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한류 붐을 피부로 느끼다
자전거로 문화의 요지를 돌아보는 그의 기행을 마냥 부러워하는 이에게 이재언은 이번엔 꼭 좋지만은 않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무시무시한 폭염을 뚫고 돌아본 교토는 고생한 만큼 보람도 큰 여행지였다. 나고야, 오카자키에 이은 이재언의 세 번째 일본 이야기. (편집자 주)
히가시혼간지
예정대로라면 오늘의 여정은 ‘아이치 현-기후 현-시가 현-교토’로 이어지는 도카이도센(東海道線) 코스다. 전국시대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딱 한 번 대결했던 곳 오와리의 고마키(小牧), 오다 노부나가의 거성이었던 미노(美濃) 지역의 기후(岐阜) 성, 유명한 전국시대 최후의 혈전지 세키가하라, 비와호를 끼고 있는 오미(近江)를 거쳐 교토로 입성하는 것이었다. 이 코스는 천하의 패권을 꿈꾸는 동쪽의 강자들이 왕도 교토로 진입할 때 지나던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컨디션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긴 했으나 몸이 무거웠다. 전날 미카와 지역을 도는 동안 폭염 속에서 너무 많은 얼음물을 마셨던 탓에 밤새 심한 배탈에 시달렸다. 교토까지의 예상 거리는 150km. 평상시라면 아무 걱정 없이 달릴 수 있는 거리이지만, 예상 외로 폭염이 심해 자전거 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니조 성 니노마루.
컨디션에 자신이 없어 결국 자전거행을 포기하고 다른 교통편으로의 ‘점프’를 결정했다. 나고야 역 근처의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보았지만 토요일이어서 이미 모든 좌석이 예약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신칸센 고속철도를 이용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자전거를 끌고 승차를 시도했다. 일본에서는 자전거를 열차에 바로 싣지 못하고 분해해서 포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전거 가방을 다음 목적지로 먼저 보내버린 터여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상대로 신칸센 개찰구 직원은 포장하지 않은 자전거는 절대로 승차가 안 된다고 했다. 이럴 때를 위해 휴대용 자전거 가방을 지참했어야 했는데 짐을 최소화하고자 집에 두고 온 것이 후회막심이었다. 마침 배낭에 비닐 우의가 있어 그것으로 분해한 자전거를 싸고 테이프로 친친 감아 대충 ‘정체’를 가리고서야 승차할 수 있었다.
가쓰라(桂)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교토 왕궁. 관광객으로 붐비는 로쿠온지 경내(사진 위부터).
예정된 코스를 생략한 대신 교토에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교토 역에 9시 조금 넘게 도착했으니 하루를 더 얻은 셈이다. 역에 도착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쳤다. 더 이상 탈이 나지는 않았으며 식사도 맛있게 했다. 우동에 곁들여 나오는 주먹밥이 전날의 공복을 훌륭하게 채워주었다. 식사 중에 밖에서 젊은 일본인 부부가 자전거를 조립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얼른 식사를 마치고 그들 곁에 다가가 인사를 하고 자전거를 조립했다. 그들은 자전거에 패니어(자전거나 말 등에 좌우로 매어 다는 짐바구니)까지 달아야 할 정도로 짐이 많았다. 하기야 여성은 남자보다 많은 짐이 필요할 것이다. 순식간에 조립을 마치고 혹시 그들이 나와 같은 방향일까 싶어 행선지를 물었다. 나와 반대인 동쪽의 히가시야마 방향이란다. 가능하면 함께 다니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나 혼자 먼저 길을 떠나야 했다. 길동무가 될 거란 기대가 사라졌을 때의 아쉬움이란….
교토 역에서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서쪽 방향에 있는 가쓰라 이궁(離宮)이다. 4km 정도 달리자 교토 서쪽을 종으로 흐르고 있는 가쓰라 강이 나오고, 그 건너 언덕에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운치 있는 가쓰라 이궁이 있다. 17세기 에도 시대에 지은 왕실의 별장과도 같은 곳이라는데 헛걸음을 했다.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밖으로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지체 없이 가쓰라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교토와 오사카를 이어주는 수로의 상류가 되는 가쓰라 강과 아라시 산 주변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과 신사들이 즐비했다. 교토는 마치 말발굽처럼 남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과 신사들이 밀집해 있는데, 시내도 예외가 아니다. 왕실과 수많은 공경들, 막부의 쇼군과 대영주들이 경쟁적으로 사찰 조영에 힘을 기울인데다, 사찰 자체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도 왕도에 모이게 한 원인이리라.
교토의 서쪽을 흐르는 가쓰라 강.
기타 구(北區) 산록도로로 가는 길에 잠시 도에이(東映) 영화촬영소(우즈마사 영화촌)를 둘러보았다. 1975년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참고해 설립한 것으로 일본 특유의 영화 제작 세트가 있는 곳으로, 일본 영화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오전부터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오사카에는 2001년에 별도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이 설립되어 있으나 성격과 기능이 많이 다르다). 사무라이나 닌자를 소재로 한 영화 세트들이 시대별로 실감나게 조성되어 있으며, ‘파워레인저’나 ‘마스크맨’을 비롯한 유명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이 진열된 전시장은 과거의 것임에도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코너다.
교토 니시혼간지. 니조 성 정원. 로쿠온지의 금각(사진 위부터).
북쪽 산록(기타 구)에 있는 키누카게 로(路)는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무로마치 시대의 기타야마(北山) 문화의 중심지로 불린다. 산록도로를 따라 닌나지(仁和寺), 료안지(龍安寺), 킨카쿠지(金閣寺)가 연이어 나온다. 세 사찰 모두 역사가 오래된 큰 규모의 사찰이지만 종파가 다르고 개성도 달리한다. 닌나지는 9세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로 진언종 신사파의 본산이다. 5층탑을 비롯한 규모가 압권이다. 료안지는 임제종 묘신지파에 속하는 것으로 15세기에 후지와라의 별장을 개조해 만든 절로 별장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금각사로 불리는 로쿠온지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15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이 역시 별장 용도를 갖추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화려함을 그대로 전해주는 금박을 입힌 금각으로 대표되는 곳으로 1950년 한 수도승의 방화로 소실된 후 복원된 것이다.
보통의 관광객들은 세 곳 중 킨카쿠지의 금각을 최고로 꼽는다. 그러나 화려함보다 분위기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료안지, 그 가운데서도 석정(石庭)의 운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가지런한 모래밭 위에 놓인 몇 개의 이끼 낀 돌이 연출하는 분위기. 투박하고 적막한 가운데 얻어지는 내면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비(寂)’라는 미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모래밭에 놓인 돌들이 진귀한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고요한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돌들의 모습은 색다른 명상의 경험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료안지와 로쿠온지 사이에 있는 모토토 인쇼 미술관도 인상적이다. 20세기 초 표현주의 화풍을 도입한 화가로 유명한 모토토를 기념하는 미술관으로 외벽 부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막부 권력의 단면, 니조 성
센본도리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교토의 정중앙이라 할 수 있는 니조(二條) 성이 있다. 언뜻 평범한 성으로 보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열고 나서 교토 상경 때 묵을 거처로 축조된 성이다. 10만 석에 불과한 미카와의 태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드디어 열도의 패자가 되어 왕도 한가운데에 자신의 거처를 당당하고 화려하게 마련한 것이다. 겉은 특별히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니노마루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전국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임시 거처가 그 정도이니 에도(도쿄)에 지어진 막부의 거성(지금은 ‘황성’으로 사용)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우수이수바리’라는 회랑으로 모든 전각이 연결되는데, 밟고 지나갈 때 새소리가 나는 독특한 장인의 기술이 들어 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 외부의 침입자를 알리는 경보 음향 장치인 셈이다. 대전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가 메이지 유신을 가능하게 했던 일명 대정봉환, 즉 모든 권력과 재산을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역사적 결의를 했던 곳으로, 전국의 번주들과 가신들이 회의를 했던 장면이 실물 크기의 인형들로 재현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김치 만들기로 즐거워하는 일본 주부들. 한국 전통 춤 강연도 인기다(사진 위부터).
호텔 가까이 접근했을 때 주택가 안에 있는 독특한 사찰 하나를 발견했다. 미부데라(壬生寺)다. 에도 막부 말기 시절 쇼군 상경시에는 경호를 맡기도 하고 평상시에는 시내 치안을 맡았던 신흥 무사 집단인 ‘신센구미’의 거점 사찰이다. 숙소는 니시혼간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니시혼간지는 근처의 히가시혼간지와 함께 일본 불교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사찰로 13세기 말에 창건된 것이다. 웅장한 사원 규모도 그렇지만 밖에 해자가 있는 것이 참으로 특이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절 바깥에 해자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지만 일본의 사찰들은 해자를 갖춘 곳이 많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사찰 승려들이 자신들의 사찰 재산을 지키는 승병 역할을 겸했던 까닭에 전쟁에 참여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오사카 한국문화원 나들이
오후 5시에 숙소 체크인을 한 후, 오사카행 전철을 탔다. 오사카 한국문화원에서 ‘국제환경예술제’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곳에 참여하는 작가들 중 몇 사람과 잘 아는 사이여서 오픈 행사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자전거로 교토 이동을 했더라면 참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 하루를 벌어 여유 있게 저녁 나들이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철에 올랐더니 어찌 된 일인지 기모노 차림의 젊은 아가씨들이 많이 보였다. 전통의 도시 교토가 자랑하는 ‘교토풍’이 있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요도 강에서 열리는 불꽃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그렇게 화사하기 그지없는 기모노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토 사람들이 전통 복장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토의 염색기술과 예술성은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교토 왕궁에 속한 신사의 정원.
오사카 역 근처의 우메다 역에서 내려 인근의 한국문화원을 찾아갔다. 재일거류민단본부에 있는 한국문화원 전시장에서 친한 작가들을 만나자 다들 반갑게 맞이했다. 혼자서 자전거 복장을 하고 있어 좀 민망했는데 축사까지 하라고 떠밀어 어쩔 수 없이 앞에 나섰다. 교토, 오사카 지역의 일본 작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환경 테마의 전시였다. 처음엔 이런 의미 있는 전시라면 중심가에 있는 대형 미술관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아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문화원 관계자의 말은 달랐다. 한국문화원 자체가 하루에도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출입해 문지방이 닳을 정도라는 것이다. 한류 붐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강좌가 많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토요일 저녁 시간인데도 문화원 내에서는 일본인 주부들이 많이 보였다. 많은 일본 여성들이 한류 붐을 타고 한글 외에 김치, 전통 춤 등의 강좌에 때마다 500여 명이 참석한다고 한다. 작가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내 앞에 앉은 일본 작가 한 사람이 자기 아내가 한국 드라마 팬이어서 종종 채널 싸움을 한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말로만 듣던 한류의 실상을 일본 땅에서 들으니 얼마나 흐뭇하던지. 요도 강에서 쏘아 올린 폭죽들이 돌아가는 전철 내부까지도 화사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일본 역사의 심장,교토(京都)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 / 이재언(미술평론가) ■사진&제공 / 이재언, 오사카 한국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