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함께 떠난 하루하루 반복되는 ‘오늘’을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유와 새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꿈꾼다. 여기,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그 바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길을 떠난 가족이 있다.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진정한 삶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함께하는 행복을 배웠다는 이 용감한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기가 이달로 끝을 맺는다. 그동안 ‘대책 없음’을 기조로 매 순간 부딪히고 즐기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많은 안식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의 여행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만 아마도 행복을 찾아가는 삶의 여행은 계속될 테니, 언젠가 또 다른 길 위에서 더욱 밝은 모습으로 만날 그날을 기다려보련다. (편집자 주)
![[아메리카 여행기]최종회 - 다시 돌아온 일상](http://img.khan.co.kr/lady/201206/20120621183919_1_dailylife_1.jpg)
[아메리카 여행기]최종회 - 다시 돌아온 일상
“한규야~!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잉, 아빠 도저히 눈이 안 떠져.”
“안 일어나면 학교 안 보낸다!”
아르헨티나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잠시 멈추어 가려던 여행길에서 이제 우리는 아르헨티나 거주민(?)으로 바뀌어버렸다.
한규는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 됐고, 영 학교에 가기 싫어하면 그냥 보내지 않는 대책 없는 엄마 아빠 덕분에 같은 반 친구들 중 가장 낮은 출석률을 자랑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래도 가끔씩 보는 시험에서는 거의 대부분 만점을 받거나 한두 개 틀리는 정도니 까막눈 엄마 아빠를 둔 아이치고는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공부를 잘하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고 그저 한규가 모나지 않고 비뚤어지지 않은 아이로 크기만 바랄 뿐이다. 유아기의 1년을 야생(?)에서 보낸 경험 탓일까?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넉살 하나만큼은 참 좋은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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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여행기]최종회 - 다시 돌아온 일상
아리엘도 어느새 세 살이 됐다. 우리 집의 유일한 외국인(?)임에도 두 살까진 아르헨티나 사람을 보면 울음을 터뜨려 엄마 아빠를 당황하게 만들던 아리엘은 어느새 말도 조잘조잘 잘하고 형을 매우 귀찮게 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멜라니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규가 성격이 좋고 아리엘을 좋아하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형한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년쯤에는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인데 스페인어 한마디 못하고 유치원에 가는 것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엄마 아빠에 형까지 닮아 고집 센 우리 아리엘은 남미사랑에선 ‘주상 전하’로 통한다. 그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규가 아리엘에게만은 꼼짝을 못하니 말이다. 사실 민박집 ‘남미사랑’의 구조를 살펴보면 회장 아리엘, 사장 한규, 부사장 멜라니와 잡부 덩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멜라니는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며 살고 있다. 역시나 한국 아줌마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탱고를 무척이나 배우고 싶어 하지만 아들 셋(?)을 키우느라 쉽지가 않아 시간 날 때 한 번씩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코에 바람을 넣어주며 살고 있다.

미식축구를 다시 시작한 필자. 힘들어도 격렬하게 운동하고 땀 흘리는 시간이 좋다.
코딱지만 한 세상, 길 위의 인연들

작년 봄, 멜라니와 한규가 볼리비아 여행을 떠났다. 어릴적부터 용감했던 ‘여행 베이비’ 한규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는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했다.
광안리의 한 교회에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헤르만이 강연을 하는 동안 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는데 헤르만의 포스 넘치는 차를 보고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 커플이 차를 구경하다가 마침 강연을 마치고 나온 헤르만에게 남자분이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다. 옆에서 가만히 듣다가 그에게 스페인어를 어디서 공부했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에콰도르에서 2년 동안 생활한 적이 있다고 했다. 혹시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소속이었냐고 묻자 그렇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가 여행하던 시기와 대충 일치하는 게 아닌가? 혹시나 싶어서 예전에 에콰도르의 작은 마을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는 한국 가족을 본 적이 없냐고 물으니 그 친구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우리가 여행하던 시기에 에콰도르 북부의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인 것이다. 팔짝팔짝 뛰며 반가워하는 우리를 보고 헤르만이 무슨 일이냐 물었고 상황 설명을 듣더니 헤르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건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야. 대체 어떻게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거야? 이 세상은 참 좁기도 하지” 하며 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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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여행기]최종회 - 다시 돌아온 일상
우리는 지금도 여행을 꿈꾼다
민박집 ‘남미사랑’을 찾는 사람들 중 우리를 알고 온 이들이 가장 많이 물어오는 것이 바로 “이제는 정착하신 건가요?”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는 정착이 아니라 잠깐 멈춘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리엘을 키우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남은 여행 경비를 거의 다 써버려 다시 떠나고 싶어도 떠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남미 여행업. 사람들을 모아서 40일 동안 남미를 도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나중에 또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계획은 이렇다. 이 여행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돈을 벌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요트를 한 척 구입한 뒤 다시 남미를 한 바퀴 돌아 유럽으로 넘어가는 거다. 그 다음 지중해를 죽 돌아 유럽에서 수에즈운하를 거쳐 중동을 지나고 인도로 넘어간 뒤 동남아까지 가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 배를 정박시키고 다시 살아보는 것이 현재 우리의 꿈이다. 이루어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것이 내가 가진 꿈이며 미래의 모습이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한규와 최초로 공개되는 세 살 아리엘의 최근 모습.
무엇이 나를 끊임없이 여행하도록 만드는가?
예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온 캐나다 친구가 나에게 물었었다. “What makes you keep traveling(무엇이 너를 계속 여행하도록 만드는 거니)?”
여행은 분명 고단한 과정이다. 불결하고 좁은 숙소, 무거운 배낭에 꼬질꼬질한 빨래를 한가득 넣고 여기저기 떠도는 삶, 치안에 대한 불안감 등등…. 그럼에도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내 여행의 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다.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것이 나를 계속 여행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인 듯하다. 볼거리는 사람을 금방 질리게도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새로운 배울거리를 만들어준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한규나 아리엘이 커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말이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기보단 사람을 잘 버는 사람이 되길, 아파트 평수가 주는 즐거움보단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들이 되길 바란다. 우린 한국적인 기준으로 분명 좋은 부모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는 좋은 부모는 못 되어도 아이들과 항상 함께해주는 부모는 될 것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 섰을 때,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그 길 위에 ‘함께’ 있을 것이다.
글쓴이 덩헌(이정현)은…
제대 후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기 전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떠난 이탈리아 로마에서 ‘참 좋은 사람’ 멜라니(정미자)를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시작했고 2년 뒤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매일 아침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헐레벌떡 회사로 향하던 어느 날, 결혼할 때 ‘너무 늙어 힘 빠지기 전에 세계 일주를 떠나자’라던 아내와의 약속을 떠올리게 됐다. 그때부터 두 사람 모두 잘나가던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여행 준비에 착수해 드디어 2007년 5월, 생후 43개월 된 아들 한규까지 데리고 거의 ‘무계획’이나 다름없는 일정을 세워 길을 나섰다.
처음의 계획은 미국 LA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2년의 여행이었지만, 1년여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 뒤 어쨌든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민박집 ‘남미사랑’을 운영하며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북미, 중미, 남미를 거치며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와 소소한 깨달음 등을 담은 책 「미친 가족, 집 팔고 지도 밖으로」를 펴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얻은 ‘보석’ 둘째 아리엘까지 넷이서 함께 계속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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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여행기]최종회 - 다시 돌아온 일상
그동안 글재주 없는 사람의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10년 7월, 「레이디경향」과의 인터뷰로 인연을 맺게 되어 이렇게 지면으로 우리 가족의 여행기를 들려드렸네요. 1년 6개월의 연재 기간 동안 저희도 지난 여행을 다시금 추억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매번 늦어지는 원고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은 이연우 기자의 무한한 인내심과 자비로움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사진 / 덩헌