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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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저 아름다운 풍광을 둘러보는 여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테마가 있는 여행에 나서는 이들이 많다. ‘일본 역사의 심장’이라 불리는 교토를 미술평론가 이재언과 함께 둘러보니 정말이지 ‘느낄거리’가 많은 도시임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편집자 주)

히가시야마에서 본 지쇼지와 교토 풍경.

히가시야마에서 본 지쇼지와 교토 풍경.

교토에서의 이틀째,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을 나섰다. 사흘 동안의 다소 여유 있는 일정이지만, 교토에서는 마음이 바쁘다. 천년 수도 교토는 지나치기 어려운 명소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오늘은 북쪽의 라쿠호쿠(洛北) 지역에 있는 ‘도판명화의 정원’부터 시작해 히가시야마 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계획하고 있다. 니시혼간지와 히가시혼간지를 거쳐 가와라마치(河原町)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전날 잠시 들렀던 교토어원(御苑)이라는 황궁공원을 관통해 올라갔다. 장측의 길이가 1.5km에 이르는 드넓은 공원 안에 문이 굳게 닫힌 성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침 운동이나 산책하는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도판명화의 정원
이마데가와도리를 지나 가모가와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식물원 입구 좌측에 ‘도판명화의 정원’이 나온다. 교토 관광 안내책자에는 그다지 비중 있게 소개되지 않았지만 어떤 곳인지 궁금해 일부러 찾은 길이었다. 개장 시간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아 교토의 성소로 여겨지는 북동쪽 히에이산(比叡山) 기슭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로프웨이를 타고 히에이산 정상으로 올라가 비와(琵琶)호의 절경을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해 역까지만 올라갔다. 하긴 거기까지만도 언덕이 많아 아침부터 땀을 비 오듯 쏟아야 했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한 ‘도판명화의 정원’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색다른 아이디어가 눈에 띄었다. 건축 거장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반지하식 건축물 내에 다양한 형태의 벽을 만들어 명화들을 세라믹 타일로 재현한 것이다. 도자 예술의 오랜 전통을 가진 교토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거장 미켈란젤로나 고흐 등의 명화나 일본 전통 회화 작품 이미지를 타일에 전사해 실물 크기로 조성해놓은 벽의 연출이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원래는 꽃 박람회를 위한 문화 시설이었던 곳이 예술 정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타일 전사기술이 좋아지면서 실제 건축이나 공공 미술에 활발하게 응용될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좋은 시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길’을 걷다
동쪽 히가시야마 기슭으로 핸들을 돌렸다. 긴가쿠지(銀閣寺)로 알려진 지쇼지(慈照寺)로 가다 보면 ‘철학의 길’이 나온다. 근대 교토를 상징하는 철학자 니시다 이쿠타로(西田 幾多郞, 1870~1945)가 산책을 하며 사색을 즐겼던 곳으로 유명하다. 주객(主客)의 일체를 통한 ‘순수 경험’ 세계를 실재의 근본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그의 철학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동서 문물의 조화를 고민하던 일본 청년들만이 아니라 군국주의자들에게까지 영감을 주었다. 일본 현대미술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재일 화가 이우환씨도 일본 유학 초기 니시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전거에서 내려 니사다 이쿠타로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걸어갔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 군국주의의 논리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어딘가 멀게만 느껴지는 애증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입구에 다다랐다.

1 삼나무 향이 가득한 철학의 길. 2 도심에서 열리는 도자기 장터.3 오카자키공원 내의 교토시립미술관.

1 삼나무 향이 가득한 철학의 길. 2 도심에서 열리는 도자기 장터.3 오카자키공원 내의 교토시립미술관.

담장처럼 다듬어진 동백나무길이 일본 문화의 특징을 그대로 전해준다. 절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을 보니 료안지의 것과는 또 다른 기하학적 구성이 독특하다. 사찰로 지어지기 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지은 별장으로 이 역시 중세 일본 상류층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 곳 중 하나다. 황실 가족이나 쇼군 가족들이 누린 고급스럽고 호사스러운 교토풍의 이러한 취미들은 다도, 사원, 정원, 의상 할 것 없이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모방되곤 했다. 원래 별장으로 지어진 까닭도 있겠지만 정원 조경과 아담한 사원풍의 건축이 화려함을 강조한 금각사보다는 훨씬 세련되게 느껴진다. 긴가쿠지에서 야쿠오지신사까지 2km 남짓 이어진 철학의 길은 시원한 삼나무 숲에 연해 있어 여행자에게도 안식을 준다.

문화 시설 단지, 오카자키공원
철학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오카자키공원과 헤이안신궁이 나온다. 도쿄에 메이지신궁이 있다면 교토는 헤이안신궁이 있다. 그 신궁이 목적지가 아니라, 그 앞에 미술관 단지가 조성되어 그리 가고자 하는 것이다. 교토국립근대미술관, 교토시립미술관, 호소미미술관, 칸포미술관 등이 밀집돼 있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 등의 문화 시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휴관이어서 지나친 노무라미술관까지 합치면 이 지역에 얼마나 풍부한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잠시 국립근대미술관 관람을 하기로 했다. 실내로 들어서자 우선 시원한 공기가 반갑다. 먼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미술관 카페테리아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마침 기획전으로 색다른 전시를 하나 하고 있었다. ‘생존의 윤리’로서 의료, 생명, 우주, 환경 등 현대사회의 현안과 예술이 접목된 아주 색다른 인터액티브 예술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덕분에 초음파 치료기 같은 기구 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한 참여 자체가 인터액티브 전시의 핵심인 것이다.

지쇼지 입구의 동백나무길.

지쇼지 입구의 동백나무길.

도자기 장터
교토가 염색과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침 기요미즈데라 아래 고조도리(五條通)에서 도자기 장터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다. 500m가 넘는 대로의 양쪽 인도에 수많은 작가와 공방이 참가해 직접 제작한 다양한 작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교토 인근의 도자공방들이 망라되어 이러한 장터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것이다. 가격은 서울 인사동에서 파는 작품보다는 상당히 높은 편인 듯했다. 우리의 광화문광장이나 청계천 같은 곳에서도 이런 이벤트가 정기적으로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작품 소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작가들에게도 창작 의욕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것들이 더러 눈에 들어와 사고 싶었지만, 이미 많은 짐을 짊어진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5 교토황궁 공원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 6·7 교토국립근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 ‘생존의 윤리’와 작품을 즐기는 관객들.

5 교토황궁 공원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 6·7 교토국립근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 ‘생존의 윤리’와 작품을 즐기는 관객들.

장터에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자전거 단체 팀이 있어 인사를 나누고 함께 움직였다. 비교적 평범한 복장을 하려 했지만 자전거 전용 복장 특유의 튀는 점이 마음에 걸렸는데, 무리 지은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또 그 무리에 섞여 있다 보니 오히려 나의 차림이 평범해 보여 안도가 되었다. 기요미즈데라는 798년 창건된 법상종 사찰로 1200년도 더 된 고찰이다. 지금의 건물은 기독교 탄압에 열을 올린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인 이에미쓰가 지은 것이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히가시야마의 산세가 그리 빼어나지는 않지만 웅장한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기요미즈데라 자체가 낭떠러지에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절이라니 그조차 대단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사찰 안에 신사가 참으로 많다는 것. 우리 절에 무속적인 삼신각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에필로그
기요미즈데라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혼노지(本能寺)에 들르고자 가모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교토시청을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시내 어디서도 시청으로 가는 표지판은 흔했다. 2km 남짓 가니 교토시청 맞은편 재래시장 입구에 조그만 절의 모습이 보였다. 글씨를 보아하니 분명히 혼노지가 맞았다. 이곳이 전국시대 패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숨진 곳이란다. 하지만 지금의 혼노지는 원래의 건물이 불타 소실된 이후 히데요시 시절에 현재의 건물로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영화 ‘카게무샤’에서 본 후리후리한 키에 형형한 눈빛, 직선적인 성격의 오다 노부나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영화 속 그는 전통적인 무사들의 복장이나 두발이 아닌 개성 있는 차림의 영웅이었다. 쉰도 넘기기 어려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영화에서 보면 이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인생 오십 년
천하의 것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은 것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있다더냐.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교토에서 日 역사 속 인물과 함께 걷다

필자 이재언…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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