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에서의 마지막 추억! 벨리즈&멕시코

아메리카 여행기

중미에서의 마지막 추억! 벨리즈&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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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반복되는 ‘오늘’을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유와 새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꿈꾼다. 여기,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그 바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길을 떠난 가족이 있다.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진정한 삶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함께하는 행복을 배웠다는 이 용감한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달은 남미로 떠나기 직전 멕시코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편집자 주)

[아메리카 여행기]중미에서의 마지막 추억! 벨리즈&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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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와의 대화
갈 길이 멀다. 결국 우리가 차를 샀던 곳으로 돌아가 공증된 계약서를 받아오기로 했다. 과테말라-온두라스 국경에서부터 차를 샀던 플라야 델 카르멘까지는 약 1,200km. 그래도 한 번만 더 고생하면 앞으로 내내 차 때문에 시비 걸릴 일은 없을 거니까. ‘액땜하는 거야, 액땜. 게다가 가는 길에 올 때 건너뛰었던 벨리즈도 갈 수 있잖아. 이건 좋은 거야. 잘하는 거야’라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분노의 운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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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벨리즈 국경. 벨리즈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다. 오래간만에 보는 영어 표지판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듯하다. 그런데 벨리즈는 중미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인에게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온두라스 국경에서 한 번 미역국을 먹은 이후로 급소심해진 우리는 국경 사무소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여권과 차량 관련 서류를 내밀었다. 국경 직원에게 비자피를 내고 나니 세관 직원이 와서 우리 서류를 한참 살피면서 뭐라 뭐라 하는데 ‘헉!’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영어권인데도 정말 단편적인 단어 한두 개를 제외하곤 하나도 들리질 않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회사를 다닐 때 나라별로 그들 나름의 영어를 질리게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라고나 할까? 한참 떠들면서 알아듣지 못할 손짓을 하더니 아예 우리 서류를 가지고 어디론가 휙 하고 떠나버렸다. 서류를 가져가버렸으니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20, 30분이 흘러도 그 직원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고 이거 이러다가 또 여기서 붙잡혀서 아무것도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거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결국 멜라니의 채근에 못 이겨 국경 사무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밖과는 달리 건물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지, 괜히 이러다 총이라도 맞는 거 아닌지 불안해하며 두리번거리는데 한 아저씨가 문에 난 조그만 창문에 기대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저 아저씨한테 들켰으니 잡혀가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쪼르르 달려가서 “여기 직원이 내 차 서류를 가져갔는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 사람 불러줄 수 없느냐?”라고 속사포처럼 쏘아댔는데 그 아저씨는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창문 위로 두 손을 올려서 보여줬다. 아저씨의 두 손에서 얌전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수갑. 이런 젠장. 내가 멋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국경 사무소에 있는 구치소까지 들어간 거고 그 아저씨는 거기에 갇혀 있던 수감자였던 거다. 그러고 보니 그 문에 난 창문에는 세로로 쇠창살까지 몇 줄 박혀 있었다. “어, 어, 어? 어~~~!! 아임…, 쏘, 쏘리”라고 내뱉고 뒤돌아 뛰쳐나와 보니 아까 내 서류를 가져갔던 아저씨가 “대체 어디 갔다 왔느냐”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풍과의 달리기 경주
벨리즈를 여섯 시간 만에 주파해 멕시코로 들어섰다. 국경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들은 얘기가 내 목적지인 유카탄 반도 쪽으로 엄청 큰 허리케인이 접근 중이라는 것이었다. 가는 동안 만난 모든 사람들은 “지금 플라야 델 카르멘에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차라리 며칠 쉬다가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나면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얼마 안 있으면 길도 모두 끊길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마음고생도 무척이나 컸던데다 피로에 지친 몸은 한 시간이라도 빨리 플라야 델 카르멘에 도착하라고 채근하는 듯했다. 멜라니 역시 같은 생각이었고 한규 또한 빨리 가서 카사 투칸의 수영장에서 놀고 싶다고 하니 계속 가보기로 했다.

사실 가는 길은 하늘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 바람은 미친 듯이 불고 있었고, 아직 멀긴 하지만 저 지평선 너머는 사이키 조명이라도 켜놓은 듯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유카탄 반도 쪽으로 향하는 차라고는 길 위에 달랑 우리 차 한 대밖에 없었고(여섯 시간 내내 그랬다!), 허리케인을 피해 유카탄 반도를 탈출하는 차량들이 반대편 차선에 줄을 잇고 있었으니 마치 우리가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올라타려고 손 흔들며 미친 듯이 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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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계속 달린 끝에 드디어 예전에 묵었던 플라야 델 카르멘의 카사 투칸에 도착했다. 우리가 들어서니 주인인 호스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곧바로 전 차주인인 아라와 크리스티안을 불러왔다. 아라와 크리스티안 역시 깜짝 놀라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온 거냐고 물었다. “너희들도 다시 보고 싶었고, 차를 아예 여기서 내 이름으로 등록하고 떠나려고 온 거야. 당장 내일 가서 차량 등록만 마치면 바로 떠나려고 해”라고 말하자 아라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허리케인 때문에 모든 관공서가 문을 닫았어. 허리케인이 지나갈 때까지는 다시 열지 않을 거야.” 이런 젠장!

힘들어 죽겠는데 맥주라도 마시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호스트에게 “이봐 호스트, 맥주 두 병하고 한규에겐 오렌지주스 하나만 줘”라고 얘기하니 호스트가 씩 웃으며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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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리. 허리케인이 오고 있다고. 허리케인 경보가 발령되면 유카탄 내의 어떤 슈퍼마켓이나 식당도 주류를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아니 이 거대한 휴양지인 유카탄 반도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한다니. 수험생들에게 책 읽기를 금지시키는 것보다 난센스다. 그제야 이곳에 들어온 것이 슬슬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럼 허리케인이 지나갈 때까지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네”라는 나의 말에 호스트가 다시 한번 초를 쳤다. “허리케인이 오면 군대와 경찰이 모든 도로를 통제해. 차를 몰고 가다가 죽을 수가 있거든.”
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버린 게다.

허리케인 체험기
샤워를 마치고 수영장에서 놀고 있으려니 호스트가 남아 있는 모든 숙박객들(이라고 해봐야 열 명 남짓한)을 호출했다. 허리케인이 왔을 때의 행동요령에 대한 설명회 같은 걸 연 것이다. ‘허리케인이 닥치면 먼저 전기가 끊기게 될 거다. 전기가 끊기면 모터가 작동을 안 하니 몇 시간 내로 물도 끊기게 된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 반드시 호텔 스태프에게 이야기를 하고 가라. 바다 쪽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지 마라’ 등등 온갖 살벌한 경고를 했다.

바깥으로 나가 상황이 어떤지 보는데 바다를 따라 형성된 모든 바와 식당, 기념품 숍들은 죄다 문을 닫았고 셔터를 내린 것으로도 모자라 유리로 된 모든 창문과 쇼윈도를 합판으로 막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보이더라도 우리처럼 호기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뿐이고, 이미 경찰들이 좍 깔려서 해변으로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를 몰고 마트에 가보니 주류 매장은 아예 벽을 세우거나 폴리스 라인 같은 것으로 막아 접근하지 못하게 해놨다. 그나마 마트도 오늘까지가 마지막이고 내일부터 허리케인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는 휴업한다고 했다.

답답한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재미도 좀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보겠냐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맥주를 마시지 못하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정전을 대비해 호스트가 나눠준 양초를 켜놓고 밤에 밥을 해먹으려니 나름 운치 있고 좋기도 했다.

이틀 뒤, 허리케인은 다행히 우리가 있는 플라야 델 카르멘을 비켜서 좀 더 남쪽의 도시를 치고 지나갔고, 그 후로 이틀 뒤에는 아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차량 등록에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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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중미!
차량 등록에 성공하고 나니 슬슬 움직여야 하는데 다시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를 거쳐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사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게 제일 싫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두라스 국경에서 또 한 번 미역국을 먹는 일이 생긴다면 아예 여행 자체가 싫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보니 멕시코시티 옆에 위치한 베라크루스라는 멕시코 제일의 항구도시에 가면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멕시코시티도 보지 못했으니 겸사겸사 베라크루스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베라크루스에 도착해서 백만 곳의 선박업체와 접촉한 끝에 독일계 선박업체인 ‘Hamburg Sud.’를 이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유난히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던 건, 차를 보낸 곳이 만약 파나마 정도였다면 나 같은 자동차 여행자들이 많으니 경험이 많은 선박업체들이 있었겠지만 이곳의 선박업체들은 차를 보내겠다는 말에 ‘그게 무슨 개소리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장소 또한 차를 콜롬비아로 보낼지, 베네수엘라로 보낼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마약의 천국’이라는 콜롬비아보다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베네수엘라 쪽이 좀 더 관료사회가 깨끗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베네수엘라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바보 같은 결정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밝혀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일단, 차를 컨테이너에 넣으며 ‘눈물의 이별식(?)’을 마치고 멕시코시티로 가서 며칠간 푹 쉰 후 베네수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자는 멜라니에게 “우리도 배낭여행자인데 돈을 아껴야지”라고 얘기하며 지하철을 탔는데, ‘아뿔싸!’ 만원 지하철 안에서 깔끔하게 내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날따라 평소에는 멜라니와 분배해서 갖고 다니던 현금카드며 신용카드를 모두 내 지갑에 넣어두었고, 또 하필이면 그날따라 남은 달러들을 내 지갑에 넣어두었으니 우리의 파란만장한 바보짓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결국 비행기 타기 한 시간 전에야 겨우겨우 모든 카드를 정지시키고, 10원짜리 하나 없이 비상용 신용카드 한 개만 딸랑 소지한 채 우리 가족은 꿈에 그리던 ‘남미’에 입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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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덩헌(이정현)은…
제대 후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기 전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떠난 이탈리아 로마에서 ‘참 좋은 사람’ 멜라니(정미자)를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시작했고 2년 뒤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매일 아침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헐레벌떡 회사로 향하던 어느 날, 결혼할 때 ‘너무 늙어 힘 빠지기 전에 세계 일주를 떠나자’던 아내와의 약속을 떠올리게 됐다. 그때부터 두 사람 모두 잘나가던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여행 준비에 착수해 드디어 2007년 5월, 생후 43개월 된 아들 한규까지 데리고 거의 ‘무계획’이나 다름없는 일정을 세워 길을 나섰다.

처음의 계획은 미국 LA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2년의 여행이었지만, 1년여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 뒤 어쨌든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민박집 ‘남미사랑’을 운영하며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북미, 중미, 남미를 거치며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와 소소한 깨달음 등을 담은 책 「미친 가족, 집 팔고 지도 밖으로」를 펴냈고, 아르헨티나에서 얻은 ‘보석’ 둘째 은규까지 넷이서 함께 계속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사진 / 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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