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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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에 가면 연인을 위한 2인용 자전거가 있긴 하지만 보통 자전거를 생각하면 왠지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라는 느낌이 먼저 든다. 하지만 필자에게 있어 이번 라이딩만큼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든든한 아들이 함께해서 더욱 행복했던 큐슈 여행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높이 234m 후쿠오카 타워.

높이 234m 후쿠오카 타워.

설 연휴를 맞아 아들과 둘이서 5박 6일간 일본 큐슈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 신모에다케 화산 폭발과 후쿠오카 지역 눈 소식도 있었지만 어렵게 마련한 기회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한 달 전 군 전역 후 복학을 앞둔 아들과 함께하는 부자간의 자전거여행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터다.

막상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 보니, 눈 소식과는 달리 맑고 포근했다. 교환교수로 체류 중인 김명식 화백(동아대 교수)과 해후한 후 그의 배려로 하카타(博多) 역 근처의 호텔로 이동해 자전거를 조립할 수 있었다. 아들은 내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크로스컨트리 MTB를, 나는 출퇴근용으로 타던 사이클을 챙겨 갔다. 자전거 조립 후 밖으로 나가 밤까지 호텔 주변의 캐널시티를 순회하며 자전거 점검도 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다음날의 본격적인 투어에 대비해 이동에 필요한 정보들을 확인해두었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설렘도 컸지만 아들이 최근 자전거를 제대로 타본 적 없는 초보인지라 장거리 투어를 잘 수행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후쿠오카 가로지르기
호텔에서 아침 식사로 제공하는 일본식 주먹밥 오니기리를 먹고 거리로 나섰다. 바쁘게 오가는 도시의 인파는 한국의 아침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전거 출근족이 많다는 것. 아들의 눈에도 그것이 흥미로운 광경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출근길 러시아워의 인파들을 헤치며 전날 들렀던 캐널시티를 거쳐 나카(那珂) 강에 다다랐다. 캐널시티는 대우건설이 시공한 거대 쇼핑몰로 물과 조형적 건축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평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인데 현재는 봄을 맞아 보수공사 중이라 다소 산만한 분위기였다. 나카 강을 건너 메이지 거리로 접어들면 왼편에 특이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아크로스 후쿠오카’라는 건물로, 뒤편 외관은 스텝가든이라는 계단식 정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공연장 등을 갖춘 복합 문화공간과 현대식 정원, 텐진 중앙공원, 나카 강 등이 함께 어우러진 이곳은 그야말로 도심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텐진에서 1km 정도 서쪽으로 가면 아카사카 근처에 마이즈루(舞鶴) 공원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후쿠오카 성터다. 일본의 역사적인 도시를 보면 대부분 성이 보존되거나 복원되어 있는데, 이곳만 유독 광활한 면적의 성터를 그대로 둔 채 공원, 경기장 등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해자는 이제 수변공원과 오호리 호수로 변신해 후쿠오카 도심 속 최대의 공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후쿠오카 성은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였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7년에 걸쳐 축성했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고색창연한 성벽과 거대한 고목들이 이 성의 역사와 규모를 말해주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평산성임에도 성벽 위에 오르면 후쿠오카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는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쾌적한 환경이다.

나카강의 풍경.

나카강의 풍경.

큐슈는 한반도와 인접해 있다 보니 우리와 관련된 기억이 많을 듯했다. 물론 서로에게 마냥 좋은 기억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후쿠오카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대화를 해보니 의외로 역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의외로 한국어를 잘 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인기를 끌었던 우리 드라마 ‘대장금’이나 ‘동이’ 등에 자극을 받은 일본이 역사 드라마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와 관련된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지식은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역사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어떤 피해의식 때문에 유난을 떠는 것처럼 비치지는 않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마이즈루 공원을 벗어나면 오호리(大豪) 호로 진입하는데 그 길목에서 후쿠오카 시립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미술관으로는 현립미술관, 아시아미술관이 언급되지만 입지나 접근성으로는 시립미술관을 우선으로 친다. 마침 시립미술관에서 일본 내 엘리트 현대미술작가회 그룹인 이기회(二紀會)전이 열리고 있어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현대미술 작품은 대부분 비슷해 보이지만 나라마다 차이는 분명 있다. 물론 한국 현대미술과 일본 현대미술의 차이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일본의 작품은 논리성과 개념적 성향을 많이 보이는 데 비해 한국의 작품은 에너지와 스케일이 많이 강조되는 듯하다. 오호리 호가 내다보이는 미술관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아들은 미술관에서의 식사도 색다른 경험이라 느꼈는지 셔터를 눌러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오호리 호를 따라 북서쪽으로 올라가 하카타 만에 도착했다. 한옥식 건물로 지어 더욱 반가운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야후 돔(Dome)을 지나 마리나 존으로 향했다. 고요하고 눈부신 현해탄이 나타났다. 인공 백사장으로 알려진 모모치 해변 한가운데는 베네치아풍의 별장 같은 웨딩 리조트가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 이미 봄의 문턱에 접어든 후쿠오카의 해안에는 많은 상춘객들이 찾아들어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한국인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전날 넘어져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필자는 차마 카메라 앞에는 서지 못했다. 모모치 해변에서 나온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다음 코스가 바로 후쿠오카 타워다. 높이 234m로 도쿄 타워 다음으로 일본에서 높은 건물로 알려졌다. 전망대 한쪽에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는 미니 신사가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조선 도공들의 한이 서린 가라츠로
나흘 후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가라츠로 이동해야 했다. 지도를 봐서는 50~60km 정도만 가면 될 것 같은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전거 주행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오후 3시에 출발하면서도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라츠는 보통의 여행자들이 잘 들르지 않는 곳이다. 굳이 가라츠로 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전진기지가 있었다는 점과 조선에서 잡혀온 도공들이 수용되어 도예의 나라 일본의 신기원을 연 곳이라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라츠(唐津)라는 이름 자체가 우리 ‘당진’과 같아 정감이 가기도 한다. 물론 중국이나 조선과 많은 교역이 있었기에 생긴 지명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곳이다.

모모치 해변의 봄날.

모모치 해변의 봄날.

라이딩에 서툰 아들을 데리고 가는 길이라 3시간만 지나도 해가 져서 어두워질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서쪽으로 가는 202번 국도를 따라 가는 길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자전거 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고 눈앞에 펼쳐지는 농촌 풍경이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토시마(系島)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예상치 못한 난관이 많았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바닷가로 달린다는 것은 감안했으나 갓길도 없는 길이 기다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동해안 7번 국도와 흡사하지만 노폭이 좁은데다 거의 갓길이 없다고 보면 된다. 굽이굽이 굴곡이 심한 길에 대형 트럭이 줄을 지으며 스치듯 달리는 바람에 정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오히려 초행인 아들은 속으로 ‘자전거 여행이 원래 이렇게 위험한 것인가 보다’ 하며 묵묵히 따라왔다고 한다.

호수로 조성되어 있는 후쿠오카 성터의 해자

호수로 조성되어 있는 후쿠오카 성터의 해자

아크로스 후쿠오카의 스텝가든. 후쿠오카 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5

아크로스 후쿠오카의 스텝가든. 후쿠오카 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5

아들의 속도를 감안해 시속 15km 정도로 달리다 보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현해탄 방향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석양이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했지만 여유 있게 즐길 형편이 못 되었다. 시카카(鹿家)에서 가라츠까지 남은 거리가 12km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지점부터 드디어 아들이 탈진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대로 물과 회복제를 먹이고 어깨를 다독였다.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내심 아들 앞에서 건재를 뽐내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로와 격려의 말 뒤에 ‘아들아, 아빠가 아직은 건재하지?’라며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혹시 아들이 눈치 채지 않았을까.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가라츠의 명품 소나무 숲 니지노마쓰바라(虹ノ松原)가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방풍림인 듯한 이 숲이 언제 조성된 것인지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장관 앞에서 소나무를 좋아하는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나무 숲이 이렇게 낯선 여행자의 넋을 빼앗았듯이 400년 전 강제로 잡혀왔던 조선 도공들의 마음까지도 빼앗았던 것은 아닐까. 과거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잡혀왔지만 훗날 포로 송환에 응하지 않았다는 서글픈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한 대우를 받아서만은 아닐 거라 믿는다. 조선에서 천대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마다했을까. 그것이 내겐 내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가라츠로 가는 길에서 만난 석양.

가라츠로 가는 길에서 만난 석양.

큐슈 자전거 여행 개요
* 일정
후쿠오카(1박)-가라츠(1박)-나가사키(1박)-구마모토(1박)-후쿠오카(1박)
* 총거리 320km
- 자전거 이동: 200km(시내 답사 거리 포함)
- 열차 이동: 120km
* 비용 184만원 (2인, 5박 6일)
- 항공: 84만원(2인)
- 호텔: 55만원(2인 5박, 조식 포함)
- 기타 비용: 45만원(2인 입장료 및 식사, 열차요금 등)
* 자전거 운송 전용 가방 패킹 후 항공수하물
* 전체적인 난이도 및 조언 산지가 많으며 도로 상태가 썩 좋지 못함. 최소 1번 이상의 장거리 여행 경험이 있는 자전거 애호가들에게 적합한 코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화해의 땅 큐슈_후쿠오카에서 가라츠까지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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