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이 가득한 대나무의 고장 담양

주말에 떠나는 테마여행

푸르름이 가득한 대나무의 고장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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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 무감각하게 느리게, 천천히 산다는 것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 엄청난 모험일 수 있다. 하지만 가끔 그 느림의 미학을 즐길 때 우리 몸과 마음은 잠시 선계(仙界)로 외출을 다녀오는 듯하다. 언제나 푸름이 가득한 대나무의 고장 담양, 그곳에서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느끼고 왔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소쇄원. 여름의 소쇄원은 녹음이 가득하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소쇄원. 여름의 소쇄원은 녹음이 가득하다.

시심(詩心)을 자극하는 소쇄원
‘여보게, 나는 혼탁한 세상이 싫어. 그러니 나는 이만 산속 깊은 곳에 집 짓고 유유자적하며 생활할까 하네.’

담양에 터를 잡은 이름 모를 선비가 할 법한 말이다. 그 선비는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할 바에야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에 귀의해 살기를 희망한 것이다.

담양 소쇄원은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가 여행자의 발길을 안내한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는 좌우로 흔들린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우수수’ 마치 비가 쏟아지는 소리인 듯하다. 모두 한 자리에서 자란 대나무들이지만 그 굵기와 생김새가 서로 다르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어찌 사람이 뜻을 모으기가 쉬울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담장의 기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담장의 기와.

소쇄원을 만든 이는 1503년에 태어나 1557년에 생을 마감한 ‘양산보’라는 사람이다. 15세에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17세에 낙향해 소쇄원을 세웠다고 한다. 중앙정치에 나가지 않고 지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평생을 보낸 양산보 선생. 그는 당시 정치에 대해 느림의 미학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것을 주장하되 과하지 않게, 세상에 천천히 녹아들 수 있도록 말이다.

광풍각으로 가기 위해서는 실개천을 건너야 한다. 나름 낙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량이 많은 날에는 제법 그럴싸해 보일 것 같다. 광풍각은 중앙에 작은 방이 있고 양옆으로 툇마루가 있다.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나무 기둥과 마루에는 4백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하다. 선생은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를 바라보면서 선비의 지조를 되새겼을 게다. 그리고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정원수들을 바라보며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느꼈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한가로이 자연을 벗 삼은 선생의 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터. 짙은 녹음은 여름날의 기억을 저 멀리 보내기 싫은 듯 아직 푸르다. 화려한 단풍을 기대한다면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경이 좋겠다. 물론 겨울에는 눈 덮인 소쇄원을 볼 수 있으니 계절이 무슨 상관이랴.

제월당에서 바라본 광풍각의 기와지붕. 단아한 모습이 멋스럽다.

제월당에서 바라본 광풍각의 기와지붕. 단아한 모습이 멋스럽다.

댓잎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곳, 죽녹원
2003년 5월에 조성된 죽녹원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뿌리를 내린 모양이 마치 고슴도치 가시 같다.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쇄원을 그리면서 자연의 틈 속에 인간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최소한의 붓질을 했다. 그런데 죽녹원은 인간의 틈 속에 자연을 그려서 액자에 넣어놓았다. 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지만 그 작품의 완성도는 대나무의 키보다 더 높아 보인다. 자연산 회와 양식 회의 차이라고나 할까. 워낙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보니 ‘느리게’를 외치며 여행길에 오른 여행자의 눈가에 주름을 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이라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이겠는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고 귀 기울여보자. 작은 바람에 댓잎이 흔들리며 여행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른 댓잎과 젖은 댓잎이 내는 소리가 다르고, 키 큰 대나무와 키 작은 대나무가 내는 소리 또한 다르다. 실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면 댓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은빛 찬란한 태양을 만날 수도 있다. 순간 여행의 의미와 즐거움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담양에서는 대나무통을 재활용하지 않아요”
“담양은 토양이나 기후가 대나무가 자리기에 적합한 곳이죠. 때문에 전국에서 대나무가 제일 많이 생산돼요. 서울을 비롯해 전국 어디서나 대통밥을 먹을 수 있지만 담양 대통밥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담양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은 대통밥에 사용한 대통을 재활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대통에 쌀, 찹쌀, 흑미, 검은콩, 은행, 대추 등을 넣고 영양밥을 하면 대나무의 죽력(대나무 진액)이 밥에 배어드는데 재활용을 하면 그 효과는 없어진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통밥은 담양에서 드세요.”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과 사람들. 죽림을 걷는 기분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과 사람들. 죽림을 걷는 기분은 언제나 시원하다.

죽녹원 앞에서 대통밥과 떡갈비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의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일까, 밥맛이 타지에서 먹는 것과 다르다. 쫄깃하고 차지며 달기까지 하다. 찰떡을 먹는 기분이랄까.

“떡갈비는 굽자마자 바로 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사장의 떡갈비 자랑이 이어진다.
“떡갈비는 석쇠에 구워서 기름이 다 빠진 상태라 식으면 고기가 딱딱해지고 맛이 덜하죠.”
그의 말이 옳았다. 첫 맛과 마지막 맛은 달랐다.

천연기념물 ‘관방제림’과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영양 대통밥과 떡갈비로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관방제림으로 산책을 나섰다. 관방제림은 300~400년생 거목들이 2km에 이르는 제방에 심어져 산책길처럼 조성된 곳이다. 나무마다 식별 번호가 있는데 1번부터 400번대 이상 나무까지 번호표가 붙어 있다. 1인 자전거부터 4인이 탑승할 수 있는 가족 자전거까지 입맛대로 골라 탈 수 있으니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려보자.

죽녹원을 지나 둑길을 계속 걸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까지 다다른다. 이 길은 2008년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촘촘하게 서로를 이웃하고 있는 나무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봄에는 큰 덩치의 나무에 연한 새싹이 앙증맞게 자라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가득하다. 가을에는 황금색의 화려한 단풍으로, 겨울에는 소복이 내려앉은 눈이 정취를 더한다.

굵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어루만지는 중년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굵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어루만지는 중년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찾아서, 한옥에서의 하룻밤
하루 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린 탓에 다리가 피곤하다고 아우성이다. 번잡한 곳을 떠나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는 슬로시티 ‘창평 삼지내마을’을 방문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민간주도형의 범세계적인 ‘슬로라이프’ 운동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전남 신안군 증도를 시작으로 완도 청산, 장흥 유치, 담양 창평, 하동 악양, 마지막으로 예산 대흥까지 총 여섯 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창평 삼지내마을에서 한옥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삼지내마을은 슬로시티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며 마을의 홍보대사를 자처한다.

“우리 마을은 전통과 자연 생태가 잘 보전되어 있어요. 물론 전통음식도 풍부하지요. 무엇보다 고택과 어우러진 돌담의 풍경은 이곳만의 자랑이랍니다. 마을에서 고택을 한 바퀴 돌아보시고 시장으로 나가보세요. 그곳에 가면 국밥이 유명한데 참 맛있답니다.”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한 한옥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자연의 품에 머물고 있음이 분명하다. 숨 막히는 콘크리트 속에서 생활하는 현대인들에게 한옥의 흙벽과 나무들은 생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사람 손때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모습이 자연 그대로이다. 초록색의 싱그러운 잔디가 바닥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조용히 몸을 올려놓은 모습이 영락없는 새색시의 모습이다. 걷는 이의 보폭을 염려해 자연스럽게 땅에 깔린 돌 징검다리가 걷는 재미를 더한다.

푸른 잔디마당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이불을 통해 주인장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푸른 잔디마당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이불을 통해 주인장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한옥에는 참 많은 문이 있다. 천장에 부착하는 문, 미는 문, 여는 문, 문의 형태도 가지가지다. 그 가짓수만큼 문의 용도도 다양하다. 사람이 다니는 문, 바람이 다니는 문, 그리고 빛이 다니는 문. 그렇게 집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자유롭게 출입한다.

“한옥은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추워요. 그래서 한옥 체험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지요.”

주인장의 말이 옳다. 어려서 외가에 갔을 때 머리맡에 놓아둔 걸레가 아침이면 얼어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심지어 자리끼(자다가 마시기 위해 머리맡에 준비해두는 물)가 얼어붙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생활과학의 증거다. 두한족열(頭寒足熱)이라고 하지 않던가. 즉,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온돌로 난방을 하는 한옥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이불만 덮고 있으면 금세 따뜻해진다. 물론 콧잔등은 시리다. 후~ 하고 불면 입김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건강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꼭 꺼리고 싫어할 일만은 아니다.

한옥에서는 음식 역시 천천히 만들어진다. 음식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 인간은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수동의 태도를 지키며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흙으로 만든 옹기 속에서 시간을 충분히 보낼수록 그 맛은 더욱 깊어지고 몸에 좋은 음식이 만들어진다. 사람 사는 곳이 정남향이듯 옹기 역시 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있다.

주인장은 매일같이 이불 홑청과 베갯잇을 빨아 풀을 먹이고, 다림질까지 해서 새것을 준비해둔다. 손님을 맞이하는 정성이다.

“저는 다른 곳에서 잘 때 누가 쓰던 걸 덮으면 찜찜하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귀찮지만 이렇게 준비해요. 그런데 요즘은 일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귀찮은지도 모르고… 그냥 해요(웃음).

자전거를 이용하면 관방제림에서 메타세쿼이아길까지 달려볼 수 있다. 한옥 마당에 핀 꽃이 여유로움을 더한다. 대통 속에 찹쌀, 콩, 잣, 밤 등 영양 가득한 곡물이 탐스럽게 담겨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면 관방제림에서 메타세쿼이아길까지 달려볼 수 있다. 한옥 마당에 핀 꽃이 여유로움을 더한다. 대통 속에 찹쌀, 콩, 잣, 밤 등 영양 가득한 곡물이 탐스럽게 담겨 있다.

느림의 여유를 꼭 멀리까지 와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누리고 싶어진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때 느끼는 행복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이다. 무엇에 구속됨 없이 천천히 숨쉬고 행동하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여유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음에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여행 정보

다녀온 곳

▲ 소쇄원
●입장료 어른 1천원, 청소년 7백원, 어린이 5백원
●개방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위치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문의 www.soswaewon.co.kr, 061-382-1071

▲ 죽녹원
●입장료 : 어른 2천원, 청소년 1천5백원, 어린이 1천원
●개방시간 : 오전 9시~오후 7시 위치 : 전남 담양군 향교리 282
●문의 www.juknokwon.org, 061-380-3244

▲ 관방제림·메타세쿼이아길
●위치 : 죽녹원 맞은편, 도보로 이동 가능
●자전거 이용료 : 1인용 3천원, 2인용 5천원, 4인용 1만원 선

밥 먹은 곳
▲죽녹원식당(061-382-9973) 떡갈비(2만원), 대통밥(1만원), 죽순회무침(1만5천원)
▲원조창평시장국밥(061-383-4424) 내장국밥(6천원), 선짓국밥(6천원), 머리국밥(6천원)

잠 잔 곳
▲ 한옥 민박 ‘한옥에서’
●객실 수 10실(2인실부터 4인실까지)
●객실요금 비수기 5만~17만원 선, 성수기 7만~22만원 선
●체험거리 다도 체험과 쌀엿 만들기 체험 등(사전 문의)
●위치 : 전남 담양군 청평면 삼천리 364
●문의 http://hanokeseo.namdominbak.go.kr, 061-382-3832

여행작가 임운석은…
2001년 본인보다 여행을 1% 더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해 평생 여행만 하며 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 여행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대 때에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신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문화·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이며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작가, 국내 아웃도어 전문업체의 로드플래너 및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빛과 바람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http://room no1.blog.me/)’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글·사진 / 여행작가 임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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