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쌀쌀한 밤공기를 헤치며 달려가는 길은 다행히 직선인데다 표지판대로만 따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밤길 15km의 거리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나미 구마모토를 가로질러 시라카와 강을 건너자 거대한 구마모토 성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 앞 가미토리초에 자리 잡은 아담한 호텔에 당도하기까지 1시간여가 걸렸다.
호소카와 가문의 자부심, 스이젠지 공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스이젠지 공원으로 향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스이젠지 공원은 구마모토가 자랑하는 명소이다. 이 정원은 17세기 구마모토의 영주가 된 이래 대대로 다스려온 호소카와 가문이 조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구마모토 2대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물의 신을 모신 사찰이 있는 자리에 회유식 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호소카와 가문은 도자기와 다도에 일가견이 있는 호소카와 다다오키 이래 명문이 되어,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력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1990년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가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변신한 호소카와 모리히로(다다토시의 18대손)도 이 가문의 일원으로 이곳 지사(知事)를 지내기도 했다.
스이젠지 공원은 마치 능과도 같은 둔덕들이 호수를 중심으로 조성된 공간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들과 잘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감각적으로 식재되어 있다. 조경 전체가 일본 전통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다실 ‘고킨덴슈노마’의 차향이 방문객을 사로잡고 있었다. 또 일본 정원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잉어다. 이곳 잉어들은 정원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노회한 녀석들이다.
왜가리로 보이는 큰 물새가 치어를 탐내고 다가서자 큰 잉어들이 가까이 달려들어 물새의 접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왜가리도 어쩌지 못하고 계속 물밑만 노려볼 뿐이었다. 포식자의 접근을 저지하는 물고기라니, 예사롭지 않은 물고기가 아닌가. 천수각 용마루에 있는 전설적 동물 수호신 사치호코(金魚虎)가 머리는 용, 몸통은 잉어를 닮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스이젠지 공원에서 나와 우리는 에즈 호로 이동했다. 구마모토를 물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호수 주위에서 자전거 타기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고원지대로부터 흘러온 시라카와, 가세카와 외에도 많은 지천들이 모이는 구마모토는 정말이지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렇게 물이 넉넉하다 보니 물산이 풍부해지고 아울러 아름다운 자연 공원과 습지들이 생겨 구마모토 특유의 풍광과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스이젠지에서 분출한 물이 가세카와 물줄기와 합쳐져 에즈 호를 거치는데, 에즈 호는 다시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어 있다. 특별히 관광지로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지와 물길들이 시민들에게는 더없는 안식처가 되고 있다. 풍부한 수량을 저장하고 있는 이 호수야말로 구마모토의 허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문가의 흔적, 구마모토 성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들어가 니노마루의 넓은 잔디밭에서 해결했다. 구마모토 성의 규모는 대단했다. 축성의 귀재 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쳐 건설한 성으로,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위용을 갖추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군이 지키는 구마모토 성 공략에 실패한 후 “우리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가토 기요마사)에게 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설계와 시공이 탁월했다 전해진다. 니노마루로 진입하기에 앞서 다리 입구에 가토의 동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천수각 아래쪽으로 가토 신사가 있는 걸 보니 역시 구마모토 사람들은 가토를 못 잊어 하는 것 같았다.
에필로그
성에서 내려온 시각이 오후 4시. 바로 자전거를 몰아 구마모토역으로 달렸다. 자전거를 분해해 가방에 넣고 후쿠오카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저녁에 후쿠오카에 도착해 교환교수로 체류 중인 동아대 김명식 교수, 큐슈대 이시카와 코지 교수 등 몇몇 지인을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카타 역 근처 한식당에서 만난 김 교수는 무사히 돌아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시카와 교수는 한국말을 매우 잘하는 친한파 조각가이다. 사투리까지 섞어가면서 유창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가 하면 한국에 지인들도 많다. 이시카와 교수와 동석한 숙녀 한 분이 있었는데 후쿠오카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카네시게 야유코 씨였다.
한국어 공부를 함께하는 멤버로 한국인들과 모임이 있을 때 실전 연습을 하기 위해 대동한 듯했다. 지난여름 여행에서도 오사카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일본인들을 많이 만났지만 큐슈에서도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일본인들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석한 사람들이 우리말을 잘하는데다 친숙하게 느껴져 타국에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아들도 일본인들과 함께 자리하기는 처음이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까운 이웃으로 교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듀, 큐슈!
필자 이재언은… |
■글 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