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속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은 더욱 움츠러든다. 어슴푸레한 저녁 귀갓길 잰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식욕을 돋우는 갖가지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져 있다. 정성 가득한 저녁상에는 사랑 조미료와 정성 향신료가 더해졌다. 어머니의 손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랑과 섬김 그리고 정성으로 밥상을 내어주는 영양 두들마을을 다녀왔다.

1 두들마을 전경. 2 두들마을 돌담길.
과거 영양은 봉화, 청송과 더불어 경상북도 3대 오지라 할 정도로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영양을 찾을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서안동IC로 진입하면 목적지인 영양 두들마을에 도착한다. 시속 300km 이상을 달리는 KTX를 타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데 비하면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340년을 지켜온 종부의 손맛을 보러 가는 길이니 이 정도 정성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두들이란 가운데가 솟아서 언덕이 진 곳을 일컫는 둔덕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타깝게 여긴 석계 이시명 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30여 채의 한옥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이웃하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두들마을 표지판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집을 나선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배꼽시계는 ‘꼬르륵’ 하며 정확하게 밥때를 알린다.
「음식디미방」은 ‘여중군자 장계향’이 1670년 무렵 70세가 넘은 나이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음식 백과서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 조리서이다. 아들 이현일을 당대의 대학자로 키워낸 그녀는 그가 이조판서를 역임함에 따라 훗날 정부인의 품계를 받으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됐다. 남편 내조는 물론 10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덕에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현모양처로 추앙받고 있다. 글과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11세에 「소학」과 「십구사략」 등을 스스로 깨우쳤다. 또 글씨에도 소질이 있어 그녀가 쓴 초서체 ‘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라고 평했다고 전한다.

3 전채 요리로 나오는 물김치와 단호박죽. 4 맨드라미 물을 들인 동아와 새송이버섯, 오이, 미나리, 가지, 시금치, 고사리 등 제철 나물과 꿩고기로 만든 잡채.
영양군에서 우리 전통의 반가음식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음식디미방’의 모든 음식은 「음식디미방」에 근거해서 만든다고 하니 그 기대감이 더욱 침샘을 자극한다.
전통음식 체험 메뉴는 소부상 차림과 정부인상 차림이 있다. 정부인상의 전채 요리로는 단호박죽과 감향 진사주가 나온다.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총 146개 항목 중에서 술 만드는 비법이 51개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술을 하나의 음식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 게다.
놋수저와 백자 그릇에 담긴 음식들은 맛을 보기에 앞서 그 정갈한 모양에 입이 딱 벌어진다. 음식은 맛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기본적인 미각을 바탕으로 음식의 풍미를 더하는 그릇까지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하다. 거기에 강하지 않으면서 식욕을 더욱 당기는 후각과 음식을 씹는 식감은 입 안 가득한 촉수들을 긴장시키며 촉각을 자극한다. 내 귓가를 울리는 음식 씹는 소리는 청각을 자극하고 실내에 은은하게 퍼지는 국악 선율과 함께 심신의 편안함을 주는 듯하다.
감향 진사주는 그 맛이 새콤하고 상쾌하다. 잘 발효된 요구르트와 비슷하다. 연이어 주 요리인 대구껍질누르미와 가제육, 연근채, 잡채가 나온다. 그런데 잡채가 우리가 흔히 먹는 잡채와 달리 당면이 없다.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잡채에는 당면을 사용하지 않아요. 맨드라미 물을 들인 동아와 새송이버섯, 오이, 미나리, 가지, 시금치, 고사리 등 제철 나물들을 일정한 크기로 썰어 기름간장으로 볶거나 데쳐 준비하지요. 꿩고기 육수에 된장을 넣어 싱겁게 간을 맞춘 다음 참기름과 밀가루를 넣어 끓이되 너무 걸쭉하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닭보다 귀한 재료로 취급받는 꿩고기를 삶아 가늘게 찢어 접시 중앙에 놓고 나머지 재료를 가장자리에 담습니다. 끝으로 누르미를 둘러주면 완성된답니다.”
재령이씨 종부 조귀분 여사의 설명이다. 누르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즙을 끼얹어 먹는 것이라고 답한다. 요즘 말로 소스가 뿌려진 음식이다. 조리 과정만 들어봐도 그 정성과 시간이 예사롭지 않다. 물론 색 또한 화려해서 우리의 전통색인 황, 청, 백, 적, 흑 오방색을 음식으로 표현했다. 오방색은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것인데 음식을 통해서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종부의 마음이 깃든 듯하다. 그 맛은 어떨까. 열한 가지 재료를 골고루 섞어 한 입 머금어본다. 맛은 담백하고 식감은 저마다 재료의 맛이 각각 살아 있다. 동아는 씹는 맛이 있으며 버섯과 기타 나물들은 부드럽다. 흔히 경상도 음식은 짜다는 편견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채소 때문에 부족해질 수 있는 단백질을 꿩고기가 잡아준다. 음식 궁합이란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요리만큼 궁합을 잘 지킨 요리가 또 있을까.
뒤이어 나온 음식들 역시 그 모양과 맛이 훌륭하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담백한 맛, 몸을 보하는 느낌이다. 주 요리가 끝나면 한상 차림이 준비된다. 주 요리는 단계별로 나왔다고 하면 한상 차림은 밥과 국 반찬 등이 한꺼번에 차려진다.
잡곡밥은 윤기가 좔좔 흘러 차지다. 국은 곤드레나물과 무로 끓였다. 배추김치, 된장찌개, 고등어자반 등 열 가지가 넘는 반찬들이 저마다 맛을 자랑하듯 밥상 위에 올랐다. 전라도 지역의 한정식이나 궁중 한정식과는 또 다른 경상도 내륙 지방의 소박한 한정식이다.

후식으로 나온 석이편과 매실차. 더덕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긴 뒤 꿀을 바른 섭산삼과 진달래와 꿀을 얹은 화전, 녹두와 팥앙금으로 만든 빈자병. 꿩고기, 표고버섯, 석이버섯, 새송이버섯을 비늘을 없앤 대구포로 싼 뒤 찜통에 찐 다음 꿩 육수에 밀가루와 골파를 넣어 즙을 내어 만든 대구껍질누르미. 누에 모양으로 생긴 어만두는 생선을 얇게 저며 만두피처럼 만들고 그 속에 표고버섯, 석이버섯, 꿩고기, 잣을 넣었다. 닭고기에 삶은 토란 알과 오이, 잔파, 달걀지단을 고명으로 올리고 국물을 끼얹은 수증계.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는 음식에 콩가루를 묻혀서 잘 먹습니다. 부추, 시래기, 가지나물에도 콩가루를 묻히기도 하지요.”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많은 반찬을 놓기보다는 꼭 젓가락이 가는 반찬들로 엄선한 느낌이다.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온 시간, 이제 미래를 생각하다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들이 고마운지 종부가 인사를 나온다. 단아하고 인자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것의 주인은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재령이씨 종부라는 것이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기에 사실 부담스럽기도 했지요. 그래서 손님을 맞을 때나 음식을 준비할 때에 더욱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답니다.”
환갑이 지났지만 말하는 모습만큼은 쑥스러운 소녀처럼 곱다.
음식은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거울을 후손들에게 남겨줄지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뜻 있는 음식 기행이 됐으면 한다. 아울러 한식이 세계인의 음식이 되는 것. 이 또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 모두가 한식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만은 알고 떠나자! 음식디미방 전통음식 체험은 프로그램 특성상 예약제로 운영된다. 점심시간은 12시 30분부터이며 지정된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최소 예약 인원은 10인 이상이다. 체험 메뉴는 소부상은 3만원, 정부인상은 5만원이다. 자세한 사항은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전통음식 육성 담당(054-682-7764, 054-680-6101~2, http://dimibang.yyg.go.kr/)에 문의하자. 숙박은 두들마을에 있는 병암고택과 영감댁에서 가능하다.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녹일 수 있는 한옥 체험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요금은 객실 크기에 따라 4만원에서 7만원까지다. 문의 054-682-8050, 011-527-8168 |
▲함께하면 좋은 곳 두들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석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과 정부인 장씨가 살던 곳으로 장씨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석계 선생은 석계(石溪-돌층계) 위에 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석계라고 했을 정도로 이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고택은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안채가 배치되어 있고 주위에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다. ![]() 석계 이시명 선생과 정부인 장씨가 살던 석계고택. 음식디미방 음식 체험관 옆에 마련된 장독대. 두들마을이 고향인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 선바위 관광지에서 가까운 남이포. 영남 최고의 민가 연못으로 유명한 서석지. 선바위 관광지의 선분교 음악 분수대. |
그 외에 남이 장군의 설화가 서린 선바위와 남이포,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가 연못으로 손꼽히는 서석지 등도 함께 돌아보면 좋다.
![[주말에 떠나는 테마여행]340년을 지켜온 종가 종부의 손맛을 찾아](http://img.khan.co.kr/lady/201112/20111221171919_5_tema_tra5.jpg)
[주말에 떠나는 테마여행]340년을 지켜온 종가 종부의 손맛을 찾아
2001년 본인보다 여행을 1% 더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해 평생 여행만 하며 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 여행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대 때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신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문화·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이며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작가, 국내 아웃도어 전문업체의 로드플래너 및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빛과 바람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http://room no1.blog.me/)’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글&사진 / 여행작가 임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