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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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비경을 간직한 단양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도담삼봉. 그저 보고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설까지 함께할 수 있어 더욱 의미 깊은 여행지로 기억될 듯하다. 국내외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명소를 자전거로 누비며 섬세한 관점의 여행기를 보여주었던 미술평론가 이재언과의 인연은 아쉽게도 이달까지다. 그의 찬란한 다음 여정을 기대하며 연재를 마친다. (편집자 주)

단양팔경의 으뜸 도담삼봉.

단양팔경의 으뜸 도담삼봉.

단양행 첫 열차를 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청량리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탑승 전 자전거를 가방에 넣어야 하기에. 다른 승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저쪽에서도 몇 명의 무리가 승차를 위해 자전거 패킹을 하고 있었다. 중앙선 승객들은 대부분 등산객들인데 요즘은 자전거 여행자들도 많이 보인다. 오전 6시 정각, 열차가 새벽 안개를 헤치며 환상의 질주를 시작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렘과 행복감을 준다지만, 단양 같은 비경을 간직한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더더욱 들뜨지 않을 수 없다. 잠시 눈 좀 붙이고 나니 차창 밖으로 거대한 시멘트 공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 공장을 지나자 도담삼봉이 스쳐 지나갔다. 공장과 비경, 이 두 개의 대조적인 풍경이 오버랩되는 곳이 단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양의 더 깊은 속살을 본 여행자는 그러한 선입견이 그르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도담삼봉 근처 석문을 통해 바라본 단양강변 풍경.

도담삼봉 근처 석문을 통해 바라본 단양강변 풍경.

전설이 살아 있는 단양팔경
단양 역사 밖으로 나가자 마침 기념 촬영을 하던 자전거 여행객들이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해왔다. 서로 가벼운 인사를 하면서 행선을 물었다. 그들은 1박 2일 일정으로 온 터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함께 상진대교를 건넌 뒤 그들은 읍내로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직진해 도담 방향으로 고개를 넘었다. 오래간만에 타보는 MTB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단양의 도로에는 덤프트럭과 레미콘이 유난히 많이 다닌다. 비교적 갓길이 좋은 편이지만 굉음을 내며 달리는 덤프트럭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다. 성신양회 시멘트 공장을 돌아 8km 정도를 달리니 도담삼봉이 눈에 들어왔다. 석회암 지형의 봉우리들이 화보 등을 통해 많이 보아왔던 터라 낯설지가 않았다.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는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가운데 떠 있는 기암 봉우리로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이곳은 삼봉 정도전과 깊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조선 개국의 기초를 닦은, 학문적으로도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던 정도전의 ‘삼봉’이라는 호도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다. 지금이야 속세와 지근의 거리이지만 과거 같으면 무릉도원을 연상시켰을 비경이다. 도담삼봉에 대한 전설도 재미있다. 아주 먼 옛날 홍수로 인해 정선에서 떠내려온 것이라는 것. 그런데 어느 날 정선에서 삼봉에 대한 세를 내라고 압박을 가해오는데 이를 어린 정도전이 지혜롭게 물리쳤다. “봉우리들을 다시 정선으로 가져가면 될 일 아니냐”고 따지자 더 이상의 무리한 압박이 없더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전설뿐만 아니라 단양 군수를 지냈던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해 추사, 단원 등의 거장들이 도담삼봉을 테마로 하여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1 수양개 선사유물관의 선사 체험장. 2 염색 작가 박정우씨와 그의 작품.

1 수양개 선사유물관의 선사 체험장. 2 염색 작가 박정우씨와 그의 작품.

도담삼봉에서 나와 보통은 고수동굴로 많이 향하지만 나는 수양개 방향으로 향했다. 지명이 특이한데, 구석기 시대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5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구도로가 나오는데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이다. 이 길엔 3개의 터널이 나온다. 상진, 전주, 매곡 세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데 전주터널을 통과할 땐 사실 너무 길고 어두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침침하고 서늘한 것이 한여름의 납량물도 이만한 것은 없었던 듯하다. 오랜 구석기시대부터 남한강 유역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수양개 선사유적지는 그 출토 유물들이 전시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선사 체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비경이 숨어 있는 단양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인데 햇살이 따가웠다. 기온이 30℃에 이르는 가운데 강바람이 외로운 자전거 유목민에게 위안이 된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다니는 차가 없어 여유로운 사색에 빠질 수 있었다. 잠시 뒤 엄청나게 높은 교각 위에 놓인 단양대교가 보였는데, 그 뒤로 구도로와 연결된 적성대교가 있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뒤에 있는 적성산성을 오르고 싶어 경사가 심한 산길에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아뿔싸, 갑자기 왼쪽 종아리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당황스러웠다.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종아리를 붙잡고 한참을 주물러야 했다. 결국 포기하고 하산해야하다니…. 몇 년 전 설악산 미시령을 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쥐나는 것도 습관인가 보다.

근육 경련이 멎자 조심스럽게 움직여 단성 면사무소 옆 단양향교에 잠시 들렀다. 담장 위에 세워진 풍화루라는 누각이 웅장하니 이색적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군수로 재직시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한강을 굽어보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학문에 힘쓰라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긴 입지가 아닐까.

적성대교에서 바라본 남한강.

적성대교에서 바라본 남한강.

이제부터 갈 곳은 사인암이다. 이곳은 두악산(732m)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단성면 중방 삼거리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근육 경련으로 약간 의기소침해졌지만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양 출신의 고려 말 대학자 우탁 선생이 칩거하면서 학문을 갈고닦은 곳, 그리고 단원 김홍도 선생이 직접 그림으로 남긴 사인암의 절경을 여기까지 와서 못 보고 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다. 남조천을 끼고 수직 절벽을 이룬 사인암은 가히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진정한 학자 우탁 선생의 올곧은 기개, 기상과 잘 어울리는 짝이라 할 수 있다.

백운 우탁 선생의 기개를 닮은 사인암. 김홍도의 ‘사인암’(호암미술관 소장).

백운 우탁 선생의 기개를 닮은 사인암. 김홍도의 ‘사인암’(호암미술관 소장).

사인암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아직 성수기가 아니다 보니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4km 밖의 가산 삼거리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보통 높은 고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근육 경련이 재발될까 노심초사하며 오르는 20여 분이 어찌 그리 길고 힘겨웠던지…. 가산 삼거리에 도착해 식당 하나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백반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주인장이 손수 재배한 상추쌈이 곁들여진 말 그대로 시골 밥상이다. 식후에 시원한 물로 세수와 세족을 마치니 한결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물통에 물도 넉넉히 채우고 소선암 계곡을 향해 달렸다. 소선암 계곡을 빠져나와 중방 삼거리에 당도하니 이제부터가 진짜 난관이다.

청풍명월의 땅 제천
투구봉 휴게소를 지나면서 계속 오르막이 나오는데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경련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식후 포만으로 호흡도 어렵고 식곤증도 몰려와서 그늘 아래 잠시 누웠다. 시원한 강바람에 나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땀에 범벅이 된 찜찜한 상태에서도 잠이 절로 오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잠시 더 달려가니 그 유명한 장회나루가 나왔다. 멀리 구담봉이 보이는 것이 천하 절경이다.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혹시 뱃길로 청풍까지 가는 것은 어떨까 싶어 배편을 알아보려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전거 승선이 거부될 것 같아 포기했다. 다소 힘겹지만 줄곧 빼어난 산과 맑은 물을 끼고 가는 길이라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중해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충주 호반 리조트. 제천 의림지. 박정우 염색갤러리에서 본 청풍호반.

지중해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충주 호반 리조트. 제천 의림지. 박정우 염색갤러리에서 본 청풍호반.

옥순봉을 관망할 수 있는 옥순대교를 지나 다시 길고 지루한 굽잇길을 달려야 했다. 다리도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더 이상의 이상 신호는 없었다. 옥순대교를 건널 때 표지판을 보니 청풍대교까지의 거리가 17km로 나왔다. 날마다 30km 이상의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내게 별것도 아닌 거리가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청풍대교를 건너 문화재단지를 둘러보고 ‘박정우 염색갤러리’에 잠시 들렀다. 인사동 갤러리에서 여러 차례 초대전을 가진 바 있는 염색 작가 박정우씨가 개관한 갤러리가 청풍호반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 들러 시원한 음료를 들이켠 뒤 아름다운 호반의 풍경과 함께 만난 박 작가의 작품이 이상적인 앙상블이었다. 꿈속에서 본 듯한 몽환적인 숲이나 꽃들이 바로 이곳 청풍의 자연에서 온 것들이 아닌가. 작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덕분에 많은 방문자들이 흥미로워했다. 하긴 아름다운 호수를 보는 덤까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문화 체험인가.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 서둘러 제천으로 올라가야 했다. 제천 의림지로 가려면 족히 20km가 넘는 거리다. 예약해둔 서울행 열차 시각이 오후 7시 29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갤러리에서 취한 음료와 다과 덕분에 원기를 얻어 달리기 시작했다. 1시간 4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의림지. 몇 년 전 이곳 제천에서 집필 생활을 하고 있는 소설가 김진명씨와 잠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데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김진명 작가는 마침 새 작품 마감이 임박해 만나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서 조우해 장시간 환담을 나눈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의림지는 삼한 시대 농사용 저수지로 축조된 것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 역사를 말해주듯 둑 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이 우람해 보였다. 제천의 ‘堤(둑 제)’가 바로 이 제방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고대에는 저수지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제천역을 향해 달리는 중에 한약 향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제천이 한방으로 유명한 도시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 고상함이 깃든 방향제처럼 느껴졌다. 향기를 못 잊어 다시 찾는 경우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이라는 말의 뜻이 ‘빛을 보는 것’이라는데, 눈만이 아니라 후각을 즐겁게 하는 관광도 가능한 일이다. ‘한방향(韓方香)’이라는 향수도 가능하지 않을까.

단양-제천 라이딩의 주요 코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단양역→도담삼봉→수양개 선사유적지→적성산성→단양향교→사인암→소선암 계곡→장회나루→옥순대교→청풍대교→청풍 문화재단지→제천 시내→의림지→제천역
* 약 105km. 11시간가량 소요
* 고갯길과 굽잇길이 좀 많지만 코스는 환상적이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단양-제천, 역사와 문화의 보고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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