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 ‘물의 도시’ 구마모토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일본 큐슈 ‘물의 도시’ 구마모토

댓글 공유하기
지난 2월, 아들과 둘이서 일본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온 필자의 마지막 큐슈 여행기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필자의 설명과 함께해 더욱 의미 있는 여정이 된 듯하다. (편집자 주)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히고(肥後, 구마모토의 옛 이름), 즉 구마모토(熊本)에 도착했다. 아주 멀리 온 것 같지만 사실은 큐슈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만큼 큐슈는 큰 섬이다. 구마모토 여객터미널에 하선한 시각이 밤 9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연거푸 하품을 해가면서 짐을 내려 지체 없이 시내 호텔을 향해 달렸다.

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쌀쌀한 밤공기를 헤치며 달려가는 길은 다행히 직선인데다 표지판대로만 따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밤길 15km의 거리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나미 구마모토를 가로질러 시라카와 강을 건너자 거대한 구마모토 성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 앞 가미토리초에 자리 잡은 아담한 호텔에 당도하기까지 1시간여가 걸렸다.

구마모토 시내 풍경.

구마모토 시내 풍경.

이른 아침 눈 뜨자마자 아들은 자전거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나갔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자전거를 둘 곳이 없어 본의 아니게 애마(愛馬)들을 노숙시켜야 했다. 도난 사고가 그다지 없는 일본이기에 안심은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 후에 스이젠지 역으로 나갔다. 아소 산까지 열차를 타고 간 뒤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가 자랑하는 건축 작품을 보고 나서 구마모토로 돌아오는 길의 다운힐 스릴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에즈 호에서 낚시를 하는 일본 노인들.스이젠지 공원 전경. 현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일본 전통 다실 고킨덴슈노마(사진 위부터).

에즈 호에서 낚시를 하는 일본 노인들.스이젠지 공원 전경. 현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일본 전통 다실 고킨덴슈노마(사진 위부터).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아소 산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시간표를 확인해보니 생각처럼 열차가 자주 있지 않았다. 아소 산으로 갈 수 있는 열차들은 이미 대부분 지나갔고, 다음 열차는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기에는 자신도 없었지만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여행에 앞서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기차 배차 시간이 이렇게 불규칙할 줄은 미처 몰랐다.

호소카와 가문의 자부심, 스이젠지 공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스이젠지 공원으로 향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스이젠지 공원은 구마모토가 자랑하는 명소이다. 이 정원은 17세기 구마모토의 영주가 된 이래 대대로 다스려온 호소카와 가문이 조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구마모토 2대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물의 신을 모신 사찰이 있는 자리에 회유식 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호소카와 가문은 도자기와 다도에 일가견이 있는 호소카와 다다오키 이래 명문이 되어,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력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1990년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가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변신한 호소카와 모리히로(다다토시의 18대손)도 이 가문의 일원으로 이곳 지사(知事)를 지내기도 했다.

스이젠지 공원은 마치 능과도 같은 둔덕들이 호수를 중심으로 조성된 공간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들과 잘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감각적으로 식재되어 있다. 조경 전체가 일본 전통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다실 ‘고킨덴슈노마’의 차향이 방문객을 사로잡고 있었다. 또 일본 정원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잉어다. 이곳 잉어들은 정원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노회한 녀석들이다.
왜가리로 보이는 큰 물새가 치어를 탐내고 다가서자 큰 잉어들이 가까이 달려들어 물새의 접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왜가리도 어쩌지 못하고 계속 물밑만 노려볼 뿐이었다. 포식자의 접근을 저지하는 물고기라니, 예사롭지 않은 물고기가 아닌가. 천수각 용마루에 있는 전설적 동물 수호신 사치호코(金魚虎)가 머리는 용, 몸통은 잉어를 닮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대천수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도심.

대천수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도심.

구마모토의 허파, 에즈 호
스이젠지 공원에서 나와 우리는 에즈 호로 이동했다. 구마모토를 물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호수 주위에서 자전거 타기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고원지대로부터 흘러온 시라카와, 가세카와 외에도 많은 지천들이 모이는 구마모토는 정말이지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렇게 물이 넉넉하다 보니 물산이 풍부해지고 아울러 아름다운 자연 공원과 습지들이 생겨 구마모토 특유의 풍광과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스이젠지에서 분출한 물이 가세카와 물줄기와 합쳐져 에즈 호를 거치는데, 에즈 호는 다시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어 있다. 특별히 관광지로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지와 물길들이 시민들에게는 더없는 안식처가 되고 있다. 풍부한 수량을 저장하고 있는 이 호수야말로 구마모토의 허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소카와 오기타카 저택의 소박한 정원.

호소카와 오기타카 저택의 소박한 정원.

이제 구마모토 성으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 가는 길에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지도를 펼쳐보니 하나바타 공원의 화장실도 작품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작품으로 대접받나 싶어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나타난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관리 소홀인지, 아니면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자체가 좀 과장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느 화장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미즈아가리 축제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그곳의 화장실. 정말 미스터리다.

명문가의 흔적, 구마모토 성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들어가 니노마루의 넓은 잔디밭에서 해결했다. 구마모토 성의 규모는 대단했다. 축성의 귀재 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쳐 건설한 성으로,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위용을 갖추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군이 지키는 구마모토 성 공략에 실패한 후 “우리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가토 기요마사)에게 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설계와 시공이 탁월했다 전해진다. 니노마루로 진입하기에 앞서 다리 입구에 가토의 동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천수각 아래쪽으로 가토 신사가 있는 걸 보니 역시 구마모토 사람들은 가토를 못 잊어 하는 것 같았다.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초대 영주 호소카와 다다토시 동생의 저택. 검소한 호소카와 가문 저택의 실내. 하나바타 공원의 화장실.‘아트폴리스 프로젝트’에 속한 작품이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초대 영주 호소카와 다다토시 동생의 저택. 검소한 호소카와 가문 저택의 실내. 하나바타 공원의 화장실.‘아트폴리스 프로젝트’에 속한 작품이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

성을 거쳐 현립미술관으로 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월요일 휴관이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요일을 잊기 일쑤다. 현립미술관의 휴관은 많이 아쉬웠다. 미술관 자체보다는 그 뒤쪽에 있는 호소카와 컬렉션관을 보지 못한 것이 더 아쉬웠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의 조부가 가문이 대대로 보유해온 방대한 미술품, 서책, 문서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에이세이 문고 재단을 미술관에 기증해 이루어진 컬렉션이다. 조상 때부터 도자기와 다도를 좋아했던 가풍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김명식 교수의 그림 ‘구마모토 인상’.

김명식 교수의 그림 ‘구마모토 인상’.

비록 미술관은 보지 못했지만 호소카와 명문가 고택의 내부를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현립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호소카와 교부테이(刑部邸)는 다다토시의 동생 오기타카가 썼던 저택으로 귀족들의 생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깔끔하게 갈퀴질된 자갈밭을 지나 고택으로 들어가보니 생각보다는 검소한 느낌을 받았다. 교토 니조 성에서나 볼 수 있는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다도 선인이 살았던 집처럼 정갈한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 한옥과 비교하자면 조립식 가옥 같은 느낌이 든다. 한옥 기와집은 기둥, 대들보, 서까래 등에 굵은 원목을 사용하는 등 대단히 육중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데 반해 일본식 기와집은 나무가 가늘고 벽 또한 얇은 편이다.

에필로그
성에서 내려온 시각이 오후 4시. 바로 자전거를 몰아 구마모토역으로 달렸다. 자전거를 분해해 가방에 넣고 후쿠오카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저녁에 후쿠오카에 도착해 교환교수로 체류 중인 동아대 김명식 교수, 큐슈대 이시카와 코지 교수 등 몇몇 지인을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카타 역 근처 한식당에서 만난 김 교수는 무사히 돌아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시카와 교수는 한국말을 매우 잘하는 친한파 조각가이다. 사투리까지 섞어가면서 유창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가 하면 한국에 지인들도 많다. 이시카와 교수와 동석한 숙녀 한 분이 있었는데 후쿠오카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카네시게 야유코 씨였다.

한국어 공부를 함께하는 멤버로 한국인들과 모임이 있을 때 실전 연습을 하기 위해 대동한 듯했다. 지난여름 여행에서도 오사카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일본인들을 많이 만났지만 큐슈에서도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일본인들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석한 사람들이 우리말을 잘하는데다 친숙하게 느껴져 타국에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아들도 일본인들과 함께 자리하기는 처음이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까운 이웃으로 교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듀, 큐슈!

필자 이재언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일본 큐슈 ‘물의 도시’ 구마모토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일본 큐슈 ‘물의 도시’ 구마모토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 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