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츠-이마리-아리타’로 이어지는 도자기 여행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카라츠-이마리-아리타’로 이어지는 도자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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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연휴를 맞아 아들과 둘이서 5박 6일간 일본 큐슈 자전거 여행을 다녀온 필자의 두 번째 이야기다. 전설의 도공 이삼평의 흔적에서부터 로맨틱한 여행지 하우스텐보스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여정이다. (편집자 주)

카라츠 성에서 본 니지노마츠바라.

카라츠 성에서 본 니지노마츠바라.

카라츠(唐津)에서의 하룻밤, 과분한 호사를 누렸다. 멋진 방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사실을 아침이 되어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탄성을 지르며 아들을 깨웠다. 아들도 눈을 비비며 창밖의 장관에 감탄했다. 무지개를 일컫는 니지노마츠바라(虹の松原) 소나무 숲과 현해탄이 옅은 안개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호텔 꼭대기 층 식당에서 보는 풍경은 더욱 근사했다.

절경을 바라보다 보니 다른 일정을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쉬움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의 좋은 인상과 추억을 거두었다는 뜻이리라. 오늘도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 서둘러야 한다. 뷔페에서 포식을 마치고 바로 니지노마츠바라 숲 속으로 진입했다. 방풍림으로 조림된 곳이다 보니 곧게 자란 나무들이 단 한 그루도 없었다.

하우스텐보스 풍경.

하우스텐보스 풍경.

소나무 숲을 빠져나와 카라츠 성으로 올라갔다. 밖에서 볼 때는 천수각의 모습이 웅장해 보였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다. 그러나 성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최고의 풍경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위치이면서도 성 주변의 동태를 감시하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성에서 절경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다. 임진왜란 당시 근처의 나고야(名古屋) 성과 함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카라츠 성. 몇 년 전 복원을 마치고 새 단장을 했지만 한국 측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준공식을 조용히 치렀다고 전해진다. 카라츠는 과거 한반도에 자주 출몰했던 ‘왜구’라 불리는 해적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고, 마츠우라 강 하구로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복잡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왜구들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도공 이삼평이 신으로 모셔진 아리타의 도산 신사(사진 위). 도자로 만든 도산 신사의 토리이.

조선 도공 이삼평이 신으로 모셔진 아리타의 도산 신사(사진 위). 도자로 만든 도산 신사의 토리이.

도향(陶鄕), 이마리를 향해
잠시 관광 안내소에 들러 이마리(伊万里)로 가는 도로 사정을 물었다. 여성 안내원은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었다. 202번 도로는 가깝기는 하지만 산지가 많아 자전거 통행이 어려울 것이라며 다른 우회로를 가르쳐주었다. 이마리와 아리타(有田)에 도착하거든 참고하라고 지도를 몇 장 챙겨주기까지 했다. 가르쳐준 대로 40번 도로를 택했는데 주로 마츠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마츠우라를 따라 가는 길에 도자기 공방이나 공장들이 많이 보였다. 어쩌면 저기 종사하는 사람들 중 분명히 조선 도공의 후예들도 있을 터라 길 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도로 사정이 전날보다는 나았지만 불편하기는 여전했다. 특히 완충이 잘 되지 않는 사이클을 타고 인도의 턱을 넘어 다니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35km 정도 주행 끝에 이마리에 도착했다. 평상시 출퇴근 때 거리인데 이상하게도 멀고 힘겨웠다. 아담한 이마리는 여러 개의 강과 하천이 합류되는 하류에 자리 잡은 도자기 도시이다.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 여러 곳 있지만 이마리와 아리타가 특히 유명해, ‘이마리-아리타’는 세계적인 도자 브랜드로 알려져졌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조선 도공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말이다. 이마리는 시내 곳곳의 공공미술 작품들이 모두 도자로 제작된 것이 인상적이다. 이마리와 아리타의 도자기는 조선 백자의 기술을 도입했을 때만 해도 조선 백자의 소박미를 탐미적으로 추구하다가 산업화 추세 속에 상업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원색의 문양들이 장식되기에 이른다(이에 비해 카라츠의 도자기는 조선의 막사발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공 조형물, 대형 벽화, 보도블록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도자로 제작되어 과연 도자 도시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도자산업은 침체 국면에 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워낙 도자기의 비중이 큰 곳이어서 이제는 도자를 관광의 핵심 테마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점심식사를 하려고 들어간 식당이 마침 영화 ‘카게무샤’로 유명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기념관 바로 옆에 있었다. 음식을 주문해놓고 잠시 들러볼 기회를 잡았다. 둘러보면서 이마리와 무슨 인연이 있는지를 살펴보려 했지만 특별한 연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흥미롭다.

도조(陶祖) 이삼평이 잠들어 있는 아리타로
카라츠에서 만난 관광안내원의 말로는 이마리에는 나베시마 번요 공원이 볼 만하다고 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임진왜란 당시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을 끌고 간 장수로 이삼평의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은 이마리에서도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지체 없이 아리타를 향해 달렸다. 가장 보고 싶은 이가 바로 조선 도공 출신으로 일본 도자를 일으킨 이삼평이다. 아리타에서도 10km 정도를 더 가야 도산 신사와 이삼평비가 있다. 이마리-아리타 도자의 비조(시조)로 추앙받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다 다케오 방향으로 동진하면 협곡이 나오는데, 고풍스러운 도자기 관련 가옥들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동안 도자기를 가업으로 삼아온 마을임이 느껴진다.
이마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도자 조형물.

이마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도자 조형물.

전설의 도공 이삼평이 이곳에서 좋은 카올린(백도토) 광산을 발견해 자리를 잡으면서 이마리-아리타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일본 열도의 도공들이 그의 수하에 들고자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백도토 광산이 발견된 곳은 아즈미야마(泉山)이다. 그곳에 조금 못 미쳐 이삼평이 신격화되어 모셔지고 있는 도산 신사가 있다. 신사의 입구가 특이하다. 우리의 홍살문 격인 토리이(鳥居)가 거대한 도자 조형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두루마기 차림의 백자 추상 조각도 아리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아리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도자기 상점. 마츠우라 하구의 카라츠 마을. 하우스텐보스 입구(사진 위부터).

아리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도자기 상점. 마츠우라 하구의 카라츠 마을. 하우스텐보스 입구(사진 위부터).

신사의 뒤쪽으로 한참을 등산하면 ‘도조 이삼평비’가 나온다(여기서는 이삼평을 고려 도공이라 부른다). 일본인들이 그를 ‘도조’로 추앙하고, 비석에 ‘대은인’이라 지칭한 것을 보면 당시 그가 포로의 몸으로 건너온 일본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이 비석이 건립된 때가 1917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리타야키 건업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운 시기는 바로 일제 강점기였다. 관광객들에게 아첨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이삼평의 14대손 가운데 도자기를 하는 후손이 한국에서 전시를 가지며 ‘400년만의 귀환’이라고 언론에 소개됐던 것이 기억난다. 몇 년 전 일본의 총리였던 호소가와 모리히로가 정계 은퇴 후 도예가가 되었다 해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같은 큐슈의 무마모토를 대대로 다스렸던 조상들이 마찬가지로 번요(정부 직영의 가마)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나가사키를 향하여
사세보를 거쳐 하우스텐보스로 달렸다. 다시 만난 202번 도로는 노폭도 넓어서 시간 절약을 위해 차도로 달렸다. 더러 비좁은 구간을 만나면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달렸다. 일본인들의 자동차 운전 매너가 좋은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한 번도 일본 자전거 여행 중 경적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서 오무라 만(灣) 북단에 있는 나가사키 현 사세보 시의 하우스텐보스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가운데 우리말도 많이 들렸다. 네덜란드어로 ‘숲속의 집’이라는 의미의 하우스텐보스는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부상해 있다.

사실 나가사키가 일본 전국시대 때부터 자유무역항으로서 발전했다지만 정작 나가사키 시는 오무라 만 맞은편 아주 먼 곳에 있다. 사세보 시가 쇠락해가는 산업단지를 재개발해 조성한 테마파크인데도 나가사키 인근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나가사키가 네덜란드 상인들의 독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 때문이다. 처음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무역선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그들은 반드시 무역을 포교와 결부지었다. 특히 기독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막부를 위협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다 보니 포교보다는 무역에 더 관심을 보인 네덜란드가 무역 상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우스텐보스 호텔.

하우스텐보스 호텔.

자전거를 분해해 휴대용 가방에 넣고 나가사키행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1시간 넘는 열차 주행 중에 우리 부자는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열차는 오무라 만 해변을 달리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나가사키 역에 닿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함과 활기찬 도시의 야경이 우리를 맞았다. 마침 나가사키에서 차이나 축제가 열리는 중이어서 도심 도처가 홍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실 나가사키는 네덜란드와의 인연을 중시하지만 중국과의 인연이 더 깊어 보인다. 화교들이 중심이 되어 공자묘라 불리는 거대한 사당을 지은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역 근처에 예약한 비즈니스호텔의 일본식 다다미방에 짐을 풀었다. 열차 속에서 잠도 보충했겠다, 오늘은 아들과 나가사키의 밤거리를 마음껏 활보해볼 생각이다. 자전거를 두고 걷는 것이 마치 무슨 족쇄라도 풀고 자유를 얻기라도 한 듯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행자에게 신비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나가사키의 열기를 잊을 수 없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카라츠-이마리-아리타’로 이어지는 도자기 여행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카라츠-이마리-아리타’로 이어지는 도자기 여행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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