 맞이해야 했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어이없게도 기요야스(부)·게요인(모), 히로타다(아들)·오다이(딸)가 결혼하는 해괴하고도 망측한 결혼 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핏줄은 다르지만 히로타다와 오다이는 법적으로 남매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은 격이며, 그마저 오래 지속된 혼인이 아니었다. 모녀가 모두 그렇게 불행한 혼인을 정략적으로 겪어야 했던 것이다.

가리야는 그러고 보면 모녀를 모두 미카와(오카자키)로 시집보낸 힘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시내에 조그맣게 세워진 오다이 동상을 보면 얼굴은 둥글넓적하니 평범하지만, 그 내면이 지적이고 덕과 인자함, 사려 깊어 보이는 인자한 어머니상으로 빚어져 있다. 이에야스의 과묵하고 차분한 성격이 모친을 닮은 거라고 전해진다. 실제로 자기 손으로 키우지는 못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두 차례의 오랜 볼모 생활의 고비를 넘기고 열도의 패자가 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멀리서도 항상 아들의 무운장구를 빌었다 한다.

도요타시의 들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도요타시의 들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오케하자마 입구의 고덕원산문. 도요타시의 시계 조형물(사진 위부터).

오케하자마 입구의 고덕원산문. 도요타시의 시계 조형물(사진 위부터).

오카자키(岡岐)

다시 지류시의 1번 도로로 돌아가 13km 정도를 가면 야하기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카자키다. 아담한 농업도시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은 교토나 오사카 못지않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카와의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지만, 미카와의 용맹하고도 의협심 넘치는 무사들의 고향이라는 점을 자랑으로 여기는 듯하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여섯 살 이후 오카자키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소년 시절 13년간 볼모로 떠나 있었거나 혹은 복귀한 뒤에도 영지가 확장되거나 옮겨지는 장년기와 노년의 집권기에는 하마마쓰와 슨푸(지금의 시즈오카) 등지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다.

젖을 떼기도 전 생모와 이별해 모친의 얼굴도 모르며 자랐고, 게다가 볼모로 전전하던 어린 시절 영주인 부친마저 피살당해 천애의 고아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다케치요(소년 이에야스).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미카와 가신들의 충성, 그리고 조모 게요인, 생모 오다이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다.
무사이면서도 내면세계가 탄탄한 슬기로운 지도자로 발돋움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자체도 반대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병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고 조선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풀어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아이치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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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가와(乙川)를 끼고 있는 오카자키성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짜임새 있고 수목이나, 호수로 변한 해자의 경관이 아름답고 편하게 조성되어 여느 성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특히 외성을 끼고 흐르는 오도가와는 야하기의 지천이지만 항상 수량이 풍부하고 하천 둑을 따라 벚꽃나무들이 식재되어 봄에는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수각이 3층에 불과하지만 달리 구릉이 없는 도심을 충분히 조망할 수 있는 높이다.
천수각 전시실에는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계도와 가보들(대부분 갑옷이나 칼들이지만)이 잘 전시되어 있으며, 미니어처들로 성의 일상이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디오라마가 재미를 더한다. 또 성에서 나오는 길에 볼 수 있는 도쿠가와 박물관에서도 미카와 무사들의 활약상을 담은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공원 한쪽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이 있는데 후덕한 인상이면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가 인상적이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이 뛰어난 장수라기보다는 통치에 능한 장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전국시대 무인으로서는 뛰어났지만 국가 경영에는 문외한들이었기에 혼란이 쉽게 가라앉기 어려웠던 것이다. 17세기 초 바로 이 인물의 치세가 후손들에게 물려져 비로소 국기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세기 동안 막부가 정권을 독점한 까닭에, 그 억압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본 사회가 아직도 경직된 분위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의 조선이 무(武)보다는 지나치게 문(文)에 치우친 것이 문제였다면, 일본은 모든 것을 칼로 해결하려 했던 점에서 문제였다. 어찌도 그리 대조적인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일본에서는 과거 사람의 성이나 이름이 자주 바뀌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성인식, 출사, 신분 상승 등의 계기에 의해 성이나 이름이 자주 바뀌곤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엔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썼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문으로부터 받은 성이 마쓰다이라(松平)였으며, 성인관례 후 모토노부(元信), 이후 영주로 활약하면서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다시 오다 가문과 새로운 동맹을 맺으면서 이에야스라 부르는 등 여러 번 개명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여러 자식들 가운데서도 도쿠가와 성을 받은 아들이 있는가 하면, 마쓰다이라라는 가문의 성을 가진 아들도 있다는 점이다.)

에필로그 - 귀로
많이 고달프긴 하지만 다시 나고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방향을 달리해 도요타(豊田)시를 경유했다. 1930년대 도요다자동차 공장이 설립되고 나서 1950년대 후반 ‘고로모(擧母)’라는 시의 이름을 도요타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자동차도시의 면모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금년 세계 도처에서 행해진 대규모 리콜 사태 때문에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듯한 도시의 분위기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시내 초입에 있는 자동차공장이나 연구소 등은 마치 특수부대처럼 삼엄한 철통경비를 서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조차 두려울 정도다. 도요타자동차 공장이 있는 데서 가까운 곳이 바로 도쿠가와의 가문이 시작된 곳이다. 물론 이 지역이 다름 아닌 미카와국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미카와는 이제 군림하기 위해 휘두르던 칼을 버리고 자동차로 세계를 군림하려는 듯, 산업전의 전쟁터로 변한 것 같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아이치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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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취재 협조 / 도서출판 사문난적오카자키(岡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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