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다움의 고향 전주 한옥마을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우리다움의 고향 전주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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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 주전자만 시켜도 상다리가 휘어지게 나온다는 안주상을 받아보고 싶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주는 꼭 들러야 할 여행지 중 하나로 마음에 두었던 곳이다. 학회 참석차 방문한 전주에서 순간 자전거라이더로 ‘변신’한 필자 이재언의 여정이 내내 부럽기만 하다. (편집자 주)

오목대에서 본 한옥마을.

오목대에서 본 한옥마을.

호남고속도로 전주 톨게이트. 한옥 외양의 톨게이트와 ‘전주’ 서체 현판이 인상적이다. 시내로 들어가는 기린대로 초입에서 통과하게 되는 ‘호남제일문’이라는 웅장한 한옥식 관문에서 다시 한번 호남이 가진 자부심의 실체와 포스가 말없이 전해졌다. 마침 ‘한국조형디자인학회’ 발표를 맡게 되어 1박 2일 일정으로 전주를 찾았다. 전주는 누가 뭐라 해도 전통이 살아 숨쉬는 명소 도시다. 한옥이 살아 있고 그 안에 우리의 소리, 우리의 맛, 우리의 글씨 예술과 종이가 ‘우리’를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곳이다. 몇 차례 지나치기만 했던 전주를 이제야 비로소 자전거로 구석구석 둘러볼 기회를 잡은 것인데, 첫인상부터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고 도착한 곳은 완산구에 자리한 전주대학교. 오전 행사와 점심식사가 끝난 뒤 지인들과는 저녁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자리를 떴다.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설 때 몇몇 지인들 앞을 지나쳤지만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누가 이 완벽한 변신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호남제일문. 경기전 이태조의 어진.

호남제일문. 경기전 이태조의 어진.

전주학(全州學)의 현장으로
바로 전주대학교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삼천변 근처에 문학대공원이 있어 먼저 그곳으로 향했다. 문학대는 고려 공민왕 때 성리학자 황강 이문정이 후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곳으로 이문정의 후손 이백유가 세운 황강서원이 바로 발아래 있다. 곤지산에 있던 것이 서원철폐령 이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신도시 개발 중에 청동기 고분 유적이 발굴되어 공원화되었으며, ‘마전유적지’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 초기의 유적으로 고분들의 구조와 유물들을 밖에서 볼 수 있게 유리관으로 만들어 보존한 공원으로 현재 고고학적 분석이 진행 중인 상태라 한다. 아직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구한 시간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로부터 다시 남쪽으로 전주대 앞을 지나쳐 내려가면 국립전주박물관과 시립전주역사박물관이 나온다. 한쪽은 국립이고, 또 한쪽은 시립으로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라북도 전역의 문화재와 역사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데 비해 시립전주역사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전주의 역사와 얼을 간직한 곳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규모야 국립전주박물관이 훨씬 크지만 시립전주역사박물관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 이유는 ‘전주학(全州學)’이라는 낯선 학문의 발신지임을 천명했다는 점 때문이다. 전주학의 요람임을 알리기 위해 시립전주역사박물관은 디스플레이 자체가 온갖 의욕과 아이디어로 차 있는 듯 보였다. 마침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시민 교육의 장으로서도 좋은 기능을 하는 것 같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전주는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이번 여행의 주제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국립전주박물관. 남고산성 억경대 정상. 100여 년 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전동성당(사진 위부터).

국립전주박물관. 남고산성 억경대 정상. 100여 년 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전동성당(사진 위부터).

전통 전주의 백미 한옥마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1번 도로를 따라 우전교와 완산교를 건너 7km 정도를 달려 한옥마을에 당도했다. 보수 중인 풍남문을 지나 태조로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동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톨릭 순교지 위에 1908년 설립된 이 성당은 붉은 벽돌로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고풍스러운 한옥마을과 조화를 이뤘다. 바로 맞은편에는 조선왕조의 성역이라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하여 조선 태종 임금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기 위해 궁궐 규모로 축조한 것이 경기전이다.

그 뒤로는 교동아트센터와 최명희문학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교동아트센터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담하게 전주 미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전시를 하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접근성도 좋은 편이고 개방적인 분위기 등 여러모로 이용객을 편안하게 해주는 안식처 같았다. 「혼불」로 널리 알려진 최명희는 우리의 풍속을 가장 아름다운 국어로 혼을 다해 쓴 작가다. 통영에 「토지」가 있다면 전주엔 「혼불」이 있다. 물론 소설의 주 무대는 가까운 남원이다. 특히 최명희의 글쓰기는 회화적인 묘사도 탁월하지만 전통 시조의 4언 절구 리듬을 연상하기에 충분한 운율의 글쓰기로 독자에게 소리 장단을 전해주는 듯한 치밀함이 돋보인다. 문학관에서 그의 육필 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한옥마을의 백미는 태조로를 가로지르는 은행나무길 쪽으로 연해 있는 많은 한옥들이다. 한옥마을을 둘러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서각예술이다. 집집마다 현판이나 문패, 간판 등이 붙어 있는데 하나같이 그 글씨들이 판각으로 되어 있다. 그 글씨의 다양한 서체와 조형미가 탄성을 자아낸다. 처음엔 한옥 풍경 사진을 주로 찍다가 나중엔 서각 간판만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특히 강암서예관을 통해서 전주가 어떠한 서예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호남제일문의 거대한 현판도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였다. 글씨만 집중적으로 살피다 보니 얻은 적지 않은 수확이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져갈 무렵 한옥마을 내에서 현대미술 전시를 전문적으로 하는 아카(AKA) 갤러리를 찾았다. 서울에서 더 잘 알려진 조각가 국경오씨의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로 전국 작가들의 작품을 유치하며 활발하게 전시활동을 하는 곳이다. 지방 도시에서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점을 잘 알면서도 예향 전주의 자존심을 위해서 나선 이 부부의 의지가 가상해 보인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국경오 작가와 전주에서는 처음 이루어진 만남. 한옥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오목대에 함께 올라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모자랐는지 이야기꽃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도 끊이지 않았다. 산해진미의 압축 식단인 전주비빔밥 만찬이 어찌 빠질 수 있으며 전주 별미인 막걸리 한 잔을 어찌 곁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고산성에서 본 전주시 전경. 한옥마을 풍경.

남고산성에서 본 전주시 전경. 한옥마을 풍경.

남고산성
전주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날, 아침 공기가 많이 쌀쌀해졌다. 오늘은 남고산성을 오르기로 맘먹었다. 한옥마을에서는 그리 멀지 않지만 전주대 쪽에서는 한참을 동남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 고덕산 줄기인 남고산에 축성된 남고산성은 901년 견훤이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고산 초입부터 경사가 대단히 급했다. 남고사로 들어가는 서문 방향 길에서는 경사가 더 험해 자전거에서 내려야 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관목더미 뒤에 자전거를 숨겨두고 걸어 올라갔다. 산세가 그다지 험하지는 않지만 소나무 숲이 잘 우거져 아름다운 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벽이 높지는 않지만 절벽 지형을 이용해 축성해서 요새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더없이 좋아 보였다. 둘레가 총 5km 남짓하니 상당히 규모가 큰 산성이다.
덕진공원의 겨울 풍경.

덕진공원의 겨울 풍경.


남고사 맞은편으로 조그만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이름 하여 만경대이다. 그곳에 포은 정몽주의 ‘우국시’가 암각되어 있다는 설명판이 있어 그 시가 새겨진 바위를 찾아다녔다. 이성계가 왜구 퇴치 작전 중 조상들의 고향인 전주에 들렀을 때 포은이 종사관으로 수행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지역의 원로들과 가진 잔치 자리에서 새나라 건국의 야심을 언뜻 비치는 이성계의 모습을 보고 이곳 만경대에 올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쓴 시가 바로 ‘우국시’라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전해지던 시를 영조 22년 진장(鎭將) 김의수가 암각한 것이라 하는데 비밀스럽게 새기느라 그랬는지 글씨가 작고 희미한 상태였다. 태조의 성역 전주에 포은의 암각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맞은편 봉우리의 억경대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전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성을 쌓아 완산벌을 지키려 했던 견훤은 제왕까지는 몰라도 장수의 안목을 가졌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최명희문학관. 마전고분 유적지. 종이박물관의 한지체험실. 전주에서 만난 조각가 국경오 .

최명희문학관. 마전고분 유적지. 종이박물관의 한지체험실. 전주에서 만난 조각가 국경오 .


에필로그
점심때가 훨씬 지난 2시쯤에야 하산해 또 비빔밥으로 식사를 했다. 비빔밥도 식당마다 그 맛이 달랐다. 식사를 마치고 전주천에 연한 순교지로 유명한 치명자산 성지와 자연생태박물관을 거쳐 맑은 전주천 물을 굽어볼 수 있는 낭떠러지에 세워진 한벽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기린대로를 따라 6km쯤 가면 ‘소리문화의 전당’이 나온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 견줄 만한 웅장한 규모가 인상적이다. 도대체 이 넓은 곳에서 어떤 문화 행사들이 펼쳐지는지 궁금했다. 공연뿐만이 아니라 전시, 아동 체험 프로그램, 대중 가수의 공연 등이 함께 열리는 복합 문화공간 같았다. 그러나 넓은 전시실들이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좀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북대를 관통해 덕진공원에 잠시 들러 시민갤러리에 들렀더니 마침 사진 동호회의 전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 넓고 세련된 공간은 아니지만 시민들과 함께하는 그런 전시활동이 좋아 보였다. 사진 작품들의 내용도 좋아 열심히 보던 중에 전시장 지킴이로 일하는 분이 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좋은 작품 보는 것만도 고마운데 차까지 주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시 전주천을 건너 마지막 코스로 ‘종이박물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종이와 관련되는 문화를 보여주는데 한지 만들기 체험까지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예쁜 수제 한지 한 장을 만들고 나오면서 얻은 뿌듯함. 아이들이 참 좋아할 만한 체험 코스일 게다. 전주에서 한옥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개성 넘치는 명품 서체들이 넘쳐나는 배경으로 풍부한 종이가 한몫했던 것은 아닌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우리다움의 고향 전주 한옥마을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우리다움의 고향 전주 한옥마을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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