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양팔경의 으뜸 도담삼봉.

도담삼봉 근처 석문을 통해 바라본 단양강변 풍경.
단양 역사 밖으로 나가자 마침 기념 촬영을 하던 자전거 여행객들이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해왔다. 서로 가벼운 인사를 하면서 행선을 물었다. 그들은 1박 2일 일정으로 온 터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함께 상진대교를 건넌 뒤 그들은 읍내로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직진해 도담 방향으로 고개를 넘었다. 오래간만에 타보는 MTB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단양의 도로에는 덤프트럭과 레미콘이 유난히 많이 다닌다. 비교적 갓길이 좋은 편이지만 굉음을 내며 달리는 덤프트럭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다. 성신양회 시멘트 공장을 돌아 8km 정도를 달리니 도담삼봉이 눈에 들어왔다. 석회암 지형의 봉우리들이 화보 등을 통해 많이 보아왔던 터라 낯설지가 않았다.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는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가운데 떠 있는 기암 봉우리로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이곳은 삼봉 정도전과 깊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조선 개국의 기초를 닦은, 학문적으로도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던 정도전의 ‘삼봉’이라는 호도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다. 지금이야 속세와 지근의 거리이지만 과거 같으면 무릉도원을 연상시켰을 비경이다. 도담삼봉에 대한 전설도 재미있다. 아주 먼 옛날 홍수로 인해 정선에서 떠내려온 것이라는 것. 그런데 어느 날 정선에서 삼봉에 대한 세를 내라고 압박을 가해오는데 이를 어린 정도전이 지혜롭게 물리쳤다. “봉우리들을 다시 정선으로 가져가면 될 일 아니냐”고 따지자 더 이상의 무리한 압박이 없더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전설뿐만 아니라 단양 군수를 지냈던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해 추사, 단원 등의 거장들이 도담삼봉을 테마로 하여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1 수양개 선사유물관의 선사 체험장. 2 염색 작가 박정우씨와 그의 작품.
비경이 숨어 있는 단양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인데 햇살이 따가웠다. 기온이 30℃에 이르는 가운데 강바람이 외로운 자전거 유목민에게 위안이 된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다니는 차가 없어 여유로운 사색에 빠질 수 있었다. 잠시 뒤 엄청나게 높은 교각 위에 놓인 단양대교가 보였는데, 그 뒤로 구도로와 연결된 적성대교가 있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뒤에 있는 적성산성을 오르고 싶어 경사가 심한 산길에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아뿔싸, 갑자기 왼쪽 종아리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당황스러웠다.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종아리를 붙잡고 한참을 주물러야 했다. 결국 포기하고 하산해야하다니…. 몇 년 전 설악산 미시령을 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쥐나는 것도 습관인가 보다.
근육 경련이 멎자 조심스럽게 움직여 단성 면사무소 옆 단양향교에 잠시 들렀다. 담장 위에 세워진 풍화루라는 누각이 웅장하니 이색적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군수로 재직시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한강을 굽어보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학문에 힘쓰라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긴 입지가 아닐까.

적성대교에서 바라본 남한강.

백운 우탁 선생의 기개를 닮은 사인암. 김홍도의 ‘사인암’(호암미술관 소장).
청풍명월의 땅 제천
투구봉 휴게소를 지나면서 계속 오르막이 나오는데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경련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식후 포만으로 호흡도 어렵고 식곤증도 몰려와서 그늘 아래 잠시 누웠다. 시원한 강바람에 나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땀에 범벅이 된 찜찜한 상태에서도 잠이 절로 오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잠시 더 달려가니 그 유명한 장회나루가 나왔다. 멀리 구담봉이 보이는 것이 천하 절경이다.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혹시 뱃길로 청풍까지 가는 것은 어떨까 싶어 배편을 알아보려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전거 승선이 거부될 것 같아 포기했다. 다소 힘겹지만 줄곧 빼어난 산과 맑은 물을 끼고 가는 길이라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중해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충주 호반 리조트. 제천 의림지. 박정우 염색갤러리에서 본 청풍호반.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 서둘러 제천으로 올라가야 했다. 제천 의림지로 가려면 족히 20km가 넘는 거리다. 예약해둔 서울행 열차 시각이 오후 7시 29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갤러리에서 취한 음료와 다과 덕분에 원기를 얻어 달리기 시작했다. 1시간 4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의림지. 몇 년 전 이곳 제천에서 집필 생활을 하고 있는 소설가 김진명씨와 잠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데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김진명 작가는 마침 새 작품 마감이 임박해 만나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서 조우해 장시간 환담을 나눈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의림지는 삼한 시대 농사용 저수지로 축조된 것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 역사를 말해주듯 둑 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이 우람해 보였다. 제천의 ‘堤(둑 제)’가 바로 이 제방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고대에는 저수지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제천역을 향해 달리는 중에 한약 향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제천이 한방으로 유명한 도시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 고상함이 깃든 방향제처럼 느껴졌다. 향기를 못 잊어 다시 찾는 경우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이라는 말의 뜻이 ‘빛을 보는 것’이라는데, 눈만이 아니라 후각을 즐겁게 하는 관광도 가능한 일이다. ‘한방향(韓方香)’이라는 향수도 가능하지 않을까.
단양-제천 라이딩의 주요 코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 약 105km. 11시간가량 소요 * 고갯길과 굽잇길이 좀 많지만 코스는 환상적이다. |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http://img.khan.co.kr/lady/201107/20110718112001_8_scycle_tra8.jpg)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