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철기문명을 열어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가야. 현세인들에게는 그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의 시대로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침 부산으로 가는 지인의 차편에 편승해 대구에서 멀지 않은 경북 고령군에서 하차했다. 대가야국이 있었던 고령을 돌고 나서 밀양으로 이동, 1박을 하고 나서 바로 금관가야의 김해로 가는 일정이다.
며칠 전 포항·경주 지역에 쏟아진 폭설의 여파 때문인지 성주, 고령 일대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읍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야 유적지는 가야왕궁 터다. 조선시대 향교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왕궁 터다.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주산의 기슭으로 현재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령읍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미루어보건데 충분히 왕궁이 있었을 법하다. 바로 뒤에는 아담한 고령읍을 감싸듯 주산(310m)이 내려다보고 있다.
주산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봉분들이 포도송이처럼 모여 있어 고령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이색적인 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충동적으로 고분군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어차피 등산로 입구가 대가야박물관 쪽에 있어 먼저 약 1.5km 거리에 있는 박물관으로 갔다. 개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일단 자전거를 두고 바로 배후에 있는 주산 기슭에 있는 고분군을 따라 등산을 시작했다. 크고작은 고분 200여 기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밀집되어 있는 곳이 지산동 고분군이다.
1970년대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의해 1,500년 이상 잠들어 있던 지하의 세계가 빛을 볼 수 있었다. 주요 유물들이 무수히 도굴되었음에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환두대도나 금관, 토기, 마구, 장신구 등이 상당량 출토되었다. 가야의 문명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쉬운 것은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물들이 보여주는 재료와 형태, 용도, 양식 등을 통해서도 우리의 시간 여행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었더라면 고대와의 교감과 소통은 한결 더 긴밀해졌을 텐데 말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장터에서 국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 33번 국도를 따라 밀양으로 장거리 이동을 했다. 거의 100km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지체 없이 떠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울은 한낮의 기온이 영하인데, 이곳은 영상 5℃ 정도로 자전거 타기에 괜찮은 조건이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지형들을 유심히 살폈다. 가야 번영의 밑거름이 된 철의 생산이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내내 궁금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이른 아침의 공기를 가르며 김해를 향해 달렸다. 밀양에서 김해를 향해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58번 국도를 따라 동쪽 삼랑진을 거치는 길은 김해 시내로 가는 길이며, 25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김해 서쪽에 있는 진영과 진례 방향으로 시내와는 좀 거리가 멀다.
후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먼저 진영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와 봉하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정치적인 호불호를 떠나 우리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곳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진영읍에서 봉화산을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워낙 유명해진 곳이어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기만 해도 제대로 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야트막하면서도 산세가 수려한 봉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오전 10시 전후의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방문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추모의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인파를 따라 봉화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여러 가지로 착잡한 심경이었다. 차분하고 진지한 참배객들의 표정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움직이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크가 방주형(Arc)에서 온 것인 줄 알았는데 건축(Architecture)의 줄임말이었다. 도자와 건축이라니 획기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전시장, 창작관(레지던시 프로그램), 체험관 등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정성스럽게 잘 단장되어 휴일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찾고 있었다. 도자 산업체들이 밀집된 진례, 나아가 김해의 시민들이나 업체들에 중요한 정보와 교류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왕릉의 옆에 있는 한옥촌까지 함께 둘러보고 나서 수로왕비릉을 향해 올라갔다. 김수로왕 탄생 설화의 현장 구지봉(龜旨峰)과 도래인(渡來人)으로 알려진 수로왕비 허황옥릉이야말로 김해의 배꼽과도 같은 곳이다. 구지봉에 올랐을 때 마주한 바위가 눈에 띄었다. 마치 자라가 머리를 내밀어 맞이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 구지가(龜旨歌,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라 하여 외웠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래’라는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현장이다. 노래의 온 구절과 의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튼 자라 머리 같은 바위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수로왕비릉을 거쳐 들렀다가 바로 사충단을 끼고 분산성(330m)으로 올라갔다. 경사가 심해서 자전거를 끌다가 타다가 하다 보니 정상까지 30분 정도가 걸렸다. 봉수대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김해의 젖줄 서낙동강이 햇살을 반사하면서 평야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분산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성으로 김해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김해 시민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성이 언제 처음으로 축성되었는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지만 그 연원은 가락국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부의 눈으로 보아도 이 이상의 요건을 가진 천혜의 요새는 없으니 고대의 영웅들에게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분산성의 맞은편에는 산세가 빼어나고 기암절벽이 많은 신어산이 있으며, 중턱쯤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사찰들의 풍경 또한 볼 만하다. 이틀간 고대 가락국들로 떠난 시간 여행을 이제 마쳐야 할 시간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심야 버스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갖는 동안에도 많은 기억들과 환상들이 떠나질 않는다. 가야여, 우리 또 봐요!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